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창출 공식이 달라지고 있다. 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는 고정관념이 허물어지고, 일자리가 절실한 지역에서 모든 경제주체가 함께 일자리 창출에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1월 31일 광주형 일자리 투자협상의 타결로 일기 시작한 새로운 바람이다. 실제로 광주형 일자리와 유사한 형태의 일자리 사업을 모색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부쩍 늘었다.
정부도 광주형 일자리의 전국적 확산을 뒷받침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먼저 이름부터 ‘상생형 지역 일자리’로 바꿨다. 광주를 벗어나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그 지역의 여건에 맞는 상생협력 모델을 스스로 발굴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공통 목적은 좋은 일자리 창출이다. 지역별로 다양한 경제주체가 모두 참여하는 가운데 일자리 창출을 위한 상생협약을 체결하면, 정부는 해당 지자체와 함께 종합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해 제공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투자와 고용을 촉진하고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상생형 지역 일자리에 대한 지원 체계는 순서부터 달라진다. 중앙에서 일자리 창출 모델을 설계해 하향식으로 확산하는 게 아니라 지자체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사업 계획을 마련해 상향식으로 신청하면, 민관합동 심의를 거쳐 지원 대상을 선정하는 절차를 밟는다.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일자리 사업에는 정부가 재정·세제·금융·공공 조달·규제 개선 등 모든 정책 수단을 망라한 지원 패키지를 구성해 적용한다.
상생형 일자리의 기본적인 가치는 이름 그대로 상생에서 나온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른 다양한 경제주체들이 사회적 대화를 통한 양보와 타협으로 만드는 게 상생형 일자리다. 광주형 일자리 투자협약이 타결될 수 있었던 힘도 노사 간 신뢰와 소통을 기반으로 한 상생의 정신에서 나왔다. 광주시는 현대자동차와 투자유치 협상에 나서기 전 지역 노·사·민·정 협의체를 구성해 광주형 일자리의 4대 원칙을 먼저 세웠다. 적정 임금 유지, 적정 노동시간 보장, 원·하청 관계 개선을 통한 동반성장 도모, 노사 간 상호 소통과 투명경영 확립 등이다.
광주, 투자자 모집 주간사 선정 등 속도
이런 원칙이 관철되는 광주형 일자리 사업이 속도감 있게 추진되고 있다. 광주시는 광주형 일자리가 처음으로 적용되는 자동차공장 합작법인 설립을 위해 본격적인 투자자 모집에 들어간다고 3월 5일 밝혔다. 투자자 모집 업무를 맡을 주간사로는 삼일회계법인을 선정했다. 앞서 광주시와 현대차가 합의한 투자협약에서는 합작법인의 자기자본 2800억 원 가운데 60%에 해당하는 1680억 원을 투자자 모집을 통해 마련하기로 했다. 시와 현대차는 각각 590억 원(21%), 530억 원(19%)씩 자본을 댄다. 일반투자자 모집은 국내 자동차 부품업체, 건설업체, 광주지역 기업, 기타 재무적 투자자 등을 잠정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주간사 선정 뒤 기자회견에서 “광주형 일자리의 정신을 살려나가려면 시민과 노동계도 주주로 참여해야 한다”며 “노사 상생형 투자와 경영을 통해 시민들이 참여하고, 시민들이 사랑하고, 시민들이 키우는 기업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싶은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광주시는 올해 상반기 안에 투자자 모집과 법인 설립 절차를 끝내고, 하반기 중 광주 빛그린산업단지 내에 공장 착공에 들어간다는 일정을 잡았다.
▶광주형 일자리 투자 협약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광주형 일자리 확산 위해 지원체계 가동
광주형 일자리 사업의 진행에 자극받아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상생형 일자리 모델의 구축을 선언한 지자체는 전라북도다. 전북은 오는 4월 말까지 한국지엠 군산공장을 활용한 ‘군산형 일자리 모델’을 개발하고 지역 실정에 맞는 참여기업 유치계획과 정책 인센티브 패키지안을 내놓기로 했다. 또 군산 이외 다른 곳에서도 노·사·민·정 상생협약을 통한 일자리 모델 개발을 모색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도내 민간단체 대표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태스크포스(TF)를 곧 구성하기로 했다. 모델 발굴이 가능한 분야로는 사회적 경제, 유통, 바이오, 신재생에너지, 의료, 마이스(MICE, 회의·관광·컨벤션·전시) 산업 등을 꼽고 있다.
정부도 광주형 일자리 사업의 성공적인 안착과 다른 지역으로 확산을 유도하기 위해 여러 부처가 함께 참여하는 지원체계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먼저 각 지역의 여건에 맞는 상생형 지역 일자리가 발굴될 수 있도록 상생형 지역 일자리의 기본 요건과 유형을 최근 발표했다. 상생형 지역 일자리는 지역 내 경제주체들 간 상생협약을 기본 전제로 한다. 지자체 주관으로 지역 노동계나 경제계, 시민사회의 참여가 없으면 상생형 모델이 되기 어렵다. 지역 여건과 산업 특성에 맞게 일정 수준 이상의 투자와 고용 증가가 발생해야 한다는 것도 기본 요건이다.
상생형 일자리의 유형은, 상생협약 내용에 따라 ‘임금 협력형’과 ‘투자 촉진형’으로 나뉜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월 28일 서울 광화문 KT스퀘어에서 열린 상생형 지역 일자리 포럼에서 “마음을 열고 서로 양보할 때 상생형 지역 일자리가 창출되고 성공할 수 있다”며 “지역과 업종, 프로젝트별로 사업 성사 여부의 핵심이 되는 양보와 타협의 주체와 정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광주형 일자리는 대표적인 임금 협약형 모델이다. 노동집약적인 자동차 업종의 특성이 반영돼 노사 간 상생을 통한 적정 임금과 노동조건, 생산성 유지 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투자 유치형에서는 지역 주민이나 공동 투자자의 상생협력이 필요하다. 가령 신재생에너지 산업은 주민의 수용성이, 새로운 기술이 적용되는 신산업 분야에서는 기업의 투자위험 분산이 사업 성공의 관건이다. 투자 촉진형은 개별 기업이 특정 지역 경제 활성화나 지역 주민과의 상생 차원에서 투자와 고용 확대에 나설 경우 적합한 모델이다. 정부는 임금 협약형은 대규모 제조업이, 투자 촉진형은 중소·중견기업이 주로 활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상생형 지역 일자리 포럼 개막식
3월 안 지원 시스템 가이드라인 내놔
어떤 유형이든 정부는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상생형 일자리 발굴에 나설 것으로 기대한다. 발굴 촉진을 위해 정부는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의 개정을 조속히 추진해 상생형 지역 일자리 지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동시에, 3월 안에 지원 시스템 전반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놓을 방침이다. 또 정부 관련 부처와 지자체마다 전담 지원조직을 구성해 프로젝트 발굴 단계에서부터 맞춤형 종합지원 서비스를 전개하기로 했다. 법령 개정 여부와 상관없이 상생형 일자리에 적용할 지원 방안의 뼈대는 이미 나왔다.
먼저 상생형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에는 해당 지역 지자체가 재정사업 투자보조금, 교통여건 개선을 위한 인프라 구축, 산업단지 내 취득 부동산에 대한 세제 감면 혜택 등을 제공할 수 있다. 지원 패키지는 지자체별로 사정에 맞춰 자율적으로 설계하고 중앙정부와 함께 시행한다. 중앙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지원안은 덩치가 크다. 기업에 제공하는 지방투자촉진보조금의 보조율이 3~10%p 높아지고, 보조금 한도도 현행 100억 원에서 150억 원으로 확대된다. 또 기업이 국·공유지를 임대하면 현행 평균 5%인 대부요율을 1%로 내려주고, 그것도 최장 50년 동안 장기 임대를 수의계약으로 보장한다. 투자세액공제 우대와 같은 법인세 감면 혜택도 뒤따른다.
상생형 일자리의 취업자에 대한 혜택도 만만치 않다. 직장어린이집 지원 대상으로 우선 선정되며 기숙사 신설·임차, 통근버스 운영을 위한 지원도 정책 패키지에 포함될 예정이다. 정부는 지방 산업단지 내 문화, 복지, 편의시설을 갖춘 복합문화센터 확충에서도 상생형 일자리 사업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지역 내 청년 취업자를 겨냥한 취업연계 서비스나 기술교육 프로그램도 강화할 방침이다.
▶상생형 지역 일자리 포럼에서 정부 지원 방안을 설명하는 성윤모 장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유발계수 2005년 이후 내리막
상생형 지역 일자리는 기본적으로 민간 주도의 고용 촉진 방안이다. 또 지역이 발굴하고 설계하는 상향식 일자리 사업이다. 여기에 정부가 대대적인 지원에 나서려는 까닭은, 우리 경제의 고용 창출력 약화를 더는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고용 없는 성장’이 이어졌다. 재화나 서비스의 부가가치 생산액이 10억 원 증가할 때 직·간접으로 늘어난 취업자 수를 뜻하는 고용유발계수는 2005년 10.1명에서 2014년 8.7명으로 계속해서 떨어졌다. 최근 10년 동안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상위권인데 고용 증가율은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같은 업종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간 임금과 노동조건의 격차도 갈수록 심해졌다. 개별 기업의 경쟁력 문제를 넘어 전체 산업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소다.
고용 부진의 장기화는 성장잠재력마저 약화시킨다. 잠재성장률이 4%대 중반이었던 2006년에는 실질국내총생산(GDP) 기준 성장률 1%p당 신규 노동수요가 약 13만 명이었다. 그런데 잠재성장률이 2%대 후반으로 떨어진 2018년에는 고작 3만 6000명에 그쳤다. 성장을 해도 고용 흡수력은 계속 떨어지고, 이는 다시 중장기 성장 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결국 ‘고용 없는 저성장’의 악순환에 빠질 위험에 놓였다. 이런 악순환을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성장을 촉진하면 기업이 저절로 투자와 일자리를 늘릴 것이라는 기대는 그동안 경험에 비춰보면 난망하다. 일자리 부족 문제가 심각한 지역에서부터 모든 경제주체가 좋은 일자리 만들기에 힘을 모아야 한다.
양질의 일자리 최우선 순위로
상생형 지역 일자리는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4차 산업혁명은 전통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정보통신기술(ICT)을 융합해 노동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경제구조의 변혁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융합과 복합을 매개하는 플랫폼의 활력이 핵심 경쟁 요소다. 플랫폼을 통해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참여자가 많아질수록 네트워크 효과가 커지고 부가가치도 높아질 수 있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지역의 상생합력 체계가 바로 이런 플랫폼 강화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산업구조와 고용 형태의 대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대화를 통한 상생과 협력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일하는 삶은 국가 공동체에서 국민의 의무다. 동시에 일자리 제공은 국민이 국가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 기본권이기도 하다. 헌법 제32조 1항은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 증진과 적정 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고용 위기를 탈피한 선진국들은 적정 소득이 보장되는 유익한 일자리를 모든 국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법과 제도, 관행을 오래전부터 축적해왔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대에 진입한 우리나라도 양질의 일자리를 국가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기는 했다. “일자리는 국민들에게 생명이며 삶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국민 기본권입니다.” 2017년 6월 12일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가운데 한 대목이다. 상생형 지역 일자리가 국민 기본권 실현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상생형 지역 일자리는 사람 중심, 일자리 중심으로 경제 패러다임이 전환할 수 있는 핵심 동력이기도 하다.
박순빈 기자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