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네. 날씨가 따뜻해진 게 느껴져서 오늘은 남방만 입고 집을 나섰어. ‘봄이다’란 생각에 얇게 입고 나왔는데 아직은 좀 춥더라. 섣부른 옷차림이었지만 뭐 어때. 괜찮다고 생각했어. 잠깐 춥고 말 테니까. 어제 학교에 갔는데 목련 꽃봉오리가 올랐더라. 매년 새살처럼 돋아나는 꽃들을 보고 있자면 네 생각이 나. 아, 널 떠올리는 게 내 의지는 결코 아니니 오해하진 마.
우리 처음 만났던 봄 학기 수업 기억하니. 도시 개발을 반대하는 환경주의 내용이 주였잖아. 오랜 휴학을 끝낸 뒤 마주한 학교가 어색한 나는 수업 내용도 영 생소했어. 그러던 중 우리 조는 공동체를 연구한다고 문래동 옥상으로 도시 텃밭을 보러 갔었지. 흙 내음이 물씬하고 싱싱한 풀이 많을 줄 알았는데 화분 몇 개만 덩그러니 있어서 당황했어. ‘에이, 뭐야’ 하며 김빠져 있는데 그것들에게서 너는 눈을 떼지 못하더라. 그런 네가 신기했는데 중학교 특별활동 때 야생 꽃을 보러 간 게 인상 깊었다는 네 얘길 나중에 들으면서 너를 조금 알 수 있었다.
고작 그 몇 개 화분을 배경으로 같이 사진 찍었던 것 때문일까. 이후 수업에서 우린 자연스럽게 서로의 자리를 맡아주곤 했잖아. 지각하면 왜 안 오시냐고 문자도 주고받았지. ‘화석’ 학번이 된 후에 만난 사이라 그런지 우린 동갑인데도 존댓말을 썼어. 어색해도 그런 예의 있는 말투가 어쩐지 편하다고 생각했나 봐. 그런데 친구 사이의 그 존댓말이 우리를 영화 <비포 선라이즈>로 만들지 누가 알았겠니.
밖에서 기 세단 말을 듣는 내가 너와 대화할 땐 솔직하고 부드러워졌어. 어느 자리에선 말만 번지르르해 피하는 사회적인 얘기를 너와는 맘껏 할 수 있어서 좋았지. 사회학도랍시고 네가 구조가 개인을 억압한다느니 뭐니 어깨에 잔뜩 힘 들어가는 얘기를 해도 마냥 재밌었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나는 핫초코를 좋아하는 네게서 다른 것 같은데 공통점이 있는 듯해 묘하게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나는 개인적이지만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고, 투박하지만 감상적인 것을 좋아하며, 외향적이지만 낯을 가리는 사람이란 것도 알게 됐지.
단둘이 청계천 밤 조명 아래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었던 게 생각나네. 아무 말 없이 눈동자만 쳐다봤잖아. 어느새 숨소리만 들려서 마음이 얼마나 콩닥콩닥했는지 넌 모를 거야. 풋풋하고 순수하게 남은 그 기억이 가끔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지금 우리는 둘 다 사회인이 돼 기계처럼 돈 벌기에 급급하고 경주마처럼 자기 앞길만 달리고 있지만, 올해도 역시 봄이 와 네가 떠오르면 ‘살아 있구나’ 하고 느껴. 그렇게 진부해진 너에게 오늘도 건강하라고, 좋아했다고 말하고 싶다.
김하늬 서울 강서구 양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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