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민·정 사회적 협약 초유의 상생실험 ‘빛’

2019.02.18 최신호 보기


j▶(왼쪽부터) 윤종해 한국노총 광주지부장, 이용섭 광주광역시장, 문재인 대통령, 이원희 현대자동차 대표이사가 광주형일자리 완성차공장 투자협약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청와대

광주광역시-현대차 새해 벽두 완성차공장 합작투자 협약

5년 전 지방선거 공약으로 첫걸음
2017년 사회적 대화기구 뼈대 합의

기업 안정적 노동력·투자 제공받고
노동자 양질의 일자리와 경영 참여
지방정부 주주로 공익적 가치 구현

2021년 하반기 본격 가동 목표
정규직 등 1만여 명 일자리 창출

정부 제2, 제3 광주형 일자리 추진
구미, 대구, 군산, 청주 새 후보지로

1980년 5월 빛고을 광주는 민주주의의 촛불을 들었다. 2019년 1월 광주는 상생형 지역 일자리의 불씨를 지폈다. 1월 31일 광주광역시와 현대자동차가 체결한,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첫 사업인 완성차공장 합작투자 협약이 바로 그 불씨다. 공식적인 협약 당사자는 광주시와 현대차이지만, 사실상 광주 지역의 여러 주체가 오랜 논의와 지루한 협상 끝에 협약 내용을 완성했다. 2014년 6월 지방선거에서 윤장현 당시 광주시장 후보가 ‘사회통합을 통한 광주형 좋은 일자리 1만 개 창출’을 공약하면서 관련 논의가 시작됐다. 이후 광주 지역의 노·사·민·정이 모두 참여해 새로운 일자리 모델의 청사진을 마련한 것이다.

“혁신적 포용국가로 가는 전환점”
투자 협약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광주형 일자리는 혁신적 포용국가로 가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정부는 어느 지역이든 지역 노·사·민·정의 합의로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받아들인다면 성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에 대한 대통령의 기대와 의지는 자못 크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부터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고, 이에 따라 정부는 2017년 7월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광주의 완성차공장 합작법인 설립을 통해 만들어질 일자리가 어떻게 단순한 특정 지역 내 특정 산업 활성화 방안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한국 경제가 직면한 성장 둔화, 고용 부진, 양극화 심화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이용섭 광주시장은 희망 섞인 답변을 내놓았다. 이 시장은 협약식에서 “광주시와 현대차 간에 체결한 투자 협약은 광주 청년들의 일자리 창출은 물론 한국 경제의 체질과 경쟁력을 강화하는 역사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며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다른 분야, 다른 지역으로 확산시켜 문재인 정부 일자리 정책의 성공을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형 일자리를 다른 분야, 다른 지역으로 확산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이 사업 추진의 배경과 원칙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주시 노·사·민·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기구인 ‘더 나은 일자리위원회’는 2017년 6월 이른바 4대 의제에 합의했다. 적정 임금, 적정 노동시간, 원·하청 관계 개혁, 노사 책임경영이 합의된 의제다. 이를 전제로 한 일자리 중심의 사회적 연대를 통해 기업은 유연하고 안정적인 노동력과 다양한 투자 인센티브를 제공받고, 노동자는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가 생기는 동시에 책임경영의 주체로 참여한다. 지방정부는 지역의 고용난을 해결하면서 시민사회와 함께 해당 기업의 주주로서 건전한 산업생태계와 공익적 가치를 구현하도록 주주권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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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1%, 현대차 19%, 나머진 지역 주주
이렇게 지역 내 노·사·민·정 모두에게 책임과 혜택을 고루 나누도록 하는 구조는 광주시와 현대차가 맺은 투자 협약을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협약의 뼈대는, 광주시와 현대차가 합작법인을 설립해 빛그린산업단지 내 62만 8000㎡ 부지에 2021년 하반기 본격 가동을 목표로 연간 생산능력 10만 대 규모의 완성차 조립공장을 짓는다는 것이다. 합작법인에 들어갈 자기자본 2800억 원은 광주시가 590억 원(21%), 현대차 534억 원(19%)씩 분담하고 나머지 60%의 지분에 해당하는 1680억 원은 지역 내 자동차 관련 기업과 시민사회, 노동계 등을 대상으로 주주를 모집해 조달할 계획이다. 초기 투자비 7000억 원 가운데 자기자본금을 제외한 4200억 원은 산업은행 등 금융권에서 장기 재무적 투자를 유치한다는 복안을 세웠다. 현대차는 배기량 1000cc 미만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개발해 합작법인에 생산을 위탁하며, 공장 건설·운영·생산·품질관리 등을 위한 기술 지원과 판매를 맡게 된다. 광주시는 합작법인 공장의 안정적 건설 및 운영,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과 조례를 정비하고 각종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지원한다. 공장 건설이 마무리되면 직접 고용하는 정규직이 1000여 명, 간접 고용까지 더하면 1만∼1만 2000명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광주시는 추산한다.

일자리의 단순한 양적 확대만을 추구한다면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별 의미가 없다. 일자리 창출과 함께 의사결정 구조, 기업 간 생산관계, 고용 형태의 획기적 전환을 추구하기 때문에 혁신적 모델로 평가받는다. 광주형 일자리의 임금체계와 고용 형태는 사회연대적 가치를 지향해 설계하기로 했다. 국내 제조업은 기업 규모와 고용 형태에 따른 임금 및 처우의 차이가 심각한 수준이다. 원청 대기업과 하청-재하청 중소기업 간,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 격차 심화는 사회적 갈등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투자와 고용 활력을 저해하는 요소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온 대안이 광주형 일자리 모델이다.

광주시와 현대차,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가 잠정 합의한 신설법인의 정규직 평균 초임연봉은 주 44시간 기준 3500만 원 수준이다. 세부적인 임금체계는 기본급 비중을 높인다는 전제로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연구용역을 거친 뒤 도입하기로 했다. 앞으로 임금인상률에 대해서도 소비자 물가상승률 등을 고려해 노·사·민·정 협의로 먼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신설법인은 이를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노사 합의로 결정한다. 광주시는 광주형 일자리에 참여하는 노동자의 실질소득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중앙정부의 지원을 얻어 주거 및 교통 지원, 교육, 의료, 문화 등 다양한 공동복지 프로그램을 제공할 방침이다.

현대·기아차 노조 반발 등 우려도
광주형 일자리에 대한 희망이 크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당장 현대차와 기아차 노조의 반발이 크다. 광주형 일자리의 임금 수준이 현대·기아차보다 낮아 임금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한다는 게 반발하는 가장 큰 이유다. 신설법인이 위탁 생산할 SUV 경차가 이미 포화 상태인 경차 시장의 과잉경쟁을 부추겨 전체 자동차산업의 위기와 고용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다. 이에 대해 이용섭 광주시장은 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편향적이고 단선적인 시각에서 나온 우려이며 반발”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3500만 원 초임 연봉과 고용 안정 등이 보장된 일자리를 폄하하는 것은 기득권의 논리이며, 적정 임금을 바탕으로 가격과 품질 면에서 경쟁력을 갖춘 자동차를 공급하면 시장 수요의 부족도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다. 광주형 일자리와 같은 노사 상생의 일자리 창출에 성공해야 고비용·저효율 구조 때문에 투자와 고용 부진에 빠진 제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광주형 일자리의 임금 수준이 현대·기아차 정규직보다 훨씬 낮은 것은 사실이다. 현대·기아차의 생산직 평균 초임연봉은 성과급과 각종 수당 등을 포함해 약 4800만 원이다. 여기에 견주면 광주형 일자리의 초임연봉은 70% 선이다. 하지만 광주 지역의 다른 제조업이나 하청 중소기업까지 포함한 국내 자동차산업 전반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수준이다. 그래서 광주시는 ‘적정 임금’이라고 강조한다. 전체 제조업 일자리의 임금 수준과 처우를 일렬로 세웠을 때 중상위 지점에 해당하는 일자리가 될 것이라고 광주시는 판단한다. 적정 임금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현재 완성차업체의 임금이 경쟁력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높은 수준이라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광주형 일자리에는 임금 이외에 무형의 보상들이 뒤따른다는 점도 중요하다. 노동조건의 질적 개선이나 의사결정 과정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 보장,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일과 삶의 균형, 고용 안정 등의 가치는 임금 못지않게 노동의 삶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지역혁신 운동의 일환이기도 하다. 지역 내 여러 이해집단이 참여하는 사회적 협약에 기초해 새로운 노사관계와 기업 간 상생 방식을 제시하고, 지방자치단체는 이에 맞는 투자를 성사시켜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사회적 통합을 달성하겠다는 게 운동의 취지이자 목표다. 정부로서는 광주형 일자리의 확산을 기대하는 게 당연하다.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은 2월 8일 기자간담회에서 “상반기에 잘하면 최소 한두 곳은 급물살을 타겠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며 ‘제2, 제3의 광주형 일자리’ 추진을 공식화했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이 발표된 뒤 경북 구미, 대구, 전북 군산, 충북 청주 등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주력 산업의 사양화나 구조조정 여파로 일자리 창출에 어려움을 겪는 지역일수록 관심이 많다. 실제로 전북은 한국지엠(GM)이 철수 결정을 내린 군산공장의 유휴시설과 숙련 노동자 등을 활용하는 ‘군산형 일자리’의 모색을 서두르고 있다. 사업을 추진할 기업을 유치하는 게 관건인데, 전북도 관계자는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 참여하더라도 이미 지역 주민·노동단체 등과 군산형 일자리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쟁점 없이 더 빨리 실현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g  ▶자동차 조립 공장에서 조립작업이 이뤄지고 있다.│한겨레

법적 지원 근거·가이드라인 공표 방침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기자간담회에서 “광주형 일자리처럼 중앙정부와 지자체, 노사가 함께 일자리를 만드는 사업을 하려면 예산이나 세제 등 종합적인 지원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며 상생형 지역 일자리 모델에 대한 법적 지원 근거와 함께 가이드라인 공표 방침을 밝혔다. 노사 상생형 일자리 모델이 지역별 특성과 수요에 맞춰 확산되도록 정부가 지원 체계와 기준, 범위 등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홍 부총리는 “가이드라인을 공표한 뒤 지자체가 이를 토대로 적합한 일자리 모델을 만들어 신청하면 (중앙정부가) 심사를 거쳐 상반기 내 2~3개 지자체에 모델을 적용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기초와 광역단체 모두 신청할 수 있다. 구체적인 절차를 보면, 지방정부와 노사가 지역 특성과 수요에 맞춘 일자리 모델을 발굴해 신청하면 중앙정부가 심사위원회를 꾸려 모델을 심사한 뒤 지원 여부를 결정해 추진한다.

광주형 일자리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구상이다. 큰 틀에서 목표와 방향, 각 사업 추진 추체가 지켜야 할 원칙 등을 합의했을 뿐이다. 지자체 주도의 상생형 일자리는 국내외 어디에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광주시가 첫걸음을 내디뎠다. 막막한 가운데서도 광주 지역 노·사·민·정의 의지와 시민적 역량 결집이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했다. 앞으로는 더 정교하고 실질적인 추동력이 필요하다. 냉혹한 시장 현실에 적용할 구체적인 요건들에 대한 토론과 결정, 실천이 남아 있다. 일자리 혁신을 위한 진정한 실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박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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