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문 부수고 경성여고보 3·1만세 앞장

2019.04.15 최신호 보기


l▶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고수선 선생은 손가락이 불구가 될 정도로 고문을 받았다.│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1919년 1월 31일자 <신한민보>의 기사는 전국을 요동치게 했다. ‘전 대한제국 광무황제께서는 나라 망한 후에 덕수궁 중에 구류되어 옥수 후정의 깊은 한으로 세월을 보낸 가운데 울울히 병이 되어 점점 침독하더니 이달 20일에 승하하셨다더라.’
고종 황제의 서거 소식은 충격을 넘어 전 국민을 상실감에 이르게 했다. 국권을 상실한 지 9년이 되었지만 나라를 지탱해주고 있던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꺼진 것만 같아 민족의 울분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문상에 참여하기 위한 조문 행렬은 2월 26일 3000명, 27일 6000명으로 끊이지 않았고 학생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그 가운데는 흰 소복을 입은 여학생 고수선도 있었다.

l▶한국 여의사를 소개한 미국 엽서 속 고수선 선생

‘행실이 좋지 못한 학생’으로 찍혀
고종 황제의 장례가 치러지는 날, 학생들은 수업 종이 울렸지만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시작되자 그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학교 전체를 울렸다. 망국의 설움이 북받쳤던 학생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자, 교장은 각 반 대표 학생들이 덕수궁 대한문을 다녀오라고 허락했다. 고수선을 포함한 몇몇 여학생은 소복단장을 하고 대한문 앞에서 조국의 현실에 울음을 쏟아냈다.
일제하에서 순종을 강요당했던 교육의 현장은 곧 민족의 현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황제의 죽음과 역사 왜곡의 현실에 울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던 학생들. 그들은 수업 시간 일본인 교사와 소리 없는 전쟁을 감당해내고 있었다.

“이순신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것은 날조된 것이니 잘 알기 바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역사와 미술을 담당한 일본인 시바다 교사가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왜곡해서 이야기하자, 순간 모욕감을 느낀 학생 고수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선생님, 제가 학교와 부모님에게서 배운 이순신 장군은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고수선의 말에 동조하듯 다른 학생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항의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단체 행동을 우려해 교사는 서둘러 수업을 마무리했지만 그 사건 이후 고수선은 ‘행실이 좋지 못한 학생’으로 기록되어 그해 조행란(操行欄·학생의 태도와 행실을 평가하는 항목)에서 병(丙) 등급을 받았다.

고수선은 3·1운동 당시,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사범과 1년 과정에 있었다. 기독교 중앙감리교회 전도사였던 박희도 선생과 몇 해 전부터 교류하면서 서클도 꾸렸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김숙자, 이덕순, 이양전, 고수선, 강평국, 김일조, 이남재, 최정숙, 노순열, 이은, 이덕요, 이정의, 유재룡 등 본과 사범과·기예과 학생 20여 명으로 구성된 서클은 2월 28일 박희도 선생에게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는다.

l▶고수선 선생이 아들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고 선생의 아들은 어머니의 정신을 이어받아 제주 선덕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교내 서클 꾸리고 독립선언서 받아
3월 1일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만세 소리를 높이기로 했다. 그런데 당일 아침,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담벼락에서 독립선언서 꾸러미가 발견되자 학교는 심각성을 파악하고 교직원 회의를 연 뒤 교문을 폐쇄했다. 정오가 임박해오고 학생들은 교문 앞에 망연자실한 채 서 있었다. 그때 고수선은 손도끼를 들고 닫힌 교문을 힘껏 내리치며 앞장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학생들도 돌과 칼, 도끼를 찾아 들고 교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교생 모두가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쉼 없이 부르짖었던 만세. 고수선은 머리가 헝클어지고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맨발로 걷고 있었지만 웃으며 만세를 외쳤다.

만세를 외치는 인파 속에서 수많은 학생 무리를 발견한 일본 경찰은 학생들의 만세시위 가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찾아 학생들을 하나하나 조사해나갔다. 그때 일본인 교사 아사노가 고수선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디 갔다 오느냐.”
“네. 우리는 독립만세를 부르고 오는 길입니다.”
“독립은 누구 맘대로 시켜준다더냐.”
“우리 삼천만 국민 모두가 독립을 원하는데 왜 독립만세를 못 부릅니까. 그리고 왜 독립을 못 찾겠습니까?”
너무도 당당한 고수선의 모습에 말문이 막혀 서 있었던 일본인 교사. 이렇듯 고수선은 어느 자리에서든 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했다.

고수선은 제주 대정읍 가파도에서 부친 고석조와 모친 오영원 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매우 강했던 그는 집에서 4km 떨어진 야학을 몰래 다니며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했다. 그렇게 배움의 길로 들어선 그는 제주 신성여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일본 의학전문학교를 수학했고, 다시 경성의학전문학교 과정을 거쳐 제주 여성 최초의 여의사 1호로 이름을 알렸다.

손가락 불구될 정도로 고문 시달려
3·1운동 참여 이후에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군자금 모집 요원으로 국내에 군자금을 송금하는 활동도 했다. 그러던 중 일본의 주요 인물로 부각되면서 감시 용의자 명단에 오른 그에게 일제의 감시는 끊이지 않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오카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 고수선은 관동대지진 당시 국내로 귀국했지만 3·1 만세시위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손가락이 불구가 될 정도로 고문을 받고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모진 풍파와 고통, 그리고 도전의 연속이었던 그의 일생을 접하며 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역할이 결코 미미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활동은 광복 이후에도 빛을 발했다. 6·25전쟁의 고아들을 구휼하고자 홍익보육원, 제주 모자원, 송죽학원, 선덕어린이집, 경로당 등을 설립했을 뿐 아니라 여권 신장에도 기여했다. 1952년에는 제1대 제주도의회 의원직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지며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데 앞장섰다.

l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관련기사

페이지 맨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