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지금이 문제

2019.01.28 공감 최신호 보기


디자인  ▶2017년작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는 한글 ‘행운’이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이 등장한다.

특정 연대를 상상한 공상과학 영화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이 영화는 1968년에 개봉했고, 그로부터 33년 뒤인 2001년이라는 미래를 상상했다. 지금은 그 미래로부터 18년이 더 흘러 2019년이 되었다. 지금 보면 이 영화가 상상한 2001년은 너무 앞서갔다는 걸 알게 된다. 영화는 2001년에 우주를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했지만, 21세기 들어와 우주는커녕 달 여행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걸 보면 미래에 대한 상상은 종종 과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자인  ▶982년작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의 LA를 그리는데, 그 도시는 온통 일본적인 이미지로 가득하다. 일본 문자로 디자인된 네온 간판들이 뒤덮인 거리의 모습이다.

2019년 올해는 1982년에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가 상상한 미래다. 이 영화는 2019년의 LA를 무대로 펼쳐진다. 날씨가 가장 좋은 곳 중의 하나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LA가 이 영화에서는 산성비가 내리고 어떤 나쁜 물질로 오염됐는지 공기가 뿌연 우울한 도시로 묘사된다. 하지만 올해의 LA는 여전히 파란 하늘과 따뜻한 날씨를 가진 살기 좋은 곳이다. 영화에서는 복제 인간이 말썽을 일으키고 그들을 잡는 경찰이 등장한다. 정말 이런 시대가 오려면 몇 년이 걸릴까?

어쩌면 이는 당연하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미 경험한 것을 토대로 그려보기 때문에 사람이 상상한 미래란 결국 바로 지금의 현상에 약간 살을 덧붙인 것일 뿐이다. 특히 사물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보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2001년에 실현될 것이라고 예측한 우주 비행선의 내부가 나온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사물이 나온다. 승무원이 사용하는 의자와 테이블은 어떤가? 이것은 ‘액션 오피스’라는 대량생산 가구다. 액션 오피스는 미국의 가구회사인 허먼 밀러가 1964년부터 생산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굉장히 혁신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효율적인 사무 가구가 없었다. 투박한 철제 가구나 무겁고 칙칙한 나무 가구가 사무실을 지배했다. 그런 시대에 액션 오피스는 기능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세련되었다. 액션 오피스는 모던 오피스 가구의 원조다. 영화 제작자는 미래를 상상하며 새로운 가구를 디자인하기보다 이미 시장에 나온 가구 중 가장 미래적인 것을 선택했다.

디자인  ▶1968년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우주선 승무원의 테이블과 의자는 1964년부터 생산된 허먼 밀러의 액션 오피스 가구다.

1964년에 생산된 1세대 액션 오피스는 사실 진정한 현대식 사무 가구로서는 실패작이었다(1968년에 생산된 액션 오피스 2부터 대중화되었다). 왜냐하면 너무 고급이고 비싸서 대중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된 지 4년 뒤에 개봉한 영화에 나왔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처음 보는 것이고 미래적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영화 속 승무원의 포크와 나이프는 1957년에 생산된 것이지만, 디자인이 전위적이어서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시각적인 대상만 그 시대의 것일까?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욕망과 고민 역시 사실은 당대의 욕망과 고민을 반영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우주여행을 소재로 하지만 부상하는 컴퓨터와 인공지능, 기술 발전에 대한 1960년대식 불안을 반영하기도 한다. 2019년을 상상한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에도 어떤 불안이 반영되었다. 이 영화에는 유독 일본 소재가 많이 나온다. 하늘을 나는 비행선에서는 일본 게이샤 모델이 등장해 일본 말로 광고를 한다. 도시 곳곳에 일본 문자로 디자인된 네온 간판이 보인다. 주인공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젓가락을 사용해 국수를 먹는다. 이토록 많은 일본 이미지는 일본의 급격한 경제성장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다. 1979년 출시된 소니 워크맨은 1980년대 초반 전 세계를 강타했다. 소니를 비롯한 일본의 전자 기업들이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을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 일본의 가파른 경제성장이 지속되면 2019년 LA는 일본 간판으로 뒤덮이리라고 상상한 것이다. 그렇게 상상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당시 일본의 경제는 무시무시했다.

디자인  ▶덴마크의 전설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아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포크와 나이프, 수저 세트는 그 전위적인 디자인 덕분에 2001년 우주선의 승무원들이 사용할 도구로 선택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1957년에 생산되었다.

한편 2년 전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 2049>에는 한국어 간판이 나온다. 이는 그동안 도약한 한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믿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에서 일본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던 것과 달리 2017년작에서 나타난 한국의 이미지는 아주 단편적이고 미약하다. 이는 2017년의 미국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그리 위협적인 나라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일 게다. 분명한 건 이 영화가 그리는 2049년은 20여 년 뒤 실제 2049년과 전혀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디자인  ▶조지 넬슨이 디자인한 액션 오피스 가구. 당시 미국 사무실의 기준으로 보면 지나칠 정도로 모던하고 진보적이며 세련되었다.

과거를 묘사한 영화 역시 그 시각적인 면은 현대를 반영한다. 고증을 못해서라기보다 사람의 욕망이 그렇게 만든다. 요즘 만들어지는 조선시대 사극영화의 의상, 가구, 건물 등은 지나칠 정도로 럭셔리하다. 이는 마치 최근 경복궁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여 한복과 비슷하다. 사치스러운 삶에 대한 욕망이 그 정도로 화려하지 않았던 조선시대를 다루는 영화에도 반영된 것이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결국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와 미래 모두를 지배한다는 뜻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바로 ‘지금’ 사람들의 욕망과 고민이 고증해야 하는 과거, 상상하는 미래 모두에 나타난다. 결국 지금이 문제다.

디자인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 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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