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녹번동 옛 질병관리본부 건물에
미래청 제작동·공유동 등 28개 동
250여 개 단체 1300여 명이 들어와
교류와 협업으로 다양한 프로젝트 진행
식량, 에너지, 환경오염 등 해결책 찾아
개인부터 협동조합, 중소기업, NGO 등 참여 다양
제작동엔 3D 프린터·톱 등 공구 그득
누구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은퇴자와 사회적 기업 연결해 상생
어르신들 자서전 돕고 인생노트 쓰게
어린이 위한 책공연 연극단 전국 순회
청년 창업 컨설팅하는 사회적 기업도
매섭도록 차가운 칼바람이다. 북한산 능선을 지나 도심을 관통하는 겨울바람이다. 건물 옥상에 쇠 파이프 구조물이 있다. 마치 동네 놀이터의 아이들이 매달려서 노는 놀이 구조물 같다. 찬 겨울바람이 구조물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보기만 해도 은빛 쇠 파이프 구조물이 차갑게 느껴진다. 옥상 출입문이 열리고 몇 명의 젊은이들이 구조물로 접근한다. 두꺼운 외투를 벗곤 몸을 푼다. 스트레칭과 가벼운 달리기를 하며 찬 겨울바람에 몸을 푼다. 그러곤 쇠 파이프 구조물 사이를 헤집기 시작한다.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구조물 사이를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오가듯 자유롭게 오간다. 뛰어넘고, 잡고 오르고, 뛰어내리고…. 물고기가 수초 사이를 부드럽게 유영하듯이 젊은이들은 구조물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파쿠르를 연습하는 젊은이들이다. ‘야마카시’라고도 알려진 모험을 즐기는 스포츠다.
▶미래청 1층에 있는 ‘창문 카페’에는 넓은 공간에 읽을 책도 비치돼 있다.
▶스테인레스 빨대는 거의 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미래청 옥상엔 파쿠르 놀이터
지난해 9월 옥상에 만들어진 쇠 파이프 구조물은 ‘모험 놀이터’다. 이 놀이터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옥상 공유지 프로젝트’의 하나로 예산 지원을 받아 시민 참가자 30명이 직접 만들었다. 이 놀이 기구를 디자인하고 파쿠르 놀이를 지도하는 김지호(31) 파쿠르 제너레이션즈 코리아 대표는 “파쿠르를 보급하기 위해 이 건물 옥상에 구조물을 설치했다”며 “젊은이들뿐 아니라 시니어도 즐길 수 있는 파쿠르 교실을 열 계획”이라고 말한다.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서울혁신파크’의 여러 건물 가운데 하나인 미래청 옥상에 자리 잡은 파쿠르의 모험 놀이터는 김 대표가 지난해 3월 입주한 것이 만들어진 계기가 됐다. 마침 파쿠르 보급을 위한 사무실이 필요했던 김 대표는 서울시가 청년 사업가 지원 정책의 하나로 모집한 혁신파크 사무실 임대에 공모했고, 심사에 통과하며 입주했다.
13평의 사무실을 사용하는 한 달 임대료는 20만 원. 저렴하다. 김 대표는 사무실뿐 아니라 옥상 공간을 연습장으로 쓸 수 있다. 또 유료 파쿠르 교실을 운영한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정기적으로 파쿠르 교실을 연다. 파쿠르라는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스포츠를 보급하는 것이 ‘혁신’의 이름에 걸맞았을까?
이 건물 1층에는 넓은 공간의 ‘창문 카페’가 있다. 카페 한쪽에는 누워서 뒹굴뒹굴하며 쉴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조명이 없어 잘 수도 있다. 카페 한쪽 벽면에는 책들이 자리해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해서 볼 수 있다. 이 카페에서는 특이한 빨대를 쓴다. 플라스틱도 종이도 아니다. 스테인리스 빨대다. 어색하다. 입에 넣고 입술을 다무니 스테인리스 특유의 차가운 느낌이 확 다가선다. “왜 이런 독특한 빨대를 쓰나요?” 이 카페 매니저인 유선 씨에게 물었다. “물론 1회용 물품 사용을 줄이기 위해서”란다. 가능한 한 빨대를 사용하지 않는 ‘스트로리스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주방 한쪽에는 소독해서 말리고 있는 스테인리스 빨대 뭉치가 눈길을 끈다.
▶사회적 기업과 청년 벤처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공간
뒹굴뒹굴하며 책 보고 잘 수도
‘혁신’과 ‘파크’가 만난 지 3년이 지났다. 애초 질병관리본부가 있던 곳인데, 질병관리본부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으로 이전하면서 ‘서울혁신파크’가 됐다. 혁신(革新)은 바꾸는 것이다. 혁(가죽 혁·革) 자는 짐승의 털을 제거한 상형문자다. 아픔이 느껴진다. 피 냄새도 난다. 죽음과 새 생명의 이미지가 교차된다. 목숨을 걸고 하는 혁명도 있다. 반면 ‘파크’는 편안한 이미지다. 쉼터다. 왜 굳이 상반되는 이미지의 단어를 결합해서 이 공간에 이름을 붙였을까?
모두 28개 동이 있는 서울혁신파크에는 청년, 마을공동체, 사회적 경제 등 중간지원조직과 문화·예술·복지·에너지 등 250여 단체, 1300여 명이 입주해 있다. 그들은 교류와 협업을 진행하며 사회혁신을 추구한다고 한다. 다양한 사회혁신 프로젝트 등 실험과 대안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실험을 통해 식량과 에너지 문제, 환경오염 등 사회문제를 해결할 방법들을 찾고 있다. 일반 개인에서부터 중소기업, 사회적 경제 기업, 협동조합, 비정부기구(NGO) 등 참여하는 주체도 다양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혁신적인 실험이 이뤄지고 있을까? 그런 혁신은 우리 실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확인하고 싶었다. 먼저 제작동에 가보았다.
▶각종 공구가 가득찬 서울이노베이션팹랩에서 사물인터넷이 활용된 길냥이 먹이집이 제작되고 있다.
▶시민들에게 목공일을 교육하는 목공실
‘길냥이’ 급식에 사물인터넷 결합
제작동 1층에는 서울이노베이션팹랩이 자리 잡고 있다. 팹랩은 누구나 자신이 상상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보고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 제품을 실현하기 위한 곳. 질병관리본부 시절 방역 창고로 쓰였던 곳을 개조한 것이다. 허술한 외벽과 달리 내부에는 첨단 장비가 자리한다. 시민들의 상상력을 현실로 실현해줄 3D 프린터부터 레이저 가공기, CNC(컴퓨터 수치제어장치) 조각기 등 제작 장비들이 사용자를 기다리고 있다. 첨단 장비뿐 아니라 톱, 드릴, 삼각자 등 제작에 필요한 온갖 공구가 진열돼 있다.
공간 한가운데는 나무로 가로×세로×높이가 30cm 정도의 조그만 상자가 만들어지고 있다. 반려동물의 거주 공간인가? 고양이 급식소라고 한다. 주인 없는 길거리 고양이, 길냥이를 위한 먹이 제공 공간을 만들고 있다. 수집한 폐자재와 원목을 주된 재료로 썼다. 단순히 길냥이들을 위한 급식소라면 이런 혁신 공간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사물인터넷이 결합된다. 이른바 IoT(Internet of Things)라고 부르는, 사물과 인터넷이 연결돼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공간에 길냥이들의 급식소가 끼어든 것이다. 이 첨단 고양이 급식소를 만드는 기업은 탠버린. 예술과 기술의 융합 전문가 그룹을 표방하고 있다. 전통적인 목공예와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만나는 현장이다.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길냥이의 증가와 이들에게 먹이를 주는 ‘캣맘’과 주민들의 갈등을 해소할 단초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13개 대학과 동물보호단체, 각 지역의 고양이 돌봄이 모임과 함께 진행하는 이 프로젝트는 길냥이 개체수 변화를 확인하고, 주민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실시하는 중성화 작업의 실효성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다. 나무로 만든 급식소에 길냥이들이 드나들며 먹이를 먹을 때마다 기록이 전달된다. 급식소에 고양이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센서를 부착해두고, 먹이를 먹으러 찾아오는 고양이의 방문 횟수와 분포 등 객관적인 데이터를 수집한다. 이 회사 대표인 이명엽 씨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17년간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한 엔지니어다. 이 씨는 “단순한 동네 고양이 급식과 쉼터 제공이 아닌 사람과 고양이가 지속가능한 공존을 생각하는 사회공헌 사업이자, 사회혁신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미래청에 있는 은빛기획을 가보자. 어르신들의 자서전 쓰는 것을 도와준다. ‘역사보다 소중한 것이 한 사람의 삶, 기록으로 당신의 박물관을 지어드립니다’라는 구호를 만들었다. 어르신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글쓰기 교실을 열고 있다. 이 정도는 그리 혁신적이지 않다. 이 기업은 ‘조문보’를 제작한다. 조문보(弔問報)는 돌아가신 분을 소개하는 인쇄물. 조문객들에게 나누어준다. 망자의 약력 등을 소개하며 삶을 반추해볼 수 있게 하고, 장례 일정 등을 소개한다. 일반인뿐 아니라 경찰의 물대포 강제진압에 희생당한 백남기 씨와 의료사고로 사망한 신해철 씨, 정치인 노회찬 빈소에 조문보를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인생 노트도 제작한다. 어르신들이 자신의 삶을 쉽게 정리할 수 있게 가족 상황, 교육과 직업, 종교, 재산 상황 등 자세한 항목을 제시한다. 김세라 기획실장은 “고령화 시대에 남은 삶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살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협동조합으로, 어르신 세대의 삶에 대한 진솔한 기록으로 우리 사회의 품격을 높이고 싶다”고 말했다.
같은 건물에 있는 ‘앙코르 브라보노’에 들러본다. ‘인생 후반의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앙코르 커리어 동반자’라는 모토로 은퇴자와 사회적 기업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평생 대기업에서 재무회계를 전문으로 하다 퇴직한 65세의 은퇴자를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사회적 기업과 연결했다. 이 은퇴자는 월 57시간을 이 기업의 회계를 봐주고 60만 원 정도의 수고비를 받는다. 외교부에서 일했던 67세의 은퇴자는 국제 구호를 담당하는 사회적 기업과 연결돼 해외 프로젝트를 도와주고, 대학에서 행정을 담당하다 은퇴한 65세의 은퇴자는 청각장애인 회사에 연결돼 소통을 도와주기도 한다. 신창용 전 이사장은 “사회적 기업의 욕구를 파악해 그런 기능을 가진 시니어와 연결해준다”며 “매년 50여 명의 시니어와 사회적 기업의 매칭을 성사시킨다”고 말한다. 기존의 직업소개소, 헤드헌터 회사와는 다른 기능이다. 새로운 맛이 진하게 풍긴다.
청년들의 창업을 돕는 예비 사회적 기업 ‘한평의 꿈’도 있다. 느낌이 짠하다. 이 회사의 김민순(35) 대표는 “영업 공간 한 평(3.3㎡)이 주는 꿈의 힘이 얼마나 큰지 전파하고 싶어 기업 이름을 ‘한평의 꿈’으로 정했다”고 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김 씨는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비롯해 세계 3대 디자인 대회에서 모두 수상할 정도로 실력 있는 디자이너였다. 한 디자인 회사에 취업했으나 자신의 꿈을 펼치기에는 부족했다. 푸드 트럭을 하며 경험을 쌓았다. 자금력이 약한 청년층과 체력이 약한 노년층을 위한 노점과 푸드 트럭에 대한 컨설팅을 한다. 서울혁신파크의 야외 공간에서 푸드 트럭을 주차하고 실습도 한다.
▶높이가 다른 골대가 두개씩 달려있는 농구 골대
높이 제각각인 특이한 농구 골대
미래청과 마주보고 있는 상상청 1층의 공연장에서는 문화예술 분야의 사회적 기업인 ‘이야기꾼의 책공연’ 단원들이 연극 공연을 연습하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권장할 책의 내용을 연극으로 만들어 전국을 다니며 공연한다. 1년에 200회 정도 공연한다. 1시간 30분 정도 공연하고, 공연 내용을 되새김할 수 있는 책의 내용을 10분 동안 낭독한다. 독특하다. 16명의 단원은 법정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봉사를 한다. 이 회사의 황덕신 대표는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주기 위해 어른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봐도 재미있는 연극을 만들고 있다”며 “한 명의 스타가 독식하는 기존의 연극 단체가 아닌 모두가 평등하게 경제적 혜택을 보는 극단을 만들어가는 실험을 한다”고 말했다.
혁신파크 운동장에는 농구 골대가 있다. 일반 농구대와는 다르다. 알파벳 ‘LIVE’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농구 골대 두 개씩을 달고 있다. 골대의 높이가 제각각이다. 다양하고 창조적인 삶을 표현했다.
김정호 혁신파크입주단체 자치회장은 “다양한 사회적 기업이 사회혁신의 가치를 추구하며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며 “혁신파크라는 한 공간에서 밀도 있게 융합하고 사안에 대해 공동 대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말한다. 서울혁신파크의 이름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글·사진 이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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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