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계절을 배회하다 만난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쿵, 저기 쿵, 자기 인생을 살려면 치러야 할 방황의 총량이 있다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면, 생존을 위한 투쟁밖에 떠오르는 게 없다. 그 공포 앞에 모든 물어야 할 질문은 유예됐다. 내 욕망은 무엇인지, 의미 있는 삶은 뭔지, 좋은 관계란 뭔지.
허5파6의 웹툰 <여중생 A> 속 주인공 미래는 16살 왕따다. 아버지가 집에 오는 날이면 옷장에 숨는다. 어쩌다 걸리면 맞는다. 생활을 책임지는 어머니도 맞는다. 시도 때도 없이 돈 내놓으란다. 그렇게 때리는 아버지에게 1000원만 달라고 손 벌려야 하는 게 중3 미래가 견뎌야 하는 삶이다. 생리대 살 돈도 없기 때문이다. 미래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은 온라인 게임 ‘원더링 랜드’와 학교 도서관뿐이다.
우월감과 자학이 만나 삐걱
왕따와 가정폭력을 다루는 작가의 시선이 독특하다. 극단적인 폭력과 갈등을 전시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폭력은 소리로만 재현된다. 왕따라고 미래가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지는 않는다. 그 따돌림은 좀 더 은밀하다. 차가운 시선이고 냄새난다는 듯 찡그리는 표정이다. 소풍 가기 전날 밤 비가 오길 비는 미래의 웅크린 등짝이 부각된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사건을 나열하는 대신 작가는 사랑, 친구 사이 역학 관계를 묘사한다. 그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상처의 여파와 치유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네 이야기이자 내 이야기 같아 “울컥하게 만드는 웹툰”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2016년에 ‘올해의 우리 만화상’을 받고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중3이 아니어도 누구나 겪었거나 겪고 있는 고통들이다. 걸핏하면 미래를 도둑으로 몰고 조롱하는 노란이는 반장 백합의 절친이다. 백합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게 노란의 욕망이다. 부잣집에 공부 잘하고 예쁜 백합의 관심을 갈망한다. 그런데 백합이 이 왕따 같은 미래한테 자꾸 다가간다. 노란은 미래가 싫을 수밖에 없다. ‘엄친딸’ 백합은 우연히 본 미래의 글솜씨에 반했다. 백합의 꿈도 작가다. 미래에게 다가가보는데 곁을 안 내준다. 미래는 ‘나 같은 게 감히’ 하며 백합을 밀어내고, 백합은 ‘너 같은 게 감히’ 밀어낸다고 느낀다. 백합이 느끼는 우월감과 미래의 자학이 만나 이 둘 관계는 삐걱댄다.
백합의 삶도 녹록지 않다. 아버지는 명문대에 들어가야 글 쓰는 걸 허락하겠다고 하고, 어머니는 여자는 자고로 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중생 A>의 인물들은 주·조연 가릴 것 없이 저마다 상처투성이다. 작가가 공들인 것은 사건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사건으로 성장하는 인물의 내면 풍경이다.
왕따가 아닌 아이들도 ‘관계의 공포’로 괴롭다. 소외될까 굴욕을 참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인지 비굴인지 헷갈릴 지경까지 이른다. 게임 친구 재희는 일진의 일원으로 암묵적인 보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폭력에 눈감았다. 이는 견딜 수 없는 자괴감으로 쌓인다.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은 자학
그림 잘 그리는 유진에게 ‘원더링 랜드’ 이벤트에 낼 그림을 그려달라 부탁하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댄 날, 미래는 이렇게 말한다. “나 지금 엄청 어려운 스테이지를 깨고 온 느낌이야.” 미래가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은 노란이도 백합이도 아니다. ‘나 같은 건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라는 끝없는 자학이다. 그 끝에서 미래는 자살을 결심하는데, 세상이 모두 등 돌릴 듯한 순간에도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있다. 자신이 걸어 잠근 철옹성 앞에서 다른 이들도 상처받고 있었다는 걸 미래는 깨쳐간다.
그 미래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과장 한 톨 보태지 않을 만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다. 미래는 죽을힘을 다해 친구에게 말을 걸고,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다. 글을 쓰며 다른 친구들에게도 상처가 있다는 걸, 다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봐줄 한 사람을 애타게 찾는다는 걸 알게 된다. “보잘것없는 경계심으로 운명을 짚어보려 했던 것이, 인간 능력 밖의 오만한 가늠이었는지 모른다.”
요즘 청소년 문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SNS에 잘못 올린 사진 한 장 탓에 인기 있는 일진이 왕따의 수렁에 빠지는 과정, 그 학생의 사생활을 실시간으로 올려 관심을 받아보려는 다른 친구의 욕망, 그 욕망 안에 똬리를 튼 분노가 그려진다. 게임 친구가 오프라인 속 끈끈한 연대로 발전하기도 한다. 매체가 손 편지든 이메일이든 페이스북이든 인물의 감정선을 세대 차 없이 공감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 모두에게 관계는 지옥이자 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관계는 지옥이자 천국
성숙은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는 과정인지 모른다. <여중생 A>에서 미래는 상처에 갇히지 않고 상처로 다리를 놓는 그 어려운 작업을 해낸다. 글을 쓰며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간다. 중학교를 졸업하며 미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아픈 것만 생각하지. 처음부터 진실하게 다가갔다면 우리 사이가 어땠을까. 오히려 애들한테 선을 긋고 계급을 나눈 건 나였던 거야.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해준 사람들.” 40대인 나보다 16살 미래가 더 자란 인간이라고 느꼈다. 미래는 질문을 유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답했으니까. 시인 루미가 썼듯 “빛은 상처를 통해 들어온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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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