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사│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당시 사회통념 깨고 도전 거듭
최초 미국대학 문학사 학위 받아
이화학당 총교사와 사감 취임
서클 ‘이문회’ 이끌며 민족의식 자극
고종 특사로 파리강화회의 가다가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음, 독살설
▶워싱턴 D.C. 유학생 사진으로 1982년 4월 24일자<한국일보>에 실렸다. 김란사는 1899년경 미국 워싱턴 D.C.의 디커너스 트레이닝 스쿨에서 1년간 수학했다.│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영웅’ 뒤에는 훌륭한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 3·1운동의 대표 인물로 각인된 유관순의 연결고리를 찾는 과정에서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여학생들이 3·1운동 주역으로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민족의식이었다. 여학생의 민족의식! 그들이 깨어 있는 감성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변화, 그 뒤에는 그들을 변화시킨 스승이 있었다.
김란사는 유관순이 수학한 이화학당의 총교사, 기숙사의 사감, 그리고 이화학당의 서클 ‘이문회’를 활성화했던 인물이다. 이화학당은 1898년 엡워드 청년회를 시작으로 러빙 소사이어티, 1904년 이문회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친목 활동에 힘썼다. 그중 이문회는 매월 3차례 집회를 통해 연설과 토론, 창작 활동, 피아노 연주, 합창 등의 활동을 했는데, 1909년에는 외부 인사를 초청해 공개 발표를 할 정도로 활발했다. 이문회 활동은 교내외 인사와 선후배 간의 교류가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1912년 기준 서울 소재 이화학당 부속학교가 46개였으니 이문회의 공개 활동은 학생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이문회의 중심에 미국 웨슬리언대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부임한 교사 김란사가 있었다.
▶1895년 5월 2일 김란사는 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확답을 받은 뒤 관비로 수학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사진은 관비 유학생들과 함께 찍은 것이며, 김란사는 한복을 입고 있다.│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결연한 의지에 학칙 어기고 허락
어느 날 밤, 이화학당 프라이 선생을 찾아 한 여성이 문을 두드렸다. 쪽 찐 머리를 한 양반가 여성은 이화학당에 입학을 하고 싶다고 청했다. 프라이 선생은 규정상 기혼 여성은 입학할 수 없다고 전했다. 그러자 여성은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의 불을 끄며 “내 인생이 지금 꺼진 등불처럼 깜깜합니다. 제게 빛을 찾아주시지 않겠습니까?”라며 절박하게 배우고 싶다고 했다. 1914년 프라이 선생의 ‘Women’s Missionary Field’ 미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꺼진 등불같이 어두운 현실에 어머니들이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서 자식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며 입학을 청하는 여성에게 프라이 선생은 입학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란사(1872~1919)는 부친 김병훈과 이씨 부인 사이에 장녀로 태어나 1894년 인천 감리 별감을 지낸 하상기와 혼인한 뒤 이화학당을 다녔으니, 사회 통념의 틀을 과감히 깬 여성인 셈이다. 김란사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1895년 일본 게이오기주쿠에 유학을 다녀온 뒤, 서재필 박사의 강연을 듣고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남녀노소, 상하 빈부 분간 없이 법률로만 다스리기를 바라노라. 사나이 아이들은 자라면 관인과 학사와 상인과 농민이 될 터이요, 계집아이는 자라거든 이 사람들의 아내가 될 터이니 그 아내가 남편만큼 학문이 있고 지식이 있으면 집안일이 잘될 터이요, 또 그 부인네들이 자식을 낳으면 자식 기르는 법과 가르치는 방책을 알 터이니 그 자식들이 충실할 터이요 학교에 가기 전 어미 손에 교육을 많이 받을 터이라… 그런 즉, 어찌 그 여인네들을 사나이보다 천대하여 교육하는 데도 등분이 있게 하리요.”
-<독립신문> 1896년 5월 12일자 사설 중에서
서재필의 여성에 대한 강연은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을 고무시켰다. 자유, 민주, 평등을 이야기하는 그에 대한 관심은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펼치는 국가, 미국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일본 유학 후 서재필의 강연을 듣고 유학을 결심한 김란사는 1897년 11월 30일 남편 하상기와 일본 요코하마 부두를 거쳐 미국행 배 도릭호에 올랐다. 1897년 12월 15일 샌프란시스코항의 입국 기록에 따르면, 김란사는 남편과 함께 학생 신분으로 30달러를 소지한 채 입국해서 워싱턴으로 향했다.
김란사는 워싱턴 D.C.의 디커너스 트레이닝 스쿨을 약 1년 다닌 뒤,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미국에는 윤치호, 박에스더, 김규식, 양주삼, 박용만 등을 비롯해 후일 의친왕이 된 왕세자 이강이 있었다. 필자가 2018년 뉴욕을 방문했을 때 만난 대한제국 의친왕의 딸인 이혜경 여사는 “부친이 미국 유학을 했을 때, 많은 독립운동가와 교류했는데 김란사 여사와도 친분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김란사는 어학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최초 문학사 학위를 받은 여성으로 황실에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고종황제의 특사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 중국 베이징에서 죽음을 맞이했는데, 김란사의 죽음이 석연치 않아 독살설이 나오는 것도 그 맥락에서 이해된다.
1909년 고종황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학생을 위해 축하연을 열고 고종황제 은장을 수여했다. 최초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김란사, 여의사 박에스더, 유럽 유학생 윤정원 등 3인은 주목받는 신여성이 되었다. 하지만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김란사는 민족의 희망을 일으키는 활동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화학당에서는 학생들을 독려하고 국내외를 오가며 민족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고심했던 것 같다. 열악했던 국내 환경과 종교계의 상황 속에서 그는 1917년 국내 교회에 처음으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도록 발로 뛴 인물이다.
▶정동교회에 설치된 국내 최초 파이프오르간│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파이프오르간 모금에 독립 염원 호응
김란사는 국내 파이프오르간 설치를 위해 미국 동부지방을 순회하며 동포들에게 강연을 했고, 호소문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도산 안창호는 김란사의 모금 활동에 흔쾌히 협조한다는 서신을 주고받았다. 대외적으로는 파이프오르간 성금 모금이었지만, 이면에는 성금 모금으로 해외에 있는 동포들이 고국 동포를 위해 독립의 희망을 전달하는 염원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시카고 113원 50전, 뉴욕 180원, 디트로이트 50원, 캔자스시티 11원, 디트로이트 자영업자 1000원, 김란사 100원, 그리고 각처에서 전달된 25원까지 성금으로 모금한 금액은 1479원 50전이었다. 그리고 부족한 이송비는 서부지역 성금 모금을 통해 모아졌다. 그렇게 설치된 정동교회의 파이프오르간은 김란사의 의지와 해외동포의 애국심이 이뤄낸 것이다. 조선의 등불을 밝힌 여성 김란사. 그를 통해 암울했던 시대, 민족의 희망을 함께 나눈 이들을 그려본다.
심옥주_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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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