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2016년의 촛불집회는 지도부 없이 민중과 시민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닮은꼴로 평가받는다. | 한겨레
3·1운동과 2016년 촛불혁명 닮은꼴
을사늑약 전 독립군의 형성을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tvN)에서 일본군 대좌 모리 다카시는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한다. “임진년에 의병이었던 자들의 자식들은 을미년에 의병이 된다. 을미년에 의병이었던 자들의 자식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일본군 대좌의 말대로라면 ‘반역’의 피는 유전된다는 것인데, 3·1운동의 자손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3·1운동은 당시 1700만의 인구 중 10분의 1이 참여한 세계에서 유례없는 전국적·대규모 시위였다. 조선총독부 ‘조선 소요사건 일람표’도 3월 1일부터 4월 말까지 58만 7641명(50명 이하 참여자는 제외)이 참여했다고 기록했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1542회 시위에 참여 인원 200만 명으로 추정한다. 한국의 어떤 ‘피’도 피해갈 수 없는 규모다.
2016년의 촛불집회는 국민의 32.8%가 “참여한 적이 있다”고 대답할 정도로 광범위했다(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연 인구수로는 1687만 명에 달한다. 3·1운동과 촛불집회는 전개 양태에서 주의·주장에 이르기까지 세기를 가로질러 빼닮은 평행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도부 없이 민중과 시민이 주도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33인의 민족대표는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될 것을 계획했다. ‘불상사를 일으킬지도 알 수 없는 만일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게 이유였다. 33인 중 태화관(당시 명월관·인사동 222번지)에 모인 29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도 않고, 간단한 식사를 한 뒤 정무총감부에 전화했다고 한다. 몇몇 학생이 태화관에 와서 “파고다 공원으로 가 독립선언서를 읽어달라” “군중을 지도해달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굳이 태화관을 선택한 의미를 말한다면, 이완용이 합방조약 준비를 밀모하던 민족 분노의 소굴에서 통쾌하게 복수한다는 상징성에 있다.
당시 예정된 시각, 지도부를 찾을 수 없어 우왕좌왕하던 군중 앞에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나타나 독립선언서를 읽은 청년이 있었다. 이 도포 자루 사나이는 정재용으로, 훗날(1968년) 최은희 기자가 “계획했던 것이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수천을 헤아리는 군중이 구름 떼처럼 몰려 들어오면서 탑을 향해 또는 팔각정을 향해 모두들 두리번두리번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습니다. (…) 팔각정으로 다시 성큼 올라가 호주머니에서 선언서를 꺼내 펼쳐 들고 낭독하였던 것입니다.”
5월 9일 유관순이 1심에서 받은 형량은 5년이었다. 미성년자인 여성에게 어처구니없이 높은 형량이었다(항소심 3년, 이후 1년 6개월로 감형). 이보다 많은 형량을 받은 시위 참여자도 많았다. 반면 민족대표 33인의 형량은 3년이었다. 일제도 ‘시위를 계획’한 민족대표보다 ‘참여’한 민중의 활약이 위협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016년 촛불집회에는 아예 지도부가 없었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광화문에 모였고, 많은 사람이 모이자 집회 질서 유지를 위해 각계 시민단체가 연석회의를 구성했다.
비폭력 평화시위로 더불어 함께
“1.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니, 오즉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 3.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독립운동 선언서의 공약삼장 1장과 3장은 ‘비폭력·평화’ 주의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인도의 종교 지도자 간디의 비폭력·무저항을 종교 지도자가 많았던 33인의 대표 또한 주요한 원칙으로 가져왔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이 비폭력주의가 3·1운동에 다양한 이들이 참여하게 되는 계기였다고 분석한다. 규모 면에서 압도적이었기에 일제를 압박할 수 있었고, 긴 시간 시위가 이어졌기에 일제의 전략적 양보를 받아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비폭력주의는 커다란 성과를 냈다.
세계 언론은 촛불집회의 ‘평화적 시위’를 격찬했다. 유모차 부대, 초등학생 등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평화적인 분위기여서다. ‘평화’가 부른 풍경은 그것만이 아니다. 수원의 3·1운동 시위 사진에서 ‘사상 기생’들이 즐겁게 춤을 추면서 시위대를 이끄는 것을 볼 수 있다. 탄핵 촛불집회에서도 매회 콘서트를 열고 광장에서 버스킹과 비보이들이 합류하는 등 문화예술의 한마당이 펼쳐졌다.
임시정부-정권교체로 민주주의의 실천
독립선언서의 공약 2장은 다음과 같다. “2.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고종황제의 인산(3월 3일)을 거사일로 잡기는 했지만, 독립선언서는 ‘왕권의 부활’을 시도하지 않았다. 3·1운동 시위에서도 복벽주의자가 있긴 했으나 대부분이 ‘자신이 세울 나라’로 공화정을 인지하고 있었다. 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은 ‘조선이 독립국’임과 함께 ‘조선인이 자유민’임을 선언한다. 이는 공화정 체제를 기본으로 4월 7일 상하이에 설립된 임시정부로 이어진다.
2016년의 촛불 광장에서는 시국을 토론하는 현대판 ‘만민공동회’가 벌어졌다. 누구나 신청하면 발언권을 얻어 얘기할 수 있었다. 만민공동회의 기원은 1898년 독립협회가 개최한 대중집회로 ‘토론 민주주의’를 이어받은 것이다.
2016년의 촛불운동을 몇몇 역사학자는 ‘항쟁’이나 ‘혁명’으로 부른다. 탄핵을 이뤄냈고 정권교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2016년의 촛불집회는 3·1운동 이후 100년간 4월(4·19), 5월(5·18), 6월(6·10)의 굵직한 역사가 하나로 모아진 것”이라고 말한다. “3·1운동이 당시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였지만, 100년 뒤인 지금 보면 성공한 운동이다. 종전 뒤 7년 만에 벌어진 전국적 단위의 시위인 4·19혁명이 있었고, 1980년 5·18 광주가 수많은 희생자를 불렀으며, 1987년의 6월 항쟁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것은 2016년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3·1운동’ 또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 등은 ‘3·1혁명’이라 명명한다. 일제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임시정부를 낳았고 대한민국의 맹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둘래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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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