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고 지르고 날고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2019.02.27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서울 액션스쿨 회원들이 매트를 깔아놓고 공중 회전 낙법을 연습하고 있다.

오른 주먹을 지르고 고개를 숙인다. 상대방의 주먹이 ‘휭’ 하고 귓전을 스친다. 지체 없이 왼손을 내지른다. 상대방도 허리를 구부리며 피한다. 이어서 상대방의 날카로운 오른발 후려치기가 안면으로 날아온다. 인상을 쓰며 마치 상대의 발바닥에 일격을 당한 것처럼 뒤로 ‘붕’ 날아 떨어진다. 아직은 어색하다.
이번엔 세 명이 손발을 맞춘다. 두 명이 합을 겨루다가 한 명이 나가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지체 없이, 그리고 깊숙하게 오른 주먹을 날리며 파고들어야 한다. 마치 퍼즐이 빈틈없이 맞춰지듯 오고 가는 주먹과 발길질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진짜보다 격렬하게 이어져야 한다. 벌써 몇 주째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스턴트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는 평소 피땀나는 고된 연습의 결과이다. 힘차게 벽을 딛고 뛰어올라 발차는 연습을 하고 있다.

;▶와이어에 의지해 공중에 매달려 화려한 몸동작을 연습하는 스턴트 배우

자기와 비슷한 톱배우 있으면 행운
“기본이 아직 부족하잖아. 발차기가 크고 화려하게 구사돼야 해. 태권도 경기에 출전한 것이 아니잖아. 너무 빠르게 지르는 것이 아니야. 긴박감이 묻어나면서 큰 동작을 해야 해. 다시 발차기부터 연습해.” 선배의 호령이다.
마치 복싱 코치가 미트를 잡아주듯 선배가 가죽으로 만든 발차기 목표물을 두 손에 들고 선다. 그 가죽 목표물을 발로 차고, 공격을 피한 뒤 공중 뒤돌려차기를 해야 한다. 중심 잡기가 어렵다. 정확한 자세로 목표물을 가격해야 한다. 계속되는 반복만이 해답이다.
지난 2월 15일,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자리한 서울액션스쿨에서는 스턴트 배우들의 일상적인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스턴트 배우는 어려운 액션 연기를 대신해주는 배우. 영화산업이 발달하며 스턴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지망생도 늘고 있다.
정두홍(53) 감독이 20년 전에 만든 서울액션스쿨은 전 세계 유일한 스턴트 교육기관이다. 할리우드 영화 본고장인 미국에도 이런 스턴트 전문 교육기관이 없다. 게다가 교육비는 무료.
어렵고 힘든 직업이다. 위험하다. 목숨까지 내놓고 와이어 줄에 매달리고,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려야 한다. 달리는 차에 매달려야 하고, 한강 다리에서 몸을 날린다. 하지만 젊은이들을 유혹한다.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노남석(40) 무술감독은 17년 경력의 베테랑 스턴트맨이다. 흔히 말하는 ‘잘나가는 스턴트맨’이다. 그는 지난 10년간 영화배우 하정우의 전문 액션 대역배우를 했다. 2009년 영화 <국가대표>에서 처음 만난 이후 2010년 <황해>, 2012년 <범죄와의 전쟁>, 2013년 <베를린>, 2014년 <군도>, 2015년 <암살>, 2017년 <신과 함께>, 2018년 <더 벙커>까지 하정우를 대표하는 작품의 액션 대역을 모두 그가 맡았다. 184cm의 키가 하정우와 같고, 체격 조건이 비슷하다. 전체적인 이미지도 닮았다. 대역배우에게 자신과 비슷한 톱스타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지난해 서울액션스쿨에 입학한 막내 스턴트 배우들이 액션 연기를 연습하고 있다.

;▶스턴트 배우들의 위험한 연기는 정밀하고 완벽한 안전 조처를 기반으로 시작된다. 와이어 연기를 하기 전 무술 감독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

처음엔 하루 1만 번씩 발차기만
“어릴 때부터 매달리고 뛰어내리는 등의 위험한 놀이를 유난히 좋아했어요. 대학에서는 자동차 관련 공부를 했지만 졸업을 앞두고 경찰 시험을 준비했어요. 쉽지 않았어요. 과연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세 글자가 있었어요. 바로 ‘스턴트’라는 단어였어요.”
어릴 때부터 합기도를 해서 몸 쓰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스턴트’를 치니 정두홍 감독과 서울액션스쿨이 떴다. 곧장 짐을 싸서 대구에서 서울로 왔다. 매일 액션스쿨에 나가 연습을 했다. 선배들은 첫날 ‘거울 보면서 발차기 1000개를 해!’ 딱 한마디였다. 발차기 1000개를 하다가 5000개로 늘렸다. 1만 개까지 발차기만 반복했다. 오기로 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액션스쿨에 무작정 방문해 스턴트를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노 감독을 받아준 선배가 <국가대표> 무술감독을 맡고 있었다. 노 감독이 스키를 타는 것을 알고 있던 선배는 그에게 하정우의 대역을 부탁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제는 하정우 배우와는 형, 동생 사이가 됐다. 수입도 남부럽지 않다.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적도 있었다.
“몇 년 전 달리던 차에서 뛰어내리는 연기를 하다 뇌에 큰 부상을 입었어요. 뇌출혈로 3주 병원에 입원했어요. 사실 부상당했을 때의 기억이 안 나요. 생명까지 위험한 정도였지요. 아내가 큰 걱정을 했어요.”
혹시 대역배우의 아쉬움은 없을까? 노 감독은 대답한다. “대중에게 굳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고, 주목을 받고 싶지도 않아요. 대역 액션배우로서의 자존감이 크니까요.”
액션스쿨의 운동은 점심시간에 잠시 쉰 뒤 다시 시작됐다. 이제는 좀 더 어려운 동작이다. 벽을 향해 달리다 공중으로 뛰어 한 발로 벽을 딛고 다른 한 발로 목표물을 차는 것. 동작이 크고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영화 장면 가운데 주인공이 골목길에서 상대방과 맞붙었을 때 나오는 동작이다. 공중에서 정확하게 목표물을 차고 착지를 잘해야 한다.

;▶서울 액션 스쿨의 벽에는 그동안 회원들이 출연해서 완성된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다.

;▶서울 액션스쿨 실내 체육관 한쪽에 있는 회원들의 활동 현황판.  

선배 스턴트 배우들도 운영 찬조금
현재 활동 중인 한국의 스턴트맨과 스턴트우먼은 모두 300여 명. 이들은 영화는 물론 각종 광고 촬영, 무대 공연 등에서 활약을 한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고, 대부분 그때그때 출연료를 받는다. 동작이 좋은 스턴트 배우는 대기업 연봉이 부럽지 않다.
액션스쿨 한쪽에는 서울액션스쿨 소속 배우 78명의 이름과 현재 활동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현황판이 있다. 그날그날 어떤 스턴트 연기와 공연 등에 출연하는지가 개인별로 적혀 있다. <남산의 부장들> <킹덤> <아스달 연대기> <결백> <타짜 3> <동네변호사 2> 등 현재 촬영 중인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 중인 스턴트 배우의 명단을 볼 수 있다. 간간이 붉은 글씨로 ‘손목’ ‘쇄골’ 등 부상 내역을 적은 명단도 있다. 10여 명. 전체의 10%를 넘는다.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만큼 스턴트라는 직업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다.
한 해 한 기수에 입학하는 스턴트 동기는 60여 명. 이번이 23기다. 두 분류로 나뉜다. 본격 스턴트 배우 지망생에는 나이 제한이 있다. 18~27살. 또 한 부류는 나이 제한이 없는 액션 배우 지망생. 6개월간 주 5일, 하루 4시간씩 액션을 배운다. 단순 액션뿐 아니라 와이어, 레펠 등 공중에서 하는 연기도 배운다. 승마와 스쿠버는 외부 교육기관에서 익힌다. 매 기수의 졸업생은 입학생의 절반도 안 된다. 힘들어 도중에 절반이 탈락한다. 액션스쿨의 교육 강도는 특수부대 훈련 강도에 못지않다고 한다.
그런데 왜 교육비는 무료일까? 정두홍 감독에게 물어보았다. 정 감독은 현재 한국 스턴트의 대부이자 간판 액션배우. <짝패> <아라한 장풍대작전> <피도 눈물도 없이> <장군의 아들> <태극기 휘날리며> 등에서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제가 처음 스턴트 배우를 시작할 때는 어디에도 스턴트 연기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없었어요. 무술 유단자라고 하면 곧바로 연기 현장에 투입시켰어요. 당연히 부상이 속출했지요. 심지어 목숨을 잃는 동료들도 봐야 했어요. 그런 후배들에게 안전한 스턴트 배우의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또 하나의 이유는 저의 무술 스승인 이각수 선생님에 대한 보답의 길입니다. 제가 돈이 없어 학원에도 못 갈 때 도움을 주셨고, 대학 등록금도 대신 내주셨어요.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때 이종격투기 라이트헤비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이각수 명지대 무예과 교수는 현재 세계종합격투기연맹 회장이기도 하다. 몇 년 전 길거리에서 칼을 휘두르며 묻지마 폭행을 저지르던 남자를 맨손으로 제압해 뉴스에 등장하기도 했다. 현재 서울액션스쿨의 운영비는 정 감독을 비롯한 선배 스턴트 배우들의 찬조금으로 충당한다고 한다.

“초기에는 별명이 으악새”
이제는 와이어 액션 연습이다. 높이 20m 천장에서 내려온 로프에 몸을 연결한다. 도르래로 연결된 줄을 여러 명이 당기면 몸은 공중으로 뜬다. 공중에서 공중돌기를 하며 손과 발을 정확하게 움직여야 한다. 스태프와 연기자, 그리고 무술감독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담력도 필요하다. 아무리 안전줄이 있어도 용기가 없으면 할 수가 없다.
짐을 옮길 때 쓰는 바퀴 달린 캐리어가 등장한다. 캐리어에 줄을 묶어 스태프 여러 명이 당기면 캐리어 위에 탄 스턴트 배우는 빠르게 이동하며 달려드는 상대방을 해치우는 연기 연습이다. 무술감독은 바로 뒤에서 따라가며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는다. 동영상 콘티를 미리 만들면 실제 촬영 현장에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초기에는 스턴트맨들의 별명이 ‘으악새’였어요. 스턴트맨은 주인공에게 얻어맞는 단역을 주로 맡았는데, 맞으면 ‘으악’ 하고 소리치며 쓰러진다고 해서 스스로를 ‘으악새’라 부르며 자조하기도 했죠.” 후배들의 연기 연습을 바라보며 50대의 한 무술감독이 ‘옛이야기’를 해준다.
오후 4시, 고된 하루 일과가 끝났다. 막내들은 분주히 실내를 정리한다. 즐거운 실내 축구 시간이다. 뒤풀이 경비가 상금으로 걸렸다.

파주│글·사진 이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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