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조립해 취미로 창작으로 꿈으로

2019.03.11 최신호 보기


;▶레고 조립은 창작이자, 즐거움이다. 레고 조립 동호회 ‘브릭팜’의 유병탁 회장(가운데)과 박상수(왼쪽) 이동희 회원이 조립품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가난했다. 부모님은 아들에게 변변한 장난감 하나 사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 부모님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웃집 친한 형이 이사하면서 검은 비닐봉지를 하나 주고 갔다. “재미있게 놀아” 한마디를 남기고. 봉지를 쏟았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원색의 조그만 블록들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조립하고 해체하고, 또 조립하고 해체하고…. 꼼꼼히 합체하고 쉽게 분해할 수 있었다. 한 번 조립하면 끝나는 다른 플라스틱 장난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세월이 흘렀다. 어릴 때 자신의 동심을 사로잡은 검은 비닐봉지 속 조그만 조립품이 ‘레고’라는 이름의 장난감이라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장난감은 쉽게 살 수 있을 만큼 저렴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다.

;▶레고로 조립한 스포츠카

;▶유병탁 회장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레고 부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밤새 조립해 완성한 뒤 여명에 희열
어른이 됐다. 취직하고 일상에 바빴다. 어느 날 우연히 동네 마트의 장난감 코너에 갔다. 한 어린아이가 레고 장난감을 사달라고 부모님을 조르며 울고 있었다. 순간 어릴 때 자신을 사로잡은 장난감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저하지 않고 그 장난감을 집어 들었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자신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제발 그 부모가 아이에게 그 장난감을 사주길 바라면서 자리를 떴다. 직접 산 것은 처음이다.
집으로 와서 상자를 뜯고 부품을 쏟았다. 어릴 때 검은 봉지에서 쏟아져 나온 그 플라스틱 블록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립을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밤을 새우며 블록과 씨름한 뒤 여명을 배경으로 완성된 조립장난감을 창가에 세우고 바라보는 성취감은 차라리 보배로웠다.

이동희(37) 씨는 그렇게 ‘키덜트’가 됐다. 키덜트는 어린이를 뜻하는 ‘키드(Kid)’와 어른인 ‘어덜트(Adult)’의 합성어다. 아이 같은 감성과 취향을 가진 어른들이다. 각박해지는 현실 속에서 어린 시절의 향수를 좇기 위해 장난감을 조립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정서적 안정을 찾는다. 굶어서 육체는 배고프더라도, 정신적 허기를 달래고자 주머니를 ‘팍팍’ 연다.
이 씨는 회사에 근무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레고 조립을 하며 날려 보냈다. 방에 조립품이 쌓이기 시작했다. 회사에 동호회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20명이었으나 몇 년 뒤 70명으로 불어났다. 여행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취미는 계속됐다. 낯선 도시에 가면 꼭 레고 관련 시설을 검색한다. 평소 사고 싶었던 제품도 사고, 새로 출시된 제품도 관찰한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동생이 먼저 결혼하면서 방을 비웠고, 그 방은 레고 조립품으로 가득 찼다.
“작은 도시를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제가 상상하는 도시를 창조하는 것이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이 씨는 그동안 산 레고 장난감이 1000만 원어치 정도라며 수줍어했다.

;▶레고로 대형 창작품을 조립하려면 수많은 블록 부품이 필요하다. 각종 모양의 부품이 잘 정돈돼 있다.

;▶타지마할

;▶다스몰(스타워즈 캐릭터)

<스타워즈> 주인공 등장 장면 재현
취미 관련 장식장을 주문받아 제작·판매하는 박상수(43) 씨는 자신이 만든 레고 창작품이 유명 호텔 로비에 전시돼 있을 만큼 내공이 깊다. 얼마나 깊을까? 그동안 구입한 레고 조립품만 1억 원어치가 넘는다. 키덜트 고수인 셈이다.
10년 전이다. 박 씨가 처음 레고를 접한 때는. 당시 네 살배기 딸에게 장난감을 사주려고 백화점에 갔다. 레고 장난감이 눈에 띄었다. 조립하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자녀의 두뇌개발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1만 8000원짜리 간단한 조립품을 샀다. 어른용도 진열돼 있었다. 손길이 갔다. 문득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랐다. 레고를 본뜬 크기가 조금 큰 국산 조립 블록이었다. 그날 박 씨가 처음 자신을 위해 산 레고 조립품은 8만 원짜리 ‘스타워즈 엑스 윙’이다.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했던 미래형 전투기 모형이다. 영화에서만 보던 비행기를 자신의 손으로 조립해 완성하는 즐거움에 밤을 꼬박 새웠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매일 3~4시간씩 조립에 몰두했다. 어느덧 레고 조립품 작가가 됐다. 관련 전시회에 ‘아름다운 바닷속’이라는 창작품을 출품했다. 작품 완성에 1만 5000개의 부품이 들어갔다. 두 달 동안 친구와 둘이서 매일 2~3시간을 투자했다. 5만 개의 부품이 들어간 ‘황제의 시찰’은 유명 관광지 호텔 로비에 전시돼 있다. 역시 영화 <스타워즈>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가로 4m, 세로 3m 규모의 대형 조립품이다. 어느덧 조립품을 임대해 수입을 올리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만든 조립품만 1만 개를 웃돈다. 이제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돈벌이도 되고 있다. 자신이 만든 조립장에 자신이 완성한 조립품을 전시한다.

;▶유럽풍 창작 건물

;▶스타워즈 미니 피겨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 국무위원장 창작품

부품 5만 개 조립, 길이만 7m 대작
유병탁(47) 씨는 더욱 적극적인 ‘키덜트’다. 레고 조립을 전문으로 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일산에 한 달 100만 원 정도의 임대료를 내며 ‘어른 놀이터’인 ‘브릭팜’을 장만했다. 온라인에 가입한 동호인만 700명이 넘는다.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 저녁이면 동호인들이 이 사무실에 온다. 널찍한 공간에서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조립하고 분해하길 반복한다. 회사원인 유 씨가 이런 공간을 마련한 이유가 있다. “혼자 하면 취미지만, 함께 하면 문화가 됩니다.”
유 씨도 12년 전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다가 본인이 빠져들었다. “당시 4만 원짜리 집 모형 조립품이었어요. 그날 밤을 새우며 조립했지요. 엄청난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집을 짓다니….”
 
시간이 흐르고 소문이 났다. 서울시에서 조립품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옛 서울역사에 문화공간이 들어서면서 레고 창작품 전시 의뢰를 받은 것이다. 동호회 회원들과 논의를 거듭했다. 5만 개의 부품이 들어가는 대작이다. 한쪽 길이만 7m. 옛 서울역과 경복궁, 광화문광장이 들어섰다. 도시 전체를 둘러 기차 레일을 깔고 창작 기차도 운영했다.
이번에는 한양도성 박물관에서 숭례문을 레고로 제작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우선 숭례문의 설계도를 제공받아 설계를 했다. 부드러운 곡선의 지붕을 재현하기가 어려웠다. 기존 레고 블록은 직사각형이기 때문이다. 동호회원들과 작업하는 데만 석 달이 걸렸다. 개화기 전차도 만들었고, 갓 쓰고 한복 입은 인물도 등장한다. 개화기 복식을 재현하기 위해 아크릴을 레이저로 깎아서 만들고 도색도 했다. 경이로운 작품이 탄생했다. 이 작품 때문에 유 씨는 단순한 레고 애호가에서 기획과 창작가로 자리 잡았다.

이번에는 한양도성 박물관에 전시될 동대문을 주문받았다. 당시까지 레고 작품에 대해 부정적이던 박물관에서 역사적인 장면을 재현하는 데 레고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대문(흥인지문)을 통해 고종 임금이 동구릉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재현해달라고 했다. 1대 35의 크기 비율로 동대문과 등장하는 인물을 제작했다. 주변 건물들까지 재현했고 낙산을 등고선대로 표현했다. 관람객들에게도 레고 작품은 최고 인기 전시물이 됐다. 특히 아이들이 열광했다.

;▶월리엄스(F1경기용차 모델)

;▶레고 제품과 창작품이 전시된 장식장 내부

인간 세상 그대로 축소된 도시 소망
유 씨가 사비를 들여 놀이 공간을 만든 이유는 ‘어른들도 마음껏 놀아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규모 있는 조립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유 씨의 꿈은 큰 규모의 도시를 조립하는 것이다. 대부분 레고 키덜트들의 공통된 소망이다. 거리 표시판, 도로, 경찰관, 소방관 등 인간 세상이 그대로 축소된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미 유 씨가 확보한 블록은 10만 개가 넘는다. 소형 도시 3~4개는 만들 수 있다. 브릭팜 2층의 유 씨 작업실에는 한약방의 약초 보관함 같은 수많은 보관함에 각종 레고 부품이 보관돼 있다.
레고는 한때 재테크의 수단이기도 했다. 수요에 비해 적은 공급 탓에 신제품이 나오면 구하기 힘들었다. 당연히 가격은 올라간다. 그래서 ‘레테크’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전 세계 전 연령대에서 장난감으로 존재하는 레고는 1940년대 덴마크에서 처음 만든 플라스틱 조립 장난감이다. 이제는 동력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가로 31.8mm, 세로 15.8mm, 높이 9.6mm, 두 줄로 나란히 8개의 구멍이 난 플라스틱 블록이 요술을 부린다.

“머리가 텅 빈 듯해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복잡한 상념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자신만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기쁨도 크고요. 대부분의 동호인들이 어릴 때 비싸서 갖고 놀지 못한 장난감이기에 더욱 빠져드는 것 같아요.”
유 씨가 레고 조립공간 ‘브릭팜’을 만든 이유 중 하나는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놀자는 뜻도 있다. 혼자 하면 오래 하기도 힘들다. 지난 2월 27일 저녁 유 씨와 브릭팜 회원인 박 씨, 이 씨는 브릭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손은 정밀하게 움직이고 머리는 복잡했지만 표정은 밝기만 했다. 계속 깔깔대고 웃는다. 노는데, 진정 하고 싶은 놀이를 하는데 심각할 리가 없다. 어른들이 참 재미있게 논다.

글·사진 이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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