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수그러들지 않은 1938년 겨울, 스웨덴 스톡홀름 인근 휴양지 살츠셰바덴에서는 노동조합총연맹(LO)과 사용자연합(SAF) 간 대타협 협상이 타결된다. 스웨덴 사회적 합의주의의 시발점인 ‘살츠셰바덴 협약’이 맺어진 것이다. 노사가 산업 평화와 합리화를 위해 서로 협력하고 공동의 책임감을 갖자는 것이 협약의 핵심 내용이다. 당시 집권 사회민주당의 재무장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대중 연설을 통해 협약 체결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제 자본 측이든 노동 측이든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힘으로 눌러 원하는 바를 관철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어느 누구도 독점적 권력을 만들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해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권력은 정치 영역이나 산업의 강자로부터 모두가 참여하는 사회로 넘어갔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모델은 살츠셰바덴 협약에서 싹을 틔웠다. 정부나 특정 이해집단이 미리 완성한 청사진이나 설계도에 따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이 우여곡절을 거치며 합의를 이뤄나가는 가운데 조금씩 틀을 갖춘 게 오늘날의 스웨덴 복지체제다. 스웨덴의 사회적 합의주의를 이끈 지도자들은 국가를 ‘국민의 집’으로 여겼다. 모든 국민이 고르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독점도 없고, 특권도 없다. 계급 간 적대적 투쟁도 없다.
스웨덴의 사회적 합의주의 정신에 따르면, 사회는 이익과 선호가 서로 다른 다양한 집단들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곳이다. 사회적 진보란 바로 그런 집단들 간 상호작용이 사회 구성원 전체를 포괄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실제로 스웨덴은 사회적 합의주의를 통해 더 높은 산업화와 경제성장,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향해 끊임없이 진보해왔다.
독점도 특권도 적대적 투쟁도 없어
살츠셰바덴 협약에서 시작한 사회적 합의주의는 1950년대 이후 ‘사회적 연대임금 정책’으로 진화한다. 연대임금 정책이란, 동일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는 동일 임금이 적용될 수 있도록 중앙집중화된 교섭으로 기업 간 임금격차를 최소화한다는 노선이다. 연대임금은 스웨덴 노총 소속 경제이론가였던 예스타 렌(Gosta Rehn)과 루돌프 마이드너(Rudolf Meidner)가 최초 제안했다. 그래서 스웨덴의 연대임금 정책을 ‘렌-마이드너 모델’로 부른다.
두 사람은 대기업에 의존한 경제성장의 부산물인 업종 간, 기업 규모 간 생산성과 수익성 격차, 또 이에 따른 임금격차의 심화를 막아야 한다며 연대임금을 지향한 사회적 교섭을 주창했다.
연대임금 정책의 1차 목표는 저소득 임금노동자의 해소와 고용 확대였다. 그런데 효과는 스웨덴 제조업의 경쟁력 강화와 생산성 증가로 이어졌다. 대기업의 경우 노조가 동의해서 임금 인상을 억제하자 자연스럽게 대외 경쟁력이 커지고 수출이 늘었다. 이에 따른 경영 성과를 직원 복지 향상과 인재 육성, 연구개발(R&D) 투자와 인수합병(M&A)의 재원으로 삼아 자연스럽게 생산성과 경쟁력을 한 단계 더 높였다. 또 남아도는 여유자금으로 투자와 일자리를 늘렸다.
이와 달리 경쟁력 없는 한계 중소기업들은 산업별 중앙교섭에서 제시하는 임금 인상 권고를 수용하지 못해 시장에서 퇴출되거나, 효율적 생산설비를 구축해 생산성을 높여야만 했다. 중앙 임금 교섭의 결과대로 임금을 인상한 이후에도 생존할 수 있었던 중소기업들은 생산성 향상과 이익 증대에 힘입어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계 기업의 퇴출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정부의 적극적 노동정책으로 새로운 직업훈련 교육을 받거나 동일 업종의 대기업과 중견기업으로 전직했다. 사회적 합의로 타결된 연대임금이 임금격차의 해소는 물론, 노동의 숙련도 향상으로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을 가져온 셈이다.
사회적 연대임금이 산업체질 개선과 경제성장,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는 게 확인되면서 스웨덴 국민의 기업과 노조에 대한 지지와 신뢰가 두터워졌다. 이를 계기로 올로프 팔메 총리 재임 기간(1969~1976년)에 스웨덴 정부는 법인세 인상, 고용세 신설 등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복지 확충의 기반을 다졌다. 이렇게 해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스웨덴 방식의 보편적 복지, 노동을 존중하는 생산적 복지가 꽃을 피웠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파고도 넘어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은 시장경제의 작동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시장에 대한 맹신을 경계한다. 시장의 성과를 보충하고 보조하는 수단으로 복지를 바라보는, 이른바 ‘잔여적 복지’는 사회적 합의주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개념이다.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로 꼽히는 스웨덴도 1990년대 초 외환위기와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으며 휘청거리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파고에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도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스웨덴은 쉽게 위기를 극복했다. 위기 극복의 동력 역시 사회적 합의주의 정신에서 나왔다.
재정 긴축과 연금 개혁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쉽게 이뤄지고, 산업·지역별 연대임금 협상이 다시 활발해지면서 대규모 실업 없이 기업 부담을 완화했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사회서비스의 확충을 통한 고용률 제고 노력도 경제 회복에 큰 보탬이 됐다. 1994년부터 2018년까지 25년 동안 스웨덴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6%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가 넘는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2017년 기준 고용률은 7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가운데 3위다. 빈곤율(전체 가구 대비 중위소득 50% 이하 가구의 비율)은 9.3%로, 불평등 지수가 다섯 번째로 낮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 등 공공지출 비중이 26%로 OECD 평균(19%)보다 훨씬 높은데도 국가채무 비율(2016년 40.6%)이나 재정수지(2018년 1.3% 흑자) 등으로 나타난 재정건전성 지표는 다른 선진국의 부러움을 살 만큼 양호하다. 성장, 분배, 고용, 재정 등 대부분 거시지표에서 스웨덴은 모범적인 나라가 됐다.
박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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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