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판결이라도 나쁜 화해보다 안 좋아 윈윈보다 서로 지지 않은 절충점 찾아야”

2019.04.22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l

인터뷰/‘미스터 중재인’ 김지형 변호사

5년여 전부터 사회적 갈등이나 쟁점이 불거지면 단골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풀기 어려운 큰 걱정거리, 고민거리가 생기면 기업이든 노동계든 시민사회든, 심지어 정부조차 그를 먼저 찾는다. 그는 사회적 약자일수록 흔쾌히 어깨를 내주며 함께 해법을 찾는 길에 앞장선다. 대법관을 지낸 김지형(61)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는 2011년 법원에서 나온 뒤 어느덧 ‘미스터 중재인’으로 사회적 공인(?)을 받았다.
김 변호사가 지금까지 뛰어든 곳은 사회적 관심이 뜨거웠다. 서울지하철 구의역 사고 진상규명위윈회 위원장(2016년 6~7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장 직업병 분쟁 조정위원회 위원장(2014년 11월~2018년 11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위원장(2017년 7~10월),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2018년 3월~) 등 맡는 자리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곳이다. 4월 1일 국무총리령으로 출범한 ‘고 김용균 사망 사고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김용균 특조위)’의 위원장도 맡게 됐다. 그는 위원회 첫 회의에서 “24살 청년 노동자의 속절없는 죽음이 던진 질문에 우리 사회 모두가 문제의식을 갖고 함께 답을 찾아야 한다”며 “노동 안전 문제를 국가·사회적 의제로 삼아 심층적으로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김지형 변호사는 첨예한 갈등 현안일수록 사회적 논의라는 틀로 풀어내는 게 바람직하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적 논의란 함께 해답을 찾아가는 절차이지 미리 한쪽에서 정해둔 해답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지평 사무실에서 김지형 변호사를 만나 사회적 논의의 의미와 성과, 활성화 방안 등을 들어봤다.

패자가 수용하고 위안 느낄 수 있도록
-대법관 출신이면 쉽고 편한 길이 많을 텐데 구태여 복잡한 갈등 현안들을 도맡아 조정·중재에 애쓰는 이유가 궁금하다.
=30년 가까이 법원에서 판결로 시비를 가리는 일을 하면서 누군가에게는 응어리를 남긴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법원 판결은 승자와 패자를 나눠 한쪽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법관으로 공정한 재판을 하고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고 지는 쪽에는 후유증이 남아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된다. 이렇게 해서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의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는 쪽에서도 결과를 수용하고 위안을 느낄 수 있는 절차가 필요하다. 갈등 당자자 간 양보와 타협을 이끌어내는 조정과 중재가 바로 그런 절차라고 생각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참여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중재와 조정, 사회적 논의로 갈등 현안을 해결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단점이 있지 않나.
=분쟁이나 갈등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파이를 놓고 서로 다투는 상황을 예로 들면, 파이를 누가 차지할지와 파이를 어떻게 나눌지 고민하는 경우로 구분해볼 수 있겠다. 법원 판결처럼 파이를 누가 차지할지 결론을 내는 것은 승자독식, 양자택일의 선택이다. 현실에는 이런 유형보다 파이를 어떻게 나눌지를 놓고 생기는 갈등이 더 많다. 따라서 어떻게 나눌 것인지 당사자 간 양보와 타협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조율하고 조정하는 사회적 장치가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판결이라도 나쁜 화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경구가 있다. 사법절차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 한다. 조정과 중재, 사회적 합의의 경험이 많이 쌓이면 시행착오를 줄여 분쟁이 장기화하는 문제는 저절로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원전, 공론화 거치지 않았다면 더 갈등
-삼성전자 직업병 분쟁 조정 활동에 대해 백서를 낼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백서가 성공의 기록으로, 유사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
=조정위원장을 맡기 시작할 때부터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백서 발간을 염두에 뒀다. 중재가 실패하더라도 반면교사의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2007년, 고 황유미 씨가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뒤 불거진 삼성 직업병 분쟁은 타결 때까지 무려 11년이나 걸렸다. 조정위 활동 기간만 4년이다. 어렵게 삼성과 피해자 쪽이 중재안을 받아들여 매듭지었지만 당사자들보다 우리 사회에 남긴 숙제가 있다. 무엇보다 후진적인 산업재해의 재발을 방지하고, 노동자의 건강권 보장에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법과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현행 산재 관련 법령과 법원 판례는 재해를 당한 노동자에게 업무 관련성에 대한 증명 책임을 떠넘긴다. 입증 책임을 고용주에게 전환해야 기업들이 재해 예방 활동을 강화하도록 유도하고 분쟁도 줄일 수 있다. 백서는 조정 활동에 대한 단순한 기록뿐 아니라 이런 법·제도적 개선 방안까지 담아 올해 안에 낼 계획이다.

-원전 공론화위원회 활동은 문재인정부 출범 뒤 가장 눈에 띄는 사회적 논의 실험으로 평가받는다. 찬반양론이 팽팽한 갈등 현안을 시민이 참여하는 ‘공론조사’ 방식으로 해결한 셈이다. 그런데 공론화위원회의 결정과 권고에 따라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이 확정된 뒤에도 반발 여론이 여전히 만만치 않다. 사회적 논의라는 게 첨예하게 의견이 엇갈리거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영역을 줄여야 하는데 사회적 수용성이 낮으면 효과가 없는 것 아닌가?
=원전 문제에 대해 공론화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생각해보자. 지금보다 논란이 더 뜨겁고 갈등도 심했을 것이다. 전력 수급을 원전에 의존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오다가 방향을 튼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고 저항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나마 공론화 절차를 통해 이런 저항을 어느 정도 여과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공론화위 활동은 법적 근거가 미비한 가운데 진행한 일종의 ‘원포인트 사회적 논의’였다. 국가정책 결정 과정에 의견 수렴을 좀 더 정교히 하기 위해 일반 여론조사가 아니라 시민대표가 직접 참여해 숙의하는 ‘공론조사’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주요 정책 결정에 대한 이런 공론화 절차가 활발하다. 공론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법과 제도적 기반이 잘 갖춰져 있고,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성과 중립성을 갖춘 상설 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정책 변화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고 후유증을 줄이려면 우리도 공론화 기구의 상설 운영을 위한 법제화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l

최저임금, 수준보다 결정 방식 더 숙의
-김용균 특조위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 문제를 특정 사업장의 안전불감증이나 재해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왜 그런가?
=노동자 생명과 안전보장은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국가는 노동하는 국민 모두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노동안전의 이익은 결코 노동하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갈 공동선이다.
그런데 현실에선 노동자의 직업이나 신분, 지위에 따라 선별적으로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 김용균의 죽음 이전에도 산업현장에는 무수한 죽음이 있었다. 국가적인 수치이고 불명예다. 고 김용균 씨의 사고를 계기로 무수한 죽음의 원인에 대해 사회공동체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근본적인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특조위는 진상 규명을 넘어 재발 방지 대책 등 산업재해 전반을 다루는 사회적 논의 기구인가?
=그런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려고 한다. 위원회에도 사업주와 노조 쪽 관계자 외에 시민사회 대표와 전문가 그룹이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다. 특조위에서는 노동 안전 비용의 문제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지불할 것인지도 논의할 계획이다.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자랑할 만한 소득수준을 갖췄는데도 사회 전반의 안전에 필요한 비용은 소득 증가분에 비례한 만큼 지불하지 않고 있다. 안전에 대한 사회적 비용을 얼마만큼 지불하느냐를 살펴보면 한 사람의 생명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사회인지 판가름할 수 있다. 고 김용균 씨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사고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그동안 누적되어온 문제,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가 방관해온 문제가 고 김용균 씨가 일한 사업장에 투영돼 나타난 것이다. 그런 만큼 사회적 성찰이 필요하고 더 이상 땜질식 처방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산업재해 문제 말고도 사회적 논의와 합의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대표적으로 최저임금 인상 수준이나 결정 방식의 변경안을 놓고 갈등이 커지고 있다.
=최저임금 문제에 관련해 여러 가지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데, 먼저 최저임금의 의미에 대한 인식의 공유가 필요하다고 본다. 최저임금이 노동 계층의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수준이라면, 그런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사회적 공감을 얻는 게 선행돼야 한다. 이런 사회적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논의 절차를 소홀히 한 채 정책 목표만 내세워 수준을 결정하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최저임금의 수준보다 최저임금 결정 방식과 과정에 대해 좀 더 숙의해야 한다.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 더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면 사회적 공감대도 자연스럽게 넓어질 것이다. 주체로 참여한다는 것은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동시에 논의 결과에 따른 비용과 책임 분담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정부 인내심갖고 조정·중재역 해야
-갈등 조정이나 사회적 논의 과정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인가. 개입한다면 어느 정도,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 게 좋은가?
=사회적 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는 이유 중 하나가 정부 개입에 따른 공정성 시비다. 정부가 사실은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해 정책을 추진하면서 의견수렴절차를 거쳤다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사회적 논의를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부정적 경험이 쌓이면 사회적 논의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정부의 개입은 사회적 논의의 실패 위험을 키운다. 개입한다면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며, 공정한 조정자와 논의 촉진자로서 신뢰를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 프랑스의 동양학 권위자인 프랑수아 줄리앙이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라는 책을 썼다. 중용의 뜻을 잘 표현한 책 제목이다. 어느 한쪽의 입장이나 가치에 스스로 가두는 것을 경계하는 게 중용이다. 조정·중재를 하거나 사회적 논의를 촉진하려면 이런 중용의 덕목을 가져야 한다.

-사회적 논의의 핵심 주체인 경영계와 노동계도 여러 갈등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좀 더 전향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사회적 논의란 어느 한쪽의 이익에 기반한 해답을 관철하는 수단이 아니다. 서로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해답을 찾아나가는 절차가 사회적 논의이다. 사회적 논의 절차 참여 여부를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주체적인 권한을 행사한다면 책임 의식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흔히 ‘윈윈’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해관계가 복잡한 현실에서 서로 이기는 게임이 성립되기는 어렵다. 서로 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창조적 절충점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게 더 현실적인 접근이다.

-디지털 전환 또는 4차 산업혁명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갈등 요소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산업구조와 소비 행태, 생활 방식 등의 변화로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생기는 갈등인데,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으로서 이런 성격의 갈등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고 보나.
=사회·경제적 변화로 새로운 갈등이 등장하고 심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재 시점에서 부각될 뿐이지 늘 있어왔던 갈등 유형이다. 다만 증폭되어 보이는 이유는 여전히 그런 갈등을 관리하고 조정하는 기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갈등과 분쟁을 피할 도리는 없다. 생각과 지키려는 가치가 각각 다르니까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조정하는 절차와 제도이다. 이런 갈등 조정의 절차와 제도, 관행을 개선하고 좋은 경험을 쌓아나가는 게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글 박순빈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

관련기사

페이지 맨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