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이끈 만세시위는 말 그대로 비폭력 직접행동을 상징했다. 조선독립청년단의 모습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집어삼키고 식민지로 삼았다. 당시 일본은 입헌군주정의 나라였다. 헌법과 천황이 있었고 의회도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 헌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일본 군부가 식민지 조선의 통치권을 장악했고 육군 대장이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조선총독은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모두 장악하고 군사독재를 실시했다. 이를 사람들은 무단정치라 불렀다.
3·1운동 당시 곳곳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들은 식민 권력의 민주주의 탄압을 비판했다. 일본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발표한 ‘2·8 독립선언서’는 일본의 식민 지배는 “무단 전제이자 부정하고 불평등한 정치”라고 비판하면서 한국인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고 신교(信敎)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행정·사법·경찰 등 모든 권력기관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일본 ‘정복자’가 인권에 반하는 노골적인 민족 차별을 일삼고 있다고도 비판했다. 그리고 일본의 무단 전제에 빼앗긴 자유와 정의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1 독립선언서
▶2·8 독립선언서│한겨레
교육·출판·언론·집회의 자유 요구
1919년 3월 1일에 발표된 ‘3·1 독립선언서’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독립, 자주, 인류 평등, 생존의 정당한 권리 등 민주주의적 가치로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3·1 독립선언서는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과 ‘전 인류의 공존동생권’의 가치를 내세워 민족마다의 자유 발전과 인류로서 차별 없는 대우를 강조했다.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들은 재판관이 독립운동을 일으킨 이유를 묻자 민주주의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라고 응수했다. 손병희, 오세창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조선총독부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한국인에게 압박만 가할 뿐 관리로 채용하지 않는 차별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한국인에게 교육·출판·언론·집회의 자유를 허용하고 평등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1919년 3월 11일 중국 지린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는 일본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면서 독립국으로서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했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발표한 ‘조선독립선언서’는 일본을 민주주의의 공적이라 비판했다. 나아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로 보면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자는 독립투쟁에 나선 ‘우리 편’이라고 선언했다. 달리 말하면 일본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독립운동은 자유, 정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싸우는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대한독립선언서 초안 작성자인 조소앙 선생
신채호 “동양 평화 최고 방법은 조선 독립”
이처럼 독립선언서들에 나타난 민족 독립의 정당성 논리는 ‘구한국 전제(專制)와 일본제국 전제 아래서 오래도록 사모해왔던 민주주의’에 기반해 있었다.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므로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 바로 이 주장에 동조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나섰다.
3·1운동은 평화로운 세상을 갈구했다. 세계를 향해 한국의 독립 없이는 동양 평화도 세계 평화도 없다고 외쳤다. 무엇보다 한국인에게는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를 이끌어갈 능력이 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2·8 독립선언서는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좇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이 세계의 평화와 인류 문화에 공헌하게” 될 것이라 천명했다. 3월 1일 독립시위 준비를 이끌었던 천도교 지도자 최린은 재판 과정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은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의 실현에 있다’고 주장했다.
3·1운동 당시 한국 독립은 곧 동양 평화의 실현이라는 평화 담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1919년 3월 17일에 발표한 ‘선언서’는 ‘동양의 평화는 한국의 자주독립에 있다’라고 단언했다. 1919년 3월 1일 발표된 ‘3·1 독립선언서’도 2천만 한국인을 위력으로 구속한다면 ‘동양의 영구한 평화’는 보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3·1운동을 거치면서 동양 평화론은 독립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3·1운동 무렵 상하이에 머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여운형은 만세시위가 잦아들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 한국의 독립이 곧 동양 평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을 위해 서울역에서 내릴 때 그를 향해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도 한·중·일 3국의 진실성 있는 동양 평화를 위해 거사했다고 밝혔다. 신채호는 1921년 베이징에서 발행한 잡지 <천고>의 ‘조선 독립과 동양 평화’라는 논설에서 “금일 동양의 평화를 말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조선의 독립만한 것이 없다”고 단언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 평화는 세계 개조를 위한 절대적 가치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의 독립이 곧 세계 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주장도 더욱 힘을 얻었다. 평양에 살던 15살의 김산은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그를 가르치던 교사는 학생들에게 ‘전제 권력을 타도하고 국민주권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세계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며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고 한다. 신채호는 한국 독립이 전제된 세계 평화론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조선 문제는 조선인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평화와 관련된 최대의 문제이다. 조선인들이 현재 요구하는 민족자결은 편협한 국가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길을 찾아가는 주의여야 한다.’
3·1운동을 일으킨 한국인의 평화론은 간명하게 말하면 “독립하지 못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2천만 민족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절대로 난폭한 행동 또는 파괴적 행동으로 나아가지 말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천도교에서 배포한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에 실린 당부다. 3·1운동을 준비하던 천도교 지도부가 평화적 독립시위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독립시위를 준비할 때부터 대중화, 일원화와 함께 비폭력을 원칙으로 삼았다.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꿈새김판에 조소앙 선생의 2·1 독립선언서 초고와 2·8 독립선언서 사진과 함께 ‘3·1운동을 만든 독립선언들이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담겨있다.│한겨레
비폭력 평화시위에 “세계 혁명 신기원”
3·1운동이 두 달 넘게 이어지면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 삼창을 부른 뒤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을 벌이는 만세시위도 전국으로 번져갔다. 3·1운동에서 폭력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비폭력 평화시위로서 만세시위의 등장을 높이 평가했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영 대표로 있던 황기환이 대영제국 수상회의에 보낸 ‘한국독립호소문’은 3·1운동이 비폭력 평화시위를 통해 국제 정의에 호소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해방 직후 소설가 박태원은 3·1운동의 특성은 전혀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3·1운동 당시 중국 지식인들도 비폭력 평화시위로서 만세시위를 높이 평가했다. 신문화운동의 개척자인 천두슈는 3·1운동에 대해 “민의를 사용하되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세계 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5·4운동 당시 학생 대표로 활약한 베이징대 학생인 푸스녠도 3·1운동의 첫 번째 의의로 비폭력 혁명이라는 점을 꼽으며 정의의 결정체라고 격찬했다.
3·1운동을 이끈 만세시위는 말 그대로 비폭력 직접행동을 상징했다. 3·1운동이 일어난 무렵 아시아에서는 독립운동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었다. 1919년 4월 5일 인도에서는 국민회의파가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연좌시위를 시작했다. 간디는 “비폭력 저항이 지배 집단에 항거하는 수단으로서 혁명적 잠재력이 있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다. 또한 “비폭력은 사람들을 순수한 민주주의로 인도한다”고 주장했다. 여성과 어린이조차 거뜬히 한 몫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직접행동이라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비폭력 평화시위에 크게 당황했다.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이 전혀 무기를 갖고 있지 않고, 치명적인 무기로 공격을 당하기 전에 어떤 폭력도 쓰지 않는다”며 무력 탄압을 비판하자 조선총독부는 “시위는 평화적이나 독립운동 자체는 법에 저촉된다”는 옹색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렇게 3·1운동의 만세시위에서 빛난 비폭력의 정신은 독립과 민주주의를 향한 지난 100년간 항쟁의 역사와 함께했다.
김정인_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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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