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땅기운 모아 물처럼 바람처럼

2019.02.18 최신호 보기


a▶동트는 계룡산 연화봉 정상에서 기천문 박사규 문주(가운데)와 13년째 산중 수련하는 정민희(왼쪽), 복석현 모자가 기천수련을 하고 있다.

해가 뜬다. 이미 동해에서는 한참 전에 떠오른 태양이다. 계룡산 주능선 뒤편 서쪽에 자리 잡은 연화봉에 햇살이 비추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명은 언제나 설렌다. 한밤의 깊은 음기(陰氣)를 걷어내고, 한낮의 밝은 양기(陽氣)를 향해 서두르지 않고 시간은 조용히 흐른다. 해가 뜨는 동쪽의 능선을 바라보면 심장이 뛴다. 생명의 강한 맥박이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아! 드디어 동쪽 능선에 햇살의 기미가 보인다. 한 가닥 두 가닥, 노랗고 강력한 광선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거침없다. 기운차다.

연화봉 정상의 널따란 바위에 세 사람이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가운데 자리 잡은 박사규(71) 문주가 낮게 깔리면서 육중하게 ‘지(地)~’라고 말하며 두 손을 하늘을 향해 크게 올렸다가 단전 앞으로 모은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두 무릎을 안으로 조이는 듯 구부린다. 기천문(氣天門)의 핵심인 내가신장의 시작 동작이다. 강하고 묵직한 기운을 사용해 땅의 기운을 받아들인다.
 
‘지–천–합–틀–무’로 부드럽고 단호
왼쪽의 젊은이도 능숙한 동작으로 따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속에 들어와 12년째 기천문을 수련 중인 복석현(31) 범사다. 오른쪽의 여인은 젊은이보다 1년 먼저 산에 들어와 기천문을 수련하는 정민희(57) 씨. 복 범사의 어머니다.
박 문주는 이번엔 ‘천(天)~’ 하며 두 손을 하늘을 향해 크게 올린다. 하늘의 기운을 받아들인다. 우주를 품에 안는다. 이어서 ‘합(合)’이라고 단호하게 소리를 내며 합장하듯 두 손을 얼굴 높이에서 붙인다.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인간이 중간에서 합치는 형상이다. 다음은 ‘틀’ 하며 두 손바닥을 뒤틀며 강하게 비빈다. 이어지는 ‘무(無)~’. 두 손바닥은 바깥을 향한 채 뒤로 뺀 엉덩이와 안으로 굽힌 무릎은 정지 상태. 최초의 도(道)가 무(無)에서 시작되듯, 모든 동작이 무의 상태로 돌아가는 형국이다.

정적이 흐른다. 해는 점차 능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 햇살이 세 명의 무인(武人)에게 아낌없이 쏟아진다. 손과 다리의 근육은 역근(易筋)의 형태. 마치 빨랫감을 힘껏 짜듯 뒤틀린 모습이다. 생고무를 꼬았을 때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강한 힘이 생기듯, 정지된 육체지만 강력한 혈액순환과 신진대사가 이뤄진다. 그러면서 몸이 변한다. 근육과 뼈, 그리고 오장육부가 강력한 무인의 그것으로 바뀐다고 주장한다.
한동안 내가신장의 자세로 조금의 움직임도 없던 세 사람은 박 문주의 ‘바로’ 구령과 함께 처음 바로 선 자세로 돌아온다. 깊은 호흡을 하며 능선을 벗어나 하늘에 자리 잡은 태양을 바라본다. 환한 미소가 맴돈다. 건강함이 묻어난다.
박 문주의 기천무(氣天舞)가 연화봉 정상을 장식한다. 무예인 듯, 춤인 듯 부드럽고 단호한 몸짓이 천지자연의 품속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한민족 산중무술, 몸에서 몸으로 전수
박 문주는 전남 진도 출신.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권투와 태권도(5단), 합기도(6단) 등 각종 무술을 익혔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술 고수와 수를 섞어 패한 적이 없었다. 군에서 제대한 뒤 결혼하고, 3년간 농사를 짓다가 상경해 의상실에 취직한 그는 독립해서 남대문시장에서 의류 도매를 시작했다. 잘됐다. 이태원에 큰 여성복 매장을 운영했다. 당시 합기도 사범이었던 박 문주는 친구에게 “눈 위를 걸어도 발자국이 남지 않고, 나뭇가지를 뛰어다니며, 장풍도 쏘는 당대 최고의 무인이 출현했다”는 말을 듣고, 서울 왕십리 뒷골목에 있는 도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박대양이라는 무인을 만난다. 그 만남이 그의 인생을 확 바꾸었다. 잠시 그 당시로 돌아가보자. 당대 최고 무인끼리의 극적인 만남이다.
“진정한 무인이라면 몸으로 한번 보여주시죠.”
부탁 조로 말을 붙였다. 상대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앉아 있다. 언뜻 보기엔 어린 중학생 같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며 “정 원하신다면 저도 한 수 배우지요”라고 말했다.

둘은 마주 섰다. 승부는 싱겁게 끝났다. 단 한 수 만에. 박대양은 박사규가 공격할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순식간이었다. 박대양의 모습이 박사규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연비파문(燕飛波紋)’. 마치 제비가 날렵하게 호수 위를 스치며 먹잇감을 낚아채 날아오르는 형국. 몸을 옆으로 비껴 틀며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상대의 관자놀이를 가격한 뒤, 곧바로 날아올라 360도 회전하며 발로 상대 얼굴을 타격하는 초절정 무술의 기술이다. 박사규는 한 방에 기절했다.
그 후로 박사규는 세 살 어린 박대양과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까지 앞뒤로 이동하며 공격과 수비를 하던 무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좌우로 이동하고, 둥글게 돌기도 하는 무술에 매료된 것이다. 그 무술이 바로 기천문이다.
박대양은 5세 때 입산해 19세 때까지 설악산에서 원혜상인이라는 노인에게 기천을 배웠다고 한다.

j▶박 문주가 새벽에 단배공을 하며 하루를 열고 있다.

100명 도반 식사 즐겁고 거뜬히 준비
박 문주는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사업을 접고 계룡산에 스며들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이제는 전국에서 기천문을 배우러 오는 제자들에게 기천을 전수한다. 20년이 흘렀다. 계룡산이 대규모 자연 수련장인 셈이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제자들은 박 문주의 기운을 받으며 몸과 마음을 단련한다.
그런 제자 가운데 한 명이 정민희 씨다. 정 씨는 친구들과 계룡산을 오르다 산속에서 기천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운명처럼 산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당시 정 씨는 원인 모를 두통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아무리 병원을 다녀도 낫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천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두통이 사라졌다. 내친김에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계룡산에 들어왔다. 매일 단배공을 했다. 뒤꿈치를 든 채 일어났다가 엎드리는 기천 특유의 수련 동작인 단배공은 마치 108배 같은 동작이다. 그러나 천천히 하며 온몸의 중심을 잡으면서 움직이는 동작으로 일반인은 한 번 하기도 힘들다.
정 씨는 토요일과 일요일, 수련을 마친 도반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한다. 많을 때는 100명분도 준비한다. 하지만 즐겁다. 발걸음은 가볍고, 몸동작은 날렵하다.

l▶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계룡산 수련장에서는 전국에서 모여든 수련생들이 기천을 수련한다.

한밤중에 혼자 몰래 수천 번 씩 반복
정 씨는 아들 복 범사를 기천으로 이끌었다. 함께 산중 생활하며 기천 수련을 한 지가 이미 12년이 흘렀다. 어릴 때부터 수영과 검도 등으로 몸을 다진 복 범사는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살이 쪘다. 체중이 90㎏을 웃돌았고, 혈압도 높아졌다. 정 씨는 아들에게 기천을 추천했다. 처음에는 내가신장 5분 만에 구토를 해 멈추어야 했다. 하지만 방학 때는 30일씩 계룡산에 들어가 어른들 사이에서 기천을 익혔다. 기천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달 만에 12㎏ 감량에 성공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대신 계룡산에 들어갔다. 박 문주는 기천수련보다 농사와 청소를 중요시했다. 강한 햇빛 아래 쭈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 것은 고역이었다. 기천 운동은 아침에 1시간 반만 허용했고, 농사를 주로 가르쳤다. “사부님은 농사를 지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농사의 이치가 세상사의 이치고, 인성을 완성한다고 하셨어요.” 벼농사는 물론 고추 농사, 콩 농사도 지었다. 너무 기천 수련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들이 모두 자는 한밤중에 산속 수련터에 혼자 가서 수련을 하곤 했다. “무서웠어요. 그 두려움을 이기려고 한 동작을 수천 번씩 반복했죠.”

복 범사의 주특기는 대풍력수(大風力手). 큰 바람을 일으키는 강력한 한 수다. 몸의 탄력을 이용해 팔을 원으로 감아서 친다. 손을 태극 형태로 감아 작은 힘으로도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작은 체구의 사람도 큰 힘을 낼 수 있다. 직선보다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원’의 원리가 스며 있다. 끊어서 치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 연결해 강한 파괴력과 함께 상대의 허점을 공격한다.

수련생 저마다 사연은 장편소설 한 편
방송통신대에 재학 중인 복 범사는 이제는 틈틈이 출강을 한다. 기업체나 지역 시민대학에 가서 기천을 강의한다. 특히 공주교도소에서는 재소자를 대상으로 기천수련을 인성 프로그램으로 진행한다.
“사부(박 문주)는 호랑이처럼 엄하셨어요. 잘못된 행동을 하면 벼락을 쳤어요. 게으름을 피우거나 약속을 어기면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지요. 그리고 기천은 참된 나를 찾는 운동이라고 항상 가르쳐주셨어요.”
동트는 연화봉에서 기분 좋은 수련을 마친 사부와 제자는 산에서 내려와 전국에서 온 제자들과 마주한다. 안동에서, 전주에서, 서울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계룡 수련장에 찾아온 수련생들은 연령도 다양하다. 저마다 장편소설을 품고 있다고 한다. 건강에 관해, 무술에 관해, 그리고 기천에 관해. 정 씨는 식사를 준비한다. 박 문주는 구령을 하며 제자들을 유심히 살핀다. 복 범사는 시범을 보인다.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무게도 형체도 없어요. 그것이 기천입니다.” 박 문주의 부드러운 미소가 기(氣)가 세다는 계룡의 숲속에 은은히 퍼진다.

공주/글·사진 이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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