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지 디오스 김치냉장고, 표면장식: 알레산드로 멘디니, 2009년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지난 2월 18일 밀라노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멘디니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외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아마 조르제토 주지아로를 빼고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한국 기업과 한 산업 디자이너는 많지 않을 것이다. 주지아로는 한국 자동차산업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 1970년대 중반에 생산된 포니를 시작으로 1990년대 말 대우의 마티즈까지 한국 자동차산업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여러 기업과 많은 일을 했다.
반면 멘디니는 주로 21세기에 들어와서 한국 기업과 일을 했다. 최근의 프로젝트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아물레토 테이블 조명이 있다. 이 제품은 이탈리아 기업과 한국 기업이 협업하여 생산한다. 나는 그가 한국의 기업들에게 인기 있는 것과 그의 디자인 스타일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지 않나 늘 궁금했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1931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가 산업이 발달한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디자인이 가장 발달한 밀라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의 운명에서 아주 중요한 일일 것이다.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피렌체였다면, 20세기 산업 부흥의 중심지는 밀라노다. 브루넬레스키, 보티첼리,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천재들이 대부분 피렌체 출신이듯, 20세기 중반 이후 이탈리아의 화려한 디자인 전성기를 이끈 지오 폰티, 브루노 무나리, 아킬레 카스틸리오니, 비코 마지스트레티, 그리고 알레산드로 멘디니 등이 모두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라문 아물레토 조명, 디자인:알레산드로 멘디니, 2010년
▶예나 찻주전자, 디자인: 빌헬름 바겐펠트, 1931년
▶글리 스포트(Gli Sport) 찻주전자, 디자인: 지오 폰티, 1930년대
독일식 디자인, 이탈리아식 디자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패전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다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디자인 파워가 큰 몫을 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모두 강력한 디자인 능력을 자랑하는데, 서로 상반된 성향을 갖고 있다. 독일은 흔히 합리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독일의 전설적인 건축·공예·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가 추구했던 것은 합리적 이성을 바탕으로 한 기능적인 디자인이다. 따라서 장식을 불필요한 낭비로 여긴다.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도 처음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저렴하고 좋은 물건, 즉 모더니즘에 기반한 제품을 생산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좌파 정권이 물러나고 중도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그들의 디자인 정책도 변화했다. 이때 현대 이탈리아 건축, 디자인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지오 폰티가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 더욱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의 전환을 주도했다. 그 스타일은 매우 조각적이고 화려하고 감각적인 것이다. 특히 그래픽적인 표면 효과가 아주 중요하다.
바우하우스를 졸업한 빌헬름 바겐펠트가 1931년에 디자인한 예나 찻주전자와 지오 폰티가 1930년대에 디자인한 도자기 찻주전자를 비교해보자. 바겐펠트의 주전자는 오직 기능에 충실하면서 자신을 과시하려는 면이 없다. 하지만 폰티의 주전자는 기능적이지만 동시에 장식적이다. 이탈리아의 디자인에서 장식은 역설적이게도 기능이다. 그런 시각적인 즐거움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무장식의 건조한 모더니즘의 열풍도 그런 전통을 몰아내지 못했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바로 그런 이탈리아적인 전통을 잇는 디자이너다. 그런 성향을 갖는 멘디니가 모더니즘에 저항하는 1970년대의 래디컬 디자인(Radical Design) 운동과 19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주도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알레산드로 M. 디자인: 알레산드로 멘디니, 2003년
▶바실리 의자, 디자인: 알레산드로 멘디니, 1983년
한국 기업, 멘디니 디자인 좋아한 이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일어난 모던 디자인은 전쟁이 끝난 뒤 유럽과 미국에서 활짝 꽃피웠다. 모더니즘은 굉장히 엄격한 양식이다. 기능성과 합리성을 따른다는 것은 많은 금기를 낳는다. 생산하기 쉬워야 하고, 무엇보다 장식을 불필요한 ‘눈길 끌기’라고 경멸한다.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주도한 래디컬 디자인과 포스트모던 디자인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모더니즘이 죄악시한 장식을 다시 재생시킨 것이다.
그가 1983년에 디자인한 ‘바실리’ 의자를 보자. 이것은 바우하우스의 총명한 학생이었던 마르셀 브로이어가 1925년에 디자인한 의자의 구조와 재료는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장식성만 부여한 것이다. 주방기기 회사 알레시를 위해 디자인한 코르크 따개 역시 그의 풍부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그의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구조적이라기보다 그래픽적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제품의 ‘유희성’은 기능성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멘디니가 21세기에 들어와 한국 기업들과 연달아 프로젝트를 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엘지 디오스 김치냉장고다. 21세기 전반기에 한국 가전제품들은 표면에 꽃무늬 같은 장식을 넣는 스타일이 대유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장식 행위는 현대 한국인의 뿌리 깊은 미의식이기도 하다.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화하고 서구식 입식 문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1970년대에도 꽃무늬 장식이 크게 유행했다. 꽃무늬 밥통과 꽃무늬 보온병이 그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은 추상성보다 구상성을 선호한다. 이는 지방에 가면 각 지역의 특산품을 소개하는 거대한 조형물을 볼 때 더욱 잘 드러난다. 예술의전당 음악당 지붕 위에 얹은 부채, 오페라하우스 지붕의 갓도 이런 미의식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경향은 모더니즘의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보다 구체적인 형상의 장식을 선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과 통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한국의 기업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그가 디자인한 제품이 기능성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물레토 조명은 화려하고 그래픽적이지만 기능 또한 우수하다. 아무나 대가가 되는 건 아니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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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