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지도자 안창호 아내 넘어 미국 한인여성회 만들고 군자금

2019.04.01 최신호 보기


l▶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내 이혜련 여사

변화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신호탄이다. 1882년 5월 22일 푸른 눈의 이방인에 의해 한미 우호 및 무역 협약(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다음 해, 민영익이 이끄는 외교 사절단은 미국을 방문한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902년 12월 22일. 첫 한인 이민자 단체가 인천 제물포항에서 게일릭(Gaelic)호를 타고 떠나며 한인 이민사의 막이 올랐다. 그런데 이들보다 먼저 미국에 발을 들였던 여성이 있다. 그녀는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혼인을 한 뒤, 바로 다음 날 미국으로 향한 이혜련이다.
민족 지도자로 알려진 도산 안창호의 아내 이혜련은 독립운동가 아내가 아닌 독립운동가의 삶 그 자체였다. 남편이 미주를 떠나 독립운동 일선에 뛰어들면, 그녀는 가장이 되었다. 집안 살림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다. 미국인 집에서 청소와 빨래, 요리부터 농장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하며 집안을 꾸려내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이 고국에 마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바라본 머나먼 고국은 애틋함을 넘어 미안함이 가득했다고 전한 이혜련. 그녀는 “내 몸을 사랑하는 고국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며 떠났다.

l▶안창호 선생과 이혜련 여사 가족사진

부친과 남편 안창호는 사제지간
이혜련은 평남 강서군 출생으로, 서당 훈장을 했던 이석관의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과 안창호는 사제지간이었다. 반듯한 성격에 생각이 깊은 이혜련과의 혼인을 적극 추천한 이는 안창호의 조부였다. 평안도에서 성장해 경성 정신여학교에서 수학하며 신여성 대열에 섰던 이혜련이 결혼과 이민의 길을 선택한 것은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18세이던 1902년 9월 3일 제중원에서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배에 올랐으니 말이다. 타국의 땅을 향한다는 기대감도 잠시, 소녀의 꿈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기혼 여성, 전시나 다름없는 타국의 삶, 한인 사회 재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편 안창호를 바라보며, 독립운동의 대열에 뛰어드는 것은 선택이 아닌 현실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혜련을 도산 안창호의 아내로만 알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미국 방문 시 접한 이혜련의 활동과 기록들을 통해 그녀가 한인 여성 사회의 중심에서 독립운동의 불씨가 일어나도록 격려하고 뒷받침한 역할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편이 미국과 중국, 러시아, 한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흥사단을 조직해 활동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미주 지역 부인들을 모아 한인 사회에 여성 단체가 조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밤새워 재봉틀로 흥사단의 깃발을 만들었고, 독립운동 자금에 보태기 위해 농장에서 일을 했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독립 정신을 심어주었다.

미국에서 한인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하게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1903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한인친목회가 1905년 4월 5일 한인공립협회로 개편, 발전하는 과정에서 ‘리버사이드’ 지역은 미국 대륙 최초의 한인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다. 그곳에서 이혜련은 필립과 필선을 키웠고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앞장서면 부인들이 보조하기를 몇 년, 한인 노동자들은 점차 중가주 일대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07년 기준으로 한인 이민자는 1만 1200명, 미국에는 27만 1829명이 거주했으니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인 이민사가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10년 국권 침탈과 1919년 3·1만세운동의 여파는 미국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중일전쟁 때 중국 구제금 보내기도
3·1만세운동 소식에 미주 한인들은 미국 내에서 군자금을 모아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미국민과 미국 정부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했다. 당시 이혜련은 부인친애회를 조직해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했다. 일주일에 이틀(화·금요일)은 고기 없는 날, 하루(수요일)는 간장 없는 날로 정해 고통받는 동포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소리 냈다. 1919년 5월 18일 북미주 지역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와 다뉴바 신한부인회에 북미 지역 부인회를 통합하기 위한 통고문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8월 2일 각지의 부인 대표자들이 다뉴바에 모여 발기 대회를 열고 합동 결의했다. 이때 다뉴바의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의 한국부인회, 윌로스의 지방부인회 등의 대표들이 참석해 ‘대한여자애국단’이 결성된다.

대한여자애국단은 “대한 여자를 단결하고 문명 준칙과 도덕 원리에 기인해 개인으로부터 가정에, 가정으로부터 사회로의 개량에 힘쓰며 대한 독립의 기초적 역량을 준비함”에 목적을 두었다. 대한여자애국단 결성에 이혜련은 로스앤젤레스 한국부인회 대표로 임메불, 박순애, 강혜원 등과 함께 참석했다.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을 중심으로 국민의무금, 국민회 보조금, 특별의연금 등의 모금을 주도했고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 지부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그 역할은 1933년 5월 9일 대한여자애국단 총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하면서 더 가중되었다. 1937년 3월 대한인국민회 회관이 로스앤젤레스에 건립될 때도 대한여자애국단은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그리고 독립을 향한 열망은 이웃 나라인 중국의 상황도 외면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곧 한국 독립에 미칠 영향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일전쟁 재난민과 부상병을 돕기 위해 약품과 붕대를 모집했고, 중국 난민 구제를 위해 구제금으로 78달러를 모아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에게 보냈다.

l▶이혜련 여사가 사용하던 재봉틀

자녀도 진주만 기습 뒤 항일전 참여
“나는 그날,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어요. 새벽에 울리는 전화 소리에 어머니는 직감하셨던 것 같아요. 전화를 내려놓고 울음 짓던 어머니는 이제 너희 아버지를 볼 수가 없겠구나….”
우리가 독립운동이라 부르는 역사의 한 자락은 그 시대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에게는 ‘독립전쟁’이었다. 늘 노심초사하며 조국의 독립을 그리워했던 한인들. 그들이 존경하는 안창호의 부음은 민족의 슬픔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확고한 독립 정신이 스며 있는 후손 안필영을 만나면서 이혜련의 고뇌를 가늠해보았다. 1938년 3월 10일 안창호의 순국 소식에 국내외는 슬픔에 빠졌지만,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버지로서도 생을 마감했다. 그 자녀들은 일제의 진주만 기습공격 뒤 항일전에 당당히 참여했고, 이혜련은 1946년 1월 6일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선출되었다.

평생을 독립운동과 한인 사회 재건에 헌신한 그녀의 부음은 1969년 4월 21에 들려왔다. 86세로 생을 마감한 이혜련, 그녀는 마지막까지 고국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 염원은 1973년 11월 7일 오후 8시 30분, KAL기 편으로 유해로 환국했다. 생전에 그가 남긴 고국을 향한 유언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 이혜련. 힘들고 지친 타국 생활 속에서도 남편 안창호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을 다스렸던 그녀의 마음은 늘 고국을 향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녀의 바람이 실현된 날을 통해 우리는 그녀뿐 아니라 수많은 한인들 마음이, 그들의 희생이 고국을 향하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l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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