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체육관·도서관, 살 맛 나는 우리 동네

2019.05.06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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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10분 거리에 체육시설과 도서관, 요양시설, 휴양림 등이 생긴다면 우리 생활은 어떻게 달라질까? 아침에 일어나 운동한 후 출근하고, 퇴근길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리고, 토론 모임에 참여하는 게 일상이 될 수도 있다. 집 가까운 요양시설에 부모님을 모시고, 자주 안부를 살필 수도 있다. 미세먼지를 피해 몇 시간씩 달려 지역의 휴양림을 찾는 대신 동네 가까운 휴양림에서 산림욕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렇게 사람들이 먹고, 자고, 자녀를 키우고, 노인을 부양하고, 일하고 쉬는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인프라와 삶의 기본 전제가 되는 안전시설을 ‘생활SOC’라고 한다. 여기서 ‘SOC’는 Social Overhead Capital의 줄임말이다. 기존 SOC가 도로·철도 등 경제 기반 시설을 주로 의미했다면, 생활SOC는 생활 편익을 높여주는 시설과 일상생활의 기본 전제가 되는 안전시설을 말한다. 이런 시설이 확충되면 일상 속 삶의 질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도서관, 체육시설 등 생활밀착형 SOC를 이용하는 사람들 이야기, 정부의 생활SOC 계획 등을 만나본다.

l▶지난 4월 25일 서울 은평구립 구산동도서관마을에서 학생들이 책을 보고 있다.

마실 가듯 주택가 사뿐사뿐, 공간-책-사람 연결
은평구립 구산동도서관마을

“우리 이야기 같이 나눠볼까요? 영화로 보고, 책으로도 읽어봤는데 관점이 크게 달라진 게 있었나요?”
닉네임 ‘도서관백수’가 운을 떼자 닉네임 ‘마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 캐릭터가 많이 다르게 보였어요. 영화에서는 굉장히 가부장적으로 보였는데 책에선 자녀, 아내에 대한 마음이 잘 느껴져서 참 좋더라고요.”
닉네임 ‘너구리’(이정길 씨)는 “영화보다 책이 재미있었어요. 영화를 봐서 대략 스토리를 아는데도 ‘다음’이 기대되는 거 있죠?”라고 말했다. “근데 그게 뭐였더라? 이 책 서술 시점을 뭐라고 하죠?” 너구리의 질문에 닉네임 ‘달팽이’(문선미 씨)가 바로 대답했다. “다중 일인칭 시점!” 순간 모두의 입에서 “그래, 맞아!” 소리가 나왔다.
4월 25일 저녁 7시 30분. 밖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서울 은평구 구립 구산동도서관마을(이하 도서관마을) 미디어교육실에선 이야기꽃이 피고 있었다. <빌리 엘리어트>(프로메테우스출판사)를 읽고 와 자유롭게 토론하는 이들은 도서관마을 동아리 ‘영화읽기’의 회원들. 매달 둘째, 넷째 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부터 10시까지 열리는 모임은 영화와 책으로 나온 작품을 선정해 이 둘을 모두 보고 토론하는 식으로 꾸려진다. 구산동, 역촌동, 대조동 등 멤버는 모두 은평구 주민들이다.

l▶미디어 교육실에서 ‘영화읽기’ 동아리 회원들이 토론하다 포즈를 취했다.

이 동아리의 첫 단추를 끼운 건 ‘달팽이’ 문선미 씨였다. 도서관마을 사서이자 은평구 주민이기도 한 그는 “책을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방법을 생각하다가 영화와 책으로 나온 콘텐츠를 사람들과 함께 보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했다. 꾸려진 지 2년 정도 된 동아리에는 성별, 세대 등 장벽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도서관마을에는 이 동아리 말고도 30여 개 동아리가 있다. 마을 속 작은 마을처럼 각각의 동아리들은 ‘바느질공방’ ‘어울라디오’ ‘추리소설’ ‘여행책동아리’ ‘도서관합창단’ ‘구산마을스케처’ 등 주제가 다양하고, 주민 참여가 활발하다. ‘마녀’는 “제 경우 바느질공방, 추리소설, 파워독서 등 여러 개 동아리에 참여해요”라며 “거의 매일 도서관에 오는 것 같아요. 덕분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라고 했다.

l▶‘만화가들의 방’에서 청소년들이 만화책을 보고 있다.

주민이 주도하고 지자체 등이 지원
도서관마을은 서울 지하철 6호선 구산역 3번 출구, 예일여고 근처 주택가 사이에 있다. 대다수 도서관이 주민들이 사는 주택가와 동떨어져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
2015년에 도서관마을이 문을 연 후 주민들 일상은 많이 바뀌었다. 구산동 인근의 주민들이 지역 도서관을 이용하려면 꽤 먼 거리를 걷거나 자가용 등을 이용해야 했다. 집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도서관마을이 생기면서부턴 밥 먹고 산책하러 나왔다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마치 마실 가듯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됐다. 이날도 도서관이 문을 닫는 밤 10시가 다 될 때까지 도서관 곳곳엔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세대의 주민들이 보였다. 이른바 ‘생활밀착형 SOC 도서관’ 사례로 손꼽혀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 방문하는 일도 잦다. “주택가 안에 도서관이 있네요”라며 놀라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도서관마을은 지역 주민들이 주도하고, 지자체 등이 주민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세운 도서관이다. 이 지역 초등학생을 둔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줄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며 주민센터 내에 작은 도서관을 마련했던 게 시작이었다. 2006년 5월, 엄마들을 중심으로 한 꿈나무어린이도서관 자원봉사자들은 구산동주민센터가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도서관을 건립하자는 내용의 은평구 주민 청원을 시작했다. 10여 일 만에 2008명이 서명했다. 2008년 은평구는 다세대주택과 단독주택 등 여덟채를 살 예산을 배정했다. 그런데 부지는 매입했으나 건축비가 없었다. 다행히 2012년 도입된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제에 선정되면서 도서관의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도서관마을은 은평도서관마을사회적협동조합이 위탁 운영한다. 직원 29명 중 약 8명은 지역 주민이다. 같은 동네 이웃이기도 한 사서가 눈인사를 하며 책을 권하고, 문화 행사나 동아리를 소개하는 게 이곳에선 흔한 풍경이다.
예산도 충분하지 않았을뿐더러 기존 마을 골목 풍경을 살리자는 의견 등에 따라 건축을 할 때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2550㎡. 도서관은 일반적인 사각형 건물이 아니라 들쑥날쑥 다각형이다. 노랑과 흰색, 잿빛 외벽이 불규칙하게 이어져 있다. 연립, 기와집 등 기존 이 자리에 있던 집 몇 채를 허물지 않고, 골목길과 함께 커튼월 공법으로 품었다.

l▶근처 구산중, 덕산중에 다니는 학생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 나누며 공부를 하고 있다.| 김청연 기자

서가와 복도 구분하지 않은 개방형
내부에 들어서면 옛날 주택 발코니가 보인다. 서가가 일렬로 빽빽이 배치돼 있고, 공간 구획이 분명한 다른 도서관과 달리 서가와 복도 등이 구분돼 있지 않은 ‘개방형’이란 점도 특징이다. 그야말로 책과 사람이 공존하는 ‘마을’ 안에 들어온 기분이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이란 이름에 얽힌 사연을 묻자 한탁영 팀장(정보서비스 1팀)이 설명했다. “이름이요? 구산동 마을에 도서관이 있는 게 아니라 이 자체로 ‘구산동도서관마을’을 만들어보자는 뜻이 담겨 있어요.”
도서관 하면 으레 조용히 혼자 앉아 ‘열공’하는 분위기를 떠올리지만 도서관마을에는 ‘열람실’이 없다. 한탁영 팀장은 “도서관이 단순히 책이 있고,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책을 중심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넓혀가는 곳이란 의미로 열람실을 굳이 만들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했다.
대다수 도서관에서 보기 어려운 ‘마을자료실’ ‘만화의 숲’ 등의 공간도 눈에 띈다. 만화의숲은 도서관에서도 만화를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주민 의견에 따라 마련했다. 그야말로 수요자 의견에 따라 꾸려지는 공간이다.

동아리 활동을 하는 주민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도서관이 주민 주도로 꾸려지고 있다는 사실이 읽힌다. 도서관은 책을 매개로 한 지역 주민들의 소통과 연대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너구리’ 이정길 씨는 “동아리 덕에 도서관마을에 오게 됐어요”라고 했다. “어느 날 집 서재에 꽂힌 책을 보면서 너무 편향적으로 책을 읽었나 싶더라고요. 독서에 균형을 잡고 싶었는데 지인이 도서관마을에 가면 동아리 등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아마 책만 보는 곳이면 찾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참여해보고 계속 오게 되더라고요. 동아리분들과 협의해서 책과 영화를 선정해 자유롭게 토론하는데, 영화 한 편과 책을 보고 여섯 명이 토론하면 여섯 편의 영화와 책이 돼요.”(웃음)

l▶2018년 9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서울 은평구 구산동 도서관마을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민생활 SOC 현장방문, 동네건축 현장을 가다’ 행사에서 도서관을 둘러 보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영화 보고 책 보고 자유롭게 토론
‘도서관백수’는 “다른 도서관도 시설은 잘 갖춰졌지만 열람실, 자료실, 시청각실 등 공간이 분리돼 있는 데 반해 도서관마을은 오밀조밀 모여 있으면서 다 연결돼 있어요. 공간만이 아닙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도 연결돼 있죠”라고 했다. “특히 사서 선생님들이 특별합니다. 주민들끼리 ‘관계 맺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죠. 덕분에 책으로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하며 폭넓은 배움을 경험하죠.”
영화읽기 동아리의 이수진 씨는 “도서관 하면 딱딱한 느낌이 있는데 여긴 자유로운 분위기예요. 아이가 실수하더라도 포용해줄 거 같은 느낌이 있죠”라고 했다. “사서 선생님들이 동네 주민처럼 굉장히 친근하다는 점도 좋아요. 다른 도서관도 이렇게 동아리나 문화 강좌 등이 많나요? 도서관에서 주민들과 여러 가지 활동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이 마을 일원이네. 내가 이 동네를 함께 열심히 키우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웃음)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4일 도서관마을을 찾아 “정부가 추진하는 SOC의 모범”이라며 “지역 주민이 주도하고 지자체와 정부가 지원하는 협치의 대표적 모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도서관마을에 대한 이야기는 올해 출간한 만화 <날마다 도서관을 상상해>(창비)를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다.

l▶4월 29일 오전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신일중학교 신일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배우는 주부들이 물살을 가르고 있다. | 곽윤섭 기자

학교 안에 수영장 운동 뒤 출근 하루 거뜬
일산서구 신일스포츠센터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에 사는 장준모 씨는 매일 새벽 6시 30분 집에서 자전거나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신일스포츠센터’(이하 센터)를 찾아 새벽반 수영 수업을 듣는다. 수업을 받고 집에 가면 8시경. 30분 정도 출근 준비와 식사를 하고 회사로 향하는 게 일상이 됐다. 덕분에 일상생활에 활력이 더해졌다.
센터에서 수영을 시작한 건 2018년 8월. 그전까진 집 근처 성인 대상 수영장이 없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센터를 다니면서 좋은 점이 많아 두 자녀와 아내에게도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지금은 각자 다른 시간에 네 가족 모두 센터를 이용하는 중이다. “다른 회원들 중엔 새벽반 끝나고 바로 출근하는 분도 있더라고요. 주민 입장에선 이렇게 가까운 곳에 센터가 생기니 정말 고맙죠. 바쁜 일상에서 건강을 챙길 수 있으니까요.”
2018년 4월 1일 개관한 센터는 일산 신일중학교 안에 있다. 신일중 교문으로 들어서서 약 50m 직진하면 오른쪽에 ‘신일스포츠센터’라는 간판이 보인다. 건물 1층으로 들어가면 수영장 그리고 아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놀이시설 ‘플라잉 점핑교실’ 등이 있다. 2017년에 문화체육관광부, 경기도교육청, 고양시는 수영장형 다목적 체육관인 이 센터를 설립했다. 정부 부처와 교육청, 지자체가 손잡고 학교 내 부지에 건물을 짓고, 생활SOC 체육시설로 꾸린 사례다.

센터 개관 후 1년여 지난 시점. 회원 수는 800여 명에 이른다. 센터 김영우 부사장은 “인근 후곡마을의 경우 주민 수가 꽤 많은데 수영장 시설이 없어 불편해하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수영장은 군데군데 많이 생기기 어려운데 집 바로 앞에 있으니 주민들이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라고 했다. 센터는 새벽엔 직장인, 오전엔 주부와 노인, 오후엔 학생들 등 어린이부터 60대 노인까지 다양한 세대가 이용하고 있다.
4월 29일 오전 11시 주부반 수업을 들으러 센터에 방문한 지미경 씨는 “시에서 운영하는 큰 규모의 체육센터 등은 금방 마감해서 신청이 어려워요. 이른바 ‘광클릭’ 못하면 사설 수영장을 가야 하는데 성인용 수영장을 찾는 게 만만치 않던 상황에서 집 가까운 곳에 센터가 생겨 정말 좋습니다”라고 했다.

l▶신일스포츠센터는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 곽윤섭 기자

지 씨와 함께 11시 타임 주부반 수업을 듣는 설경숙 씨는 센터가 있는 일산동에서 거리가 좀 떨어진 대화동에 살지만, 일부러 이곳에 찾아온다. 그는 “생긴 지 얼마 안 돼 깨끗하고 시설 자체가 안정적이에요. 다른 시설에 비해 직원 수가 많아 밀착 수업도 해주시는 등 강사진이 정말 잘 가르쳐주셔서 계속 다니고 있어요”라고 했다. 보통 수영장이 지하에 있는 것과 달리 이 센터 수영장은 1층에 위치한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김정미 씨는 “수영장 창밖을 보면 나무 등 초록이 무성한 점도 좋아요”라고 했다.
학교와 센터가 협약을 맺어 오전 9시 30분에서 10시 50분까지 인근 초등학교 10여 곳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생존수영 수업도 진행한다. 신일중학교 학생들이 센터를 이용할 경우에는 50% 할인도 해주고 있다. 이 센터 사례는 정부의 향후 생활SOC 시설 확충 계획과도 맥이 닿는다. 정부는 이 사례처럼 앞으로 학교는 부지를 제공하고, 정부와 지자체는 건설비를 부담해 공동으로 생활 편의시설을 확충하는 정부-학교-지자체 협업사업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김청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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