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놈 대장 보거라” 독립운동 여전사

2019.03.04 최신호 보기


l▶윤희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여성이 있다. 여성 의병장 윤희순(1860~1935)은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유교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감을 확연히 드러낸 인물이다. 그는 국내 의병활동 15년, 국외 독립활동 25년 등 40여 년간 민족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였다.
윤희순은 유학자였던 해주 윤씨 윤익상과 덕수 장씨의 장녀로 태어났다. 해주 윤씨 집안의 시조였던 윤재는 고려 후기 판사재감사를 역임했고, 조부 윤기성은 황해도지사를 지냈을 정도로 사회적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그런데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에는 돌봐주던 계모마저 죽고 말았다. 아픈 성장기를 거쳐 고흥 류씨 집안의 유제원과 16세에 혼인을 하면서 시댁 집안과 남편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윤희순의 시댁은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운동을 주도했던 유인석(13도 의군도총재), 의병장 유중교, 의병장 유홍석(시아버지) 등 강직한 국가관으로 무장된 집안이었다. 그로 인해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의 강직함과 변함없는 나라사랑 정신의 실천을 보고 영향을 받았으며 의병활동에 참여하는 여성이 된다.

l▶‘왜놈 대장 보거라’

l▶의병가사

l▶<일생록>가사│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격문 보내 일본 대장에게 경고
1910년 8월, 치욕적인 일제병탄이 있기까지 우리 민족은 항일 민족운동과 국권 회복 운동으로 일관했다. 특히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행에 대해 우리 민족은 전국적인 민중 저항으로 을미의병이 확산되었는데, 윤희순은 이때부터 의병운동 참여 의지를 다진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의 이름으로 ‘왜놈 대장 보거라’라는 격문을 보내 일본 대장에게 경고한 것이다.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놈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 이 마적떼 오랑캐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거라. 이 오랑캐야… 대장놈들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윤희순이 직접 언술한 격문은 일본 대장을 대상으로 강력한 저항과 경고성 내용을 담았는데, 글로써 일본을 겨냥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를 계기로 윤희순은 을미의병에서 의병활동 뒷바라지를 하기 시작했고,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가사를 만들어 일반인과 여성에게 의병활동 참여를 독려하며 우리도 민족의 일원임을 각인시켜주었다. 윤희순은 의병가사와 경고문, 서간문 가사, 일생록 등 16편의 글을 저작했고 구국 의지를 명확히 각인시켰다.

고종 퇴위와 조선 군대 해산 등으로 국권 상실의 위기가 고조되자, 윤희순은 ‘안사람의병단’을 조직한다. 유교 사회에서 여성의 의병항쟁 참여는 이례적인 사례였다. 윤희순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안사람의병단은 강원 춘천지역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화서학파 유생 부인과 선비 아내가 주를 이루었다. 이들도 남성과 같이 무기 및 탄약 제조·공급, 군수품 전달, 의병 연락 활동,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군사훈련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 시대적 분위기 속에 여성의 구국 의지를 확고하게 표출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안사람의병단은 절박한 국가 위기상황에서 여성도 자존감을 가지고 활동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l▶윤희순 의병가사비│독립기념관

<일생록> 남겨 조국 사랑 표본
일본 식민지가 현실화되자 항일운동가들은 해외로 이주해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개척하여 활동을 지속할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윤희순도 의병 가족들과 만주로 이주해 항일 근거지를 개척하고 지속적인 독립활동을 위해 항일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독립운동가들과 남만주 환인현 지역에서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노학당’을 건립해 애국계몽운동을 했다. 노학당은 창립 목적이 “문화 지식이 있고 애국정신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울 수 있는 항일 인재의 양성”이었으며 그 정신은 ‘항일, 애국, 분발, 향상’으로 축약했다. 그곳에서는 1915년 폐교까지 50여 명의 항일 인재를 배출했고, 그들은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노학당의 폐교 이후 윤희순은 애국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운동으로 선회한다. 우선 만주와 연해주, 간도 지역 일대에 흩어진 의병운동가 후손과 문인들을 규합해 ‘조선독립단’을 조직, 의병 정신을 재창출·재통합하여 무장투쟁으로 활동을 확대시켰다. 또한 중국인과 한중연합 투쟁활동에 주력해 항일 연합투쟁을 하는 데 참여했는데, 이때 윤희순의 모습을 기억하는 중국인이 많았다. 윤희순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의병가사를 보급하며 한중연합 투쟁의 필요성을 연설했다.
“…저는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천 번을 넘어지면 만 번을 일어서겠습니다. …우리가 중국에 온 것은 일본놈들한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우리 한·중 두 나라 백성들의 공동 원수입니다. 우리 두 민족은 두 손을 잡고 같이 일본제국주의와 싸웁시다.”
또한 ‘조선독립단’과 20여 명의 친인척으로 구성된 ‘가족 부대’를 결성해 내 가족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을 가르치려면 내가 먼저 실력이 있어야 하고 내 집안부터 실행해야 한다”는 윤희순의 항일 의식은 통신 연락 임무, 모금활동, 정보 수집, 군사훈련 등으로 실천되었다.

총을 든 여성 의병장, <미스터 션샤인> 속 여성 의병장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 시대에 여성이 의병장으로 활약할 수 있었을까? 윤희순은 40년간 독립운동에 투신한 여전사였다. 16세에 시집와서 75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윤희순의 가슴 한쪽에는 오직 ‘조국 독립’의 염원이 있었고, 독립 정신은 후대에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일생을 떠올리며 후손에게 당부하는 <일생록>을 남겨 조국 사랑의 표본을 보여준 여성 윤희순. 그를 통해 한국 여성 독립운동이 의병운동에서 이어졌음을 확인한다.

l심옥주_ 전 부산대 조교수이며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국회인성교육실천포럼 자문위원, 여성독립운동학교 대표다. 제15회 유관순상을 수상했으며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추진위원회 위원, 국가보훈처 사료수집 전문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알리다> <윤희순 평전> <윤희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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