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9일 인천광역시 인천백병원에서 만난 변나래 씨는 “인천백병원에서 정규 직원으로 일한 지 이제 막 한 달이 됐다”며 밝게 웃었다.
“일이요? 재밌죠. 함께 일하는 분들도 참 잘해주시고, 근무 환경도 좋아요.”
지난 4월 9일, 변나래(24·지적장애 3급) 씨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퇴근할 때 한쪽 어깨에 걸쳐 멘 미니 크로스백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에 “어제 받은 첫 월급으로 산 가방”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월급으로 가방도 샀고, 택시도 타봤어요. 그렇다고 돈 다 쓸 거 아니고요. 저축도 열심히 하려고 해요.” 누가 봐도 20대 풋풋한 사회 초년생의 모습이었다.
변 씨는 지난 3월 4일 인천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인천백병원에 정규직 직원으로 입사했다. 이 병원 내 6층 6병동이 그의 근무 장소다. 변 씨는 이곳에서 주중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점심시간을 빼고 매일 4시간씩 일하고 있다. 간호조무사 공부를 하는 ‘병원 보조원’ 이숙경 씨를 도와 환자 침구를 정리하고, 각종 진단에 필요한 검체를 진단실로 옮기는 등 6병동 업무 지원을 하는 게 그의 일이다.
“오늘 엄청 바쁜 날이었어요. 퇴원하는 환자의 침구를 정리했고요. 그분이 쓰던 침대로 옮기고 싶어 하는 다른 환자분이 있어서 도와드렸어요. 시트도 새로 갈고, 환자복이 필요하다는 분께 환자복 갖다드리고….” 퇴근 후 만난 변 씨는 이날 한 일들을 설명했다.
▶변나래 씨(오른쪽)가 검체통을 진단 검사실에 전달하고 있다.
“바쁘지만 적성 맞아 하루하루 기뻐”
6병동 내 병실은 모두 13개. 입원하는 환자 수만 평균 50여 명. 작지 않은 규모라 일이 꽤 많지만 변 씨는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하루하루 기쁘다”고 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사회생활은 매우 험난했다. 구인 사이트 등에 올라온 정보를 통해 몇 군데 사업체에서 일을 해봤지만 오래 다니지 못했다. 일자리마다 비장애인 위주로 돌아가는 탓에 업무를 익히는 게 쉽지 않았고, 환경도 낯설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이들도 만났다. 시력이 좋지 않은 변 씨를 향해 “눈이 뭐 그렇게 나쁘냐”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임금을 체불하는 사업주도 있었다. 여느 사회 초년생들처럼 취업 현장에서 차근차근 일을 배우며 사회에 잘 안착하고 싶다는 바람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인에게서 인천광역시 중구장애인종합복지관(이하 복지관)에 가면 취업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단 얘기를 듣고 복지관 문을 두드렸다. 복지관을 통해 ‘현장중심 직업훈련(First Job)’(이하 퍼스트잡)을 받으면서 지금 직장과의 좋은 인연이 시작됐다.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인 한국장애인개발원이 추진하는 퍼스트잡은 전환기 장애 청소년 및 미취업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장애인이 사업체 현장에서 훈련지원인과 함께 직무 훈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중증장애인의 취업률을 제고하고 취업 유지율을 높이자는 게 주요 취지다. 복지관처럼 지역별 수행기관(현장중심 직업재활센터)이 사업체와 참여자 모집, 훈련지원인 배치 등을 맡는다. 3~6개월 훈련 후 평가를 거쳐 변 씨처럼 사업체에 정규 직원으로 취업할 수도 있다. 변 씨는 복지관(수행기관)을 통해 한 제과·제빵 업체와 인천백병원 두 곳에서 훈련을 받았고, 두 곳 중 인천백병원에 취직할 수 있었다.
▶변나래 씨가 침구 정리를 하고 있다.
“‘너도 할 수 있다’는 격려가 큰 도움”
기존 중증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재활 프로그램은 장애인이 실제 일하게 될 현장이 아닌 장애인서비스 기관이나 시설 등 별도의 독립 공간에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탓에 취업으로 연결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취업이 되더라도, 장애인이 직장에 적응하고 근속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퍼스트잡은 훈련생들이 사업체 현장에서 현장감을 익히며 직무 훈련을 받는다는 점에서 차별점이 있다. 사회 적응 훈련, 대인관계 훈련 등도 병행해 사회생활 전반에 필요한 역량도 기를 수 있다. 덕분에 이 프로그램을 통해 취업한 장애인들의 취업률과 고용 유지 비율도 높게 나타나고 있다. 변 씨는 “퍼스트잡을 통해 ‘너도 할 수 있어’라고 격려를 많이 받았던 게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직무훈련 기간을 통해 업무 적응력을 다진 덕에 변 씨는 병원 동료들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있다. 6병동 수간호사 윤정임 씨는 “간호사 업무가 워낙 바쁜 탓에 일하다 보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가 많다”며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나래 씨가 잘 커버해주고 있다”고 했다.
“사실 이런 제도가 있는지 몰랐는데, 나래 씨가 잘 안착하는 걸 보니 참 괜찮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병동 업무가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니까 ‘일 괜찮아요?’ ‘별일 없죠?’ 정도로만 겨우 물어보거든요. 나래 씨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동료들이 미처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럴 때 복지관 선생님께서 중간에서 역할을 많이 해주세요. 프로그램 완료하고 취업한 후에도 나래 씨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힘든 건 없는지 살펴봐주셔서 우리 입장에서도 참 좋습니다.”
변 씨와 늘 함께 일하는 이숙경 씨는 “나래 씨 성격이 밝고 긍정적이고, 뭐든 열심히 하려 해서 병원 사람들과도 원만히 잘 지낸다. 매우 잘 적응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훈련을 받았던 곳이 지금 직장이라 훈련생 때부터 변 씨를 봐온 환자들도 있다. 변 씨는 “음료수를 건네며 아는 척해주시는 분도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아까 ‘여사님’(이숙경 씨)이랑 시트 갈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아가씨 그땐 유니폼 안 입었는데 이번엔 입었네’라며 반겨주셨어요. 취업 전, 훈련받을 때는 유니폼을 안 입었거든요. 아주머니가 취직됐냐며 축하해주셔서 기분이 좋았어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도 관심 많아”
사실 누구에게나 첫 사회생활이 힘든 것처럼 변 씨한테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변 씨는 “최근엔 병원에서 쓰는 여러 가지 영어를 익히고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며 업무 중 배운 용어를 설명하기도 했다. “‘오피’(OP·operation)는 ‘수술 환자’를 뜻해요. ‘오아르’(OR·operation room)는 ‘수술실’이라고 하더라고요. 특정 도구 이름도 외워둬야 해요. 근데 병원에서 일하지 않았으면 이런 것도 배우지 못했을 테니까 제겐 좋은 일이죠.”
변 씨는 “그동안 적성에 맞는 일을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퍼스트잡을 통해 그런 일을 찾은 것 같다”며 “서툰 점이 있을텐데 모두 이해해주고 배려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원장님을 비롯해 병원 식구들한테 감사하죠.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라’ 등 동료분들한테 격려의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기분이 좋고 힘도 나요.”
변 씨는 퍼스트잡을 통해 만난 ‘첫 직장’의 경험으로 조금씩 자신의 미래도 그려보고 있다. 그는 “병원 일을 경험해보면서 나중에 기회가 생긴다면 대학 진학해서 간호학을 공부하면 어떨까 생각도 했다”고 했다. “쉽진 않을 거예요. 고등학교 때 만났던 특수학생 담당 선생님처럼 제 상황에 맞춰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선생님이 계신다면 대학 진학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메이크업 아티스트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요. 전보다는 자신감과 용기가 많이 생겼어요.”
글 김청연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
▶한 중증장애인이 ‘퍼스트잡’을 통해 커피숍에서 직무 훈련을 받고 있다.│한국장애인개발원
퍼스트잡 프로그램이란
3~6개월간 하루 3시간 주 5일 훈련 전국 8개 권역 360명 중 125명 취업
현장에서는 발달장애 등 중증장애를 가진 이들의 고용 확대 및 유지를 위해 기존의 시설 중심 직업재활이 아닌, 현장에서 직접 고용으로 연계될 수 있는 새로운 모델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돼왔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이 지난 2016년 퍼스트잡 프로그램을 시작한 배경이다.
퍼스트잡은 미국의 ‘프로젝트 서치(Project Search)’ 프로그램을 국내 여건에 맞게 적용한 것이다. 프로젝트 서치는 주로 발달장애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며, 발달장애인의 직업능력 향상과 취업 성공률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학생들은 약 1년간 학교 대신 직업 현장으로 출근해, 기술 교육 수업과 직업훈련 그리고 현장에 배치된 직업 담당교사(Job-coach)에게서 대인관계 및 사회 적응 훈련, 지역사회 적응 훈련 등을 받는 식으로 진행한다.
퍼스트잡의 경우 훈련생인 장애인들이 공공기관, 제조업체, 카페, 병원 등에서 3~6개월 동안 하루 3시간 이상 주 5일간 훈련에 참여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훈련 장소는 지역사회 내 사업체로 4대 보험에 가입돼 있고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노동관계 법령에서 규정하는 산업 안전 보건 등 작업 조건이 정비된 사업체 중에서 선정한다. 훈련생 3~4인당 한 명의 훈련지원인이 배치돼 직무훈련을 돕고, 훈련생이 취업한 후에도 수행기관에서 지속적인 사후 지원을 해준다.
2016년 8월부터 시범사업으로 실시한 퍼스트잡은 당시 경남지역 참여 사업체 12개소에서 48명의 중증장애인이 훈련생으로 참여했다. 이 중 22명이 취업(취업률 45.8%)했다. 2017년에는 전국 5개 권역(수도권·충청권·전라권·경북권·경남권)으로 사업 범위를 확장해 진행한 결과, 훈련에 참가한 중증장애인 훈련생 249명 중 97명이 취업(취업률 39%)했다.
2년 동안 시범사업을 거쳐 본 사업으로 실시한 2018년부터는 전국 8개 권역(서울·인천·대전·강원·울산·전남·경북·경남)으로 사업이 확대됐고, 중증장애인 훈련생 360명 중 125명이 취업(취업률 34.7%)했다. 2019년에는 수행기관도 기존 11곳에 더해 올해 2개소가 추가 선정되고, 중증장애인 훈련생 660명이 퍼스트잡 프로그램에 참여할 예정이다. 한국장애인개발원 측은 “더 많은 중증장애인이 자신한테 맞는 일자리를 찾고, 안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공공영역뿐 아니라 민간 사업체의 참여도 활발해졌으면 한다”고 했다.
김청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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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