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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적 성장은 모든 경제주체들이 성장에 기여할 기회를 공평하게 갖고, 성장의 과실이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가능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역동적인 경기를 펼칠 수 없듯 경제주체들 간 힘의 불균형이 심한 시장에서는 공정하고 효율적인 자원 배분도, 지속적인 성장과 ‘다 함께 더불어 행복한 사회’도 기대할 수 없다. 불균형의 악순환을 벗어나 포용적 성장의 길로 들어가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균형 해소가 가장 시급한 과제다. 황무지에선 초식동물이 살 수 없고, 초식동물이 없으면 사자나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도 생존할 수 없는 것이 생태계의 이치다. 기업의 생존 환경도 마찬가지다. ‘승자독식’의 양극화가 심화하면 전체 기업생태계가 황폐해진다. 건전한 생태계를 복원하지 않으면, 결국 기업 활동은 시들해지고 전체 경제의 성장 동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포용적 성장과는 점차 멀어지는 길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을 통한 동반성장이 절실한 이유다.
지난 1년여 동안 경기침체가 지속된 가운데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경영 실적은 더욱 뚜렷하게 엇갈렸다. 성장세의 둔화와 대·중소기업 양극화가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한국은행이 2005년부터 발표하는 ‘기업 경영분석’ 자료를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률 추이에서 이상한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경기가 좋을 때는 대·중소기업 간 이익 격차가 좁혀졌다가 경기둔화 국면에선 오히려 더 벌어지는 현상이다. 2018년 3분기(7~9월)의 경우 대기업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8.39%로 관련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면 중소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4.13%에 불과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영업이익률 격차가 통계 작성 이래 가장 큰 폭인 4.26%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중소기업의 대기업 매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산업구조의 특징을 고려하면, 대기업이 돈을 잘 벌면 중소기업도 수익성이 높아져야 할 터인데, 중소기업이 부닥치는 현실은 그 반대다. 대기업의 매출이나 수익이 늘어나도 중소기업으로 흘러가는 혜택은 별로 없다. 오히려 인건비 등 원가 상승 부담은 고스란히 중소기업에 떠넘겨져 경기 침체기일수록 이익 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였다.
이익 격차, 경기 안좋을 때 더 심한 이유
이익 격차의 심화는 임금과 혁신역량, 더 나아가 장기 생존능력의 격차 심화로 이어진다.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의 평균 임금수준은 2001년 65.9%에서 2016년 54.9%로, 격차가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추세다. 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연구개발활동 조사 보고서’를 보면, 국내 전체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 가운데 중소기업의 비중은 2009년 29.1%에서 2016년 24.4%로 줄었다. 2000년대 들어서 국내 중소기업은 ‘낮은 수익성→임금 지불능력의 저하와 인력난 심화→연구개발 등 혁신역량의 저하→수익성 추가 하락’이라는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몇몇 대기업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형 산업구조에서 단기 이익만 추구하는 승자독식의 문화가 만연한 탓이다.
정부가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하는 정책 꾸러미를 지난해 5월 내놓았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마련한 ‘대·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의 생태계 구축 방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 방안에 담긴 정책들은 목표와 과제별로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경쟁과 부당한 거래 관행의 개선이다. 대기업의 하청기업에 대한 경영정보 요구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입법을 추진하고,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행위에 대한 조사와 처벌을 강화하기로 했다.
둘째, 대·중소기업의 협력에 따른 성과를 공유하기 위한 상생협력이다. 기존 성과공유제와 상생결제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동시에, 대·중소기업이 자율적으로 합의한 사전 계약에 따라 신제품 개발 등 공동사업의 이익을 나누는 협력이익 공유제의 법제화를 추진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세 번째 과제는, 대기업의 혁신자원을 개방하고 공유하는 상생협력을 유도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대기업이 중소기업 R&D 투자와 스마트공장 구축을 지원할 경우 정부의 R&D 예산을 연계(매칭) 지원하고, 업종별 상생협력 협의체를 구성해 업종별로 대기업의 혁신역량과 노하우를 중견·중소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이런 정책 과제들 가운데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관계 개선을 위한 입법 과제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거래하면서 겪는 대표적인 부당 행위가 납품단가 인하 압력과 기술 유용(기술 탈취)인데, 이를 예방하고 시정·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강화됐다. 우선 하청기업에게 납품단가를 부당하게 깎거나 납품대금을 제때 주지 않는 기업은 2018년 11월부터 무거운 행정제재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중기부가 납품대금 미지급 또는 부당 감액, 서면약정서 미발급 등을 조사해 위법 사항을 적발할 경우 시정 요구 조처와 함께 벌점을 부과하고, 벌점이 3년 누계로 5.0점을 초과하면 공공조달 시장에 참여할 수 없는 불이익이 뒤따른다.
여기에다 1월 임시국회에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개정 법률(상생협력법)’이 통과돼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의 납품단가 협상력이 향상될 수 있게 됐다. 오는 7월부터 시행 예정인 개정 상생협력법은 수·위탁 거래관계에서 납품대금조정협의제도 도입, 보복 행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적용, 약정서 발급의무 위반 시 과태료 부과 등 중소기업의 적정 납품단가 보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은 인건비나 경비 등 공급원가가 올랐을 때 위탁 대기업에 납품대금 조정을 신청할 수 있고, 원할 경우에는 중소기업협동조합에 위탁 기업과의 납품대금 조정 협상을 맡길 수 있다.
중소기업이 보유한 기술을 탈취하거나 유용하는 행위에 대한 조사와 행정제재 대상은 이미 대폭 넓어졌다. 2018년 6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된 ‘중소기업 기술 보호 및 지원에 관한 개정 법률(중소기업기술보호법)’이 2018년 12월 13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개정안은 중소기업 기술 침해사건이 발생할 경우 중기부도 직접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행정 조처를 내릴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담고 있다. 그동안 중소기업 기술 침해에 대한 조사와 행정제재는 공정거래위원회와 특허청만 법적 권한이 있어 조사 대상이 지나치게 좁고 절차도 복잡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상생협력기금 28% 늘어 1조 원 돌파
상생협력의 촉진을 유도하기 위한 법령 개정의 성과가 가장 빨리 나타나는 분야는 납품대금 결제 관행이다. 어음을 대체하는 기업 간 대금결제 수단으로 2015년 도입된 ‘상생결제’ 규모가 지난해 16%가량 늘어 사상 처음으로 연간 기준 100조 원을 넘어섰다. 상생결제란, 원·하청 또는 구매·납품거래 계약에서 원청기업·구매기업이 지정 은행과 사전 협약을 맺어 별도 계좌를 개설하면 그 은행이 대금 지급을 보증하는 결제시스템이다. 이렇게 하면 원청 대기업과 거래하는 기업은 일정 비율 이상의 현금 지급을 보장받거나, 결제일 이전이더라도 대기업 수준의 낮은 금융비용으로 결제대금을 현금화할 수 있다. 또 상생결제시스템에서는 납품대금이 원청기업을 거치지 않고, 은행 예치 계좌에 보관 뒤 하위 거래기업에 직접 지급되기 때문에 어음결제와는 달리 연쇄부도의 위험을 차단할 수 있다.
특히 정부가 2018년 9월 말부터 상생결제 의무화 대상을 넓히면서 전체 결제 규모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중기부 집계에 따르면, 현재 상생결제 협약에 가입한 기업은 대기업 291곳을 비롯해 모두 354곳이며, 지난해 이들로부터 상생결제로 납품대금을 받은 기업은 17만 8977곳이다. 중기부는 올해부터 결제 단계별, 기업규모별, 금융기관별 상생결제 취급 현황을 분기마다 집계하면서 상생결제가 보다 하위단계의 거래기업에까지 퍼질 수 있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대·중소기업 간 자발적인 상생협력 노력도 활발하다. 민간 대기업과 공공기관 등이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을 위해 대·중소기업협력재단에 출연하는 상생협력기금이 지난 한 해 동안 대폭 늘어 누적액이 1조 원을 돌파했다. 지난해 신규 출연액은 전년 대비 28%나 증가한 2013억 원으로, 2011년 기금 도입 이후 연간 최고치를 기록했다. 상생협력기금은 출연 기업과 협약을 맺은 중소기업이 생산공정 개선, 연구개발, 해외시장 개척 등에 활용하며 정부도 세제 혜택과 정책금융 연계 지원의 방식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2011년부터 2018년 말까지 196개사에서 모두 1조 67억 원을 출연해 중소기업 4만 3160곳을 지원했다. 대·중소기업협력재단은 지난해의 경우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포스코 등 18개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기금 출연이 활발했다고 전한다.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가운데)이 2018년 10월 2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 회장과 함께 서명한 ‘스마트공장 보급·확산 협력을 위한 업무 협약서’를 보여주고 있다. | 한겨레
중소기업 공장 스마트화 큰 기대
대기업이 참여하는 스마트공장 구축은 정부와 중소기업계가 올해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상생협력 사업이다. 중기부는 대기업이 참여하는 ‘상생형 스마트공장’ 구축을 올해 중점 정책과제로 정했다. 상생형 스마트공장 구축을 위한 시범 모델은 벌써 나왔다. 2018년 10월 삼성전자, 중소기업중앙회와 함께 체결한 ‘스마트공장 보급·확산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이 그 모델이다.
협약은 중기부와 삼성전자가 앞으로 5년 동안 해마다 각각 100억 원씩 모두 1000억 원을 조성해 2500개 중소기업 공장의 스마트화를 지원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연말 조직 개편에서 ‘스마트공장 지원센터’를 신설하고, 사내에서 제조공정의 최고 전문가로 통하는 김종호 전 글로벌품질혁신실장을 사장급인 센터장으로 임명했다. 스마트공장 구축 비용을 지원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공장 설계와 운용 등에 필요한 기술 및 인력 지원까지 고려한 인사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산하 협동조합 네트워크와 각 지역본부를 통해 수요 기업 발굴과 사업 참여를 희망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컨설팅 및 신청 접수 업무를 맡기로 했다. 정부는 이처럼 대기업과 중소기업 단체가 상생협약을 맺어 사전 준비 단계부터 운영 및 사후관리에 이르기까지 서로 협력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 민간이 주도하는 상생형 스마트공장 구축은 다른 업종에서도 자연스럽게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생태계 구축은 올해도 범정부 차원의 정책과제다. ‘2019년 경제정책방향’을 보면, 대기업과 1차 협력사 간 하도급 대금 결제조건에 대해 공시 의무화가 추진된다. 2차 이하 협력사가 납품대금 협상 과정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 협상력을 높여주자는 취지다. 또 상생협력의 확산을 위해 2022년까지 ‘협업 선도기업’ 200곳을 지정하며, 다양한 협업사업 추진을 위해 여러 기업이 공동출자해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인 협업전문회사도 올해부터 2022년까지 100곳을 육성한다.
정부가 은행 변동금리 대출의 기준지표인 코픽스(COFIX·자금조달비용지수) 산정 체제 개편에 나서면서 하반기부터 이자 부담이 줄어들 거란 기대감도 높다. 앞서 지난 1월 22일 금융위원회가 코픽스 조정을 통한 대출금리 인하 방안을 내놓자,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좋은 업적인 만큼 부채에 얼마나 혜택이 있을지 자세히 설명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혜택 미흡하고 대기업 참여 제한적
정부의 지속적인 상생협력 정책은 중소기업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중소 제조업에서는 정책 변화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중소 제조업체 300곳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새 정부 출범 후 우리 사회에 공정거래와 상생협력에 대한 인식이 확산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업체가 39%로, ‘아니다’라는 업체 14%보다 세 배 가까이 많았다. 새 정부 출범 후 대기업 등 원사업자와의 거래관계 변화에 대해서는 ‘개선됐다’는 응답도 25.7%로, ‘악화했다’(6.3%)보다 네 배가량 많았다. 공정경제 관련 법·제도 개선 사항 가운데 새 정부가 가장 잘했다고 평가하는 정책으로는, ‘납품단가 현실화 대책 강화’(36%·복수 응답)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불공정거래신고센터 확대 운영’(34%), ‘기술 탈취 근절 강화’(24.7%) 등의 차례였다.
상생협력 정책에 대한 중소기업의 인식이 전반적으로 개선되기는 했지만 실제 중소기업에 돌아가는 혜택은 여전히 미흡하다. 대기업의 상생협력 노력이 1차 협력업체에 집중된 단계를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2차, 3차를 포함한 중소기업 전반으로 상생협력 문화가 확산되어야 기업생태계의 경쟁력 제고로 이어질 수 있다. 각종 상생협력 프로그램에 대한 참여 대기업의 범위가 제한적인 것도 문제다. 공정위의 상호출자제한 대상 대기업 집단 계열사 가운데 성과공유제를 도입한 기업은 10%에도 못 미친다.
상생협력 생태계 구축의 목적은 대·중소기업 경쟁력 제고에 있다. 장기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의 경쟁력 제고에 도움을 주고, 나아가 전체 산업생태계의 경쟁력을 높이자는 게 상생협력 정책의 취지다. 그런데 재계 일각에선 상생협력 정책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예컨대 상생협력 정책은 정부의 강요 때문에 대기업이 중소기업에게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성장 정책과는 대립하는 분배 정책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있다. 이런 시각에서 전개하는 상생협력 활동은 ‘구색 맞추기’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상생협력을 통한 포용국가로 가는 길에는 아직 넘어야 할 고개가 많다.
박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