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2·8 독립선언 앞장서고 태평양 오가며 ‘독립의 이름으로’

2019.03.18 최신호 보기


l▶김마리아

한 여자아이가 남장을 하고 학교에 입학했다. 1883년 황해도 장연군에 세워진 학교에서 공부하는 이들이 부러워 기웃기웃하던 여자아이는 남장을 하고 들어갔다. 이 학교는 한국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운 교회의 부설 학교로 여성은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장을 하고라도 배워야 한다는 열의에 찬 소녀는 훗날 여성 독립운동계를 이끄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1892년 소개마을에서 부친 김윤방과 모친 김몽은의 차녀로 태어난 김마리아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여성이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그런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이라면 한국은 독립되었을 것이다’라고 한 이유는 그의 삶 곳곳에 독립을 향한 의지가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1907년 8월 1일. 고모 김필례를 돕기 위해 찾은 세브란스병원에서 김마리아는 군대 해산에 저항하며 자결한 박성화 대장을 보고 분개한 군인들과 마주했다. 일본군과 맞서 격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사상자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연동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마리아는 고모 김필례를 도와 군인 구호에 뛰어들었다.

‘그 같은 여성이 10명이라면…’
그날의 참혹했던 모습과 일제를 향한 분개는 12년이 지나 일본 도쿄 격전지로 이어졌다. 도쿄 여자유학생 친목회의 회장으로 선임된 김마리아는 <여자례> 1호와 2호를 연이어 발간했고 2·8 독립선언대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2·8 독립선언서를 고국에 전하기 위해 일본 여성으로 변장한 김마리아는 후배 차경신과 함께 귀국해 전국에 배포되는 데 기여했다. 도쿄 격전지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본격적인 3·1 만세운동 준비에 돌입한다.
김마리아는 광주를 거쳐 서울 정신여학교, 천도교 본부, 황해도 재령, 정동교회 등에서 만세운동에 부녀자들이 대거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항일 부녀단체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3월에 들어서자 만세시위는 현실화되었고 김마리아도 서울 만세시위 대열에 합류해 일제에 항거했다. 그러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감금된 순간,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 다시 만세시위를 논의할 정도로 독립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3월 14일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검사로부터 1차 심문을 받고 18일 보안법 위반죄로 2차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김마리아는 변함없는 독립 의지를 피력해 서대문형무소 5호 감방에 투옥되고 말았다. 갖은 고문과 회유, 협박이 진행되면서 고문의 강도는 높아졌다. 고문에 맞서 뜻을 굽히지 않았던 김마리아는 7월 24일 가석방되지만 코의 뼛속에 고름이 생기는 유양돌기염과 고문 후유증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김마리아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석방되자마자 항일 여성단체를 조직했다. 여성계 대표 16명이 모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발족했고 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본부와 지부 규칙하에 국내에 15~16개 지부가 설치되었고 하와이와 북간도에도 지부를 두어 군자금 모금을 본격화한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앞으로 군자금 2000원과 부인회 창립 취지문을 가명으로 송부했다. 하지만 부인회 활동이 발각되면서 김마리아 등 핵심 간부 18명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 송치된 회원 중 52명이 심문을 받았고 핵심 간부 9명은 감옥으로 송치되며 예심이 종결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김마리아는 병보석으로 출감되어 거주지 제한을 받았다.

ㅣ▶1928년 4월 5일 <신한민보>에 실린 ‘근화회’ 관련 기사

‘걱정 마라 무궁화야, 봄 다시 오리라’
1920년 6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공판이 열리는 날, 김마리아는 병세 악화로 법정에 출석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김마리아와 황에스더는 징역 3년, 그 외 여성들은 2년과 1년을 언도받았다. 김마리아의 젊은 시절은 항거와 고문, 그리고 법정 출석으로 이어진다. 국권이 상실되어 젊은 날 꿈을 펼칠 수 없었던 이들은 푸른 희망을 안고 일제에 항거하는 대열에 섰다. 그리고 국내에서 펼친 희망은 상하이, 미국을 거치면서 여성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자강론 연설로 표출됐다. 상하이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여자애국단’, 뉴욕 ‘근화회’에 이르기까지 그의 해외 여정은 독립을 위한 삶 그 자체였다.
1928년 4월 5일 뉴욕 한인 부인들이 ‘근화회’라는 단체를 조직한다는 기사가 <신한민보>에 게재되었다.

ㅣ▶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

세계외국인여선교회연맹 대표연설
단체의 회장에는 김마리아가 선임되었고 총무는 황에스더, 그 외 이선행, 윤원길, 김애희, 주영순, 김인덕, 림매리, 류둥지 등이 함께했다. 2월 12일 저녁 8시에는 뉴욕 한인교회장에서 무궁화 송이가 벽상에 휘날렸다. 현장을 울렸던 림보배 양의 축하 노래와 정덕수의 축사, 연극으로 이어진 현장은 해외 동포의 항일 의지를 재확인하는 것은 물론 변함없는 독립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선두에 김마리아는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를 대표해 서 있었다.

김마리아는 태평양을 오가며 독립운동의 저변을 확대한 여성이다. 1931년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외국인여선교회연맹 대회에서 한국 대표로 연설하며 ‘오늘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현실을 토로하며 젊은이들에게 독립의 꿈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캐나다 토론토의 장로교 여선교부, 미국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에 이르는 그의 긴 여정이 참으로 값진 이유는 그 시대 여성들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품고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정신적 고통과 압박을 마주하고 신사참배를 회피하고, 여성 차별적 현실 문제를 다루고, 독립의 의미를 되새기자고 했던 그의 주장은 독립운동의 맥을 타고 흐르고 있다.
‘독립의 이름으로’ 일생을 독립을 위한 일관된 삶의 의지를 실천한 김마리아를 통해 이 시대 여성이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이며, 여성 지도자가 어떤 길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를 묻게 된다.

ㅣ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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