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연구원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실험을하 고 있다.│한겨레
고등학생이 배우는 과학에는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네 과목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과목을 제일 좋아하셨습니까?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보통 생물을 제일 편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지구과학을 가장 선호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훌륭한 지구과학 선생님이 많아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물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 고등학교 생물은 분류학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류는 1심방 1심실에 암모니아로 배설, 포유류는 2심방 2심실에 요소로 배설’ 같은 것을 외우고 멘델의 유전법칙만 알면 문제를 풀 수 있었죠. 그런데 요즘 생물학은 그렇지가 않아요. DNA가 RNA로 전사되고 다시 RNA가 단백질로 번역되는 복잡한 메커니즘과 각종 효소의 작용을 알아야 하지요. 체세포 복제와 배아 복제도 중요한 항목입니다.
그러잖아도 복잡하고 어려워진 생물에 또 하나의 중요한 아이템이 추가되었습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유전자 가위라니…, 도대체 무엇일까요?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단백질 효소가 합니다. 따라서 유전자 가위도 세포 안에서 뭔가를 하는 물질이라면 당연히 단백질 효소일 것입니다. 효소 작용은 복잡하고 설명하기도 어려워요. 그런데 ‘유전자 가위’라고 하니까 뭔가 감이 오지 않습니까? 정말 잘 지은 이름이죠. 이렇게 직관적인 이름을 붙인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원하는 유전자 부위를 정확하게 자르는 단백질 효소라는 겁니다. 오류 확률이 제로(0)라고 보시면 됩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위험과 윤리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은 2013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었죠. 아직 노벨상도 받지 않았습니다.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위력을 금방 간파했습니다. 발표된 이듬해인 2014년에 이미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맞춤 아기가 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벌써 칠리고추 맛이 나는 토마토라든지 불면증을 앓는 원숭이를 만들었습니다. 미국과 우리나라에서도 출산이 아닌 단순 연구 목적으로 인간 배아 유전자를 편집하는 데 성공하지요.
맞춤 아기는 어려운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동물보다 더 복잡한 생명체가 아니거든요. 체세포 복제로 양을 탄생시켰다면 사람으로도 체세포 복제 아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사용해서 다른 형질의 생물을 만들었다면 사람에게도 가능하죠. 하지만 전 세계 과학자들이 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과학자들은 약속을 했습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인간 배아에 적용할 때는 미리 공개하고 허가를 받기로 말입니다. 과학자 사회의 자율규제 시스템을 작동시킨 것입니다. 각 연구기관에는 기관윤리위원회(IRB)가 있어서 치밀한 심사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출산과 관련된 유전자 조작 연구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고 있어요. 종교와 윤리적인 논란이 있기 때문이죠.
과학자들은 시스템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곳도 있지요. 2018년 말 중국의 생물학자 허젠쿠이는 학회에서 기습적인 발표를 했습니다.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부부 여덟 쌍을 대상으로 유전자 편집 아기 실험을 해서 한 부부는 쌍둥이 여아를 낳았고 다른 부부 한 쌍은 임신 초기 상태라는 것이었죠.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에이즈는 HIV 바이러스가 면역세포를 파괴해서 생기는 질병입니다. HIV 바이러스가 면역세포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면역세포 표면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는 통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허젠쿠이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사용해서 면역세포 표면에 HIV 바이러스 통로를 만드는 유전자를 잘라냈습니다.
그러면 허젠쿠이는 칭송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반대였습니다. 허젠쿠이는 대학에서 해고되었고 체포되었습니다. 과학자로서 윤리를 지키지 않았고 법을 어겼기 때문이죠. 그는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부모들에게 유전자 편집 기술을 쓰지 않아도 에이즈를 예방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 잘라낸 유전자가 HIV 바이러스 통로로만 작용하는지 아니면 다른 단백질의 설계도로도 쓰이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단적인 실험을 해서 아이를 출산하기까지 했으니 정말 위험한 행위죠.
▶한겨레
완벽한 아기 낳을 수 있다는 욕망
왜 허젠쿠이 같은 과학자가 등장했을까요? 우리의 가슴속에 숨겨져 있는 욕망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서 유전자를 편집하면 정우성의 외모에 손홍민의 축구 실력 그리고 유재석의 예능감을 지닌 완벽한 아기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기거든요. 그런데 현대 생물학은 그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현대 생물학의 중요한 분야인 후성유전학은 유전자만큼이나 양육 환경이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합니다. 유전자가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도 성장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눈동자 색깔처럼 전적으로 유전자로 결정되는 것을 제외하고 성격, 지능, 몸무게, 키, 정치적 성향과 윤리 의식은 전혀 달라집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은 인간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유전자 편집 기술에 안정성이 확보되고 합법화되어서 시민들의 공감대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유전자 편집 기술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어야 하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제 손주에게 유전자 가위를 적용하게 된다면 큰 고민을 할 것입니다. 치명적인 질병이 아니라면 인생이라는 모험에서 얻을 수 있는 재미를 제 손주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거든요.
과학은 사랑입니다. 우주에 대한 관심과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발전하죠. 하지만 관계가 익숙해지면 첫사랑의 마음을 잊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명과학자들이 과학에 대한 처음 마음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시민들이 과학에 관심을 갖는 것이죠. 특히 생명과학에 대한 관심과 지식수준이 조금 높아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포유류의 2심방 2심실만큼이나 익숙한 단어가 되어야 우리가 안전합니다. 두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전방욱의 《DNA 혁명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와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입니다.
이정모_ 현재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생화학을 전공하고 대학교수를 거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지냈다. <250만 분의 1>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내 방에서 콩나물 농사짓기> 등 읽기 편하고 재미있는 과학 도서와 에세이 등 6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인기 강연자이자 칼럼니스트로도 맹활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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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