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1일 서울 종로구 서촌길에 있는 ‘옥인오락실’에서 20대 커플 최미림 씨와 허문규 씨가 ‘퍼즐보글’ 게임을 하고 있다.│곽윤섭 기자
▶서울 명동 빈티지카페 ‘케이코쇼텐’에 있는 빈티지컵 ‘파이어킹’│곽윤섭 기자
필름 카메라, 개화기풍 원피스와 양복, 자개장이 놓여 있는 카페, 1990년대 초반 유행했던 장필순, 듀스, 현진영, 김현철의 음악을 트는 클럽, 초록색 점박이 플라스틱 접시에 떡볶이와 튀김을 담아주는 분식집….
누군가에겐 ‘촌스러운’ 문화일 수 있지만 요즘 1020세대는 이런 복고 문화에 ‘힙하다’는 평가를 한다. 영어 ‘Hip’에 한국어 ‘~하다’를 붙인 ‘힙하다’는 표현은 ‘최신 유행이나 세상 물정에 밝다’ ‘개성과 멋, 새로움이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지나간 옛것이 1020세대에게 최신 유행이 되는 현상을 일컫는 말도 등장했다. ‘새롭다’는 뜻의 뉴(New)와 ‘복고’라는 의미의 레트로(Retro)를 합친 말, ‘뉴트로’(New-tro)다. 기성세대가 젊은 시절 유행한 문화를 다시 떠올리고 소비하는 현상을 레트로라 한다면, 뉴트로는 과거 문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가 과거의 것에 흥미를 느끼며 새로운 문화로 소비하는 현상을 뜻한다.
작은 소품 하나부터 패션, 공간, 음악 등 1020세대가 ‘옛것’에 반응하는 이유는 뭘까. 2019년 ‘뉴트로족’을 만나봤다.
아날로그적 풍경 연출, 힙하게 촬영
안경알 두 개를 이어주는 줄이 두 개여서 ‘투 브리지 안경’으로 불리는 비행사 안경, 항공기 조종사들이 주로 입던 플라이트 재킷. 지난 1월 5일 만난 김세민(27·사진) 씨의 패션 아이템이다. “이 옷은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입었던 옷의 복사판으로, 1976년에 생산됐어요. 안경은 1980년대에 나온 것이고요.”
1993년생인 그는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1980~1990년대 문화에 관심이 매우 많다. ‘복고 마니아’를 넘어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 문화를 주제로 사진·영상 창작 활동을 하는 이른바 ‘뉴트로 창작자’다.
지난해 그는 패션에 관심 많은 친구들과 ‘고고88’이라는 팀을 만들었다. 1980~1990년대를 주제로 아날로그 느낌 가득한 사진과 영상을 기획·촬영하는 팀이다.
첫 프로젝트 주제는 ‘1980년대 보도기자단’. 헐렁한 단색 양복에 투 브리지 안경, 2대8 가르마. 김씨를 포함한 네 명은 80년대 기자로 변신해 서울 을지다방, 명동 거리, 명동성당, 광화문광장, 경복궁을 돌아다니며 취재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감성 작렬!” “이분들 대단히 힙하네요.” SNS 속 사람들 반응은 뜨거웠다.
개그 프로그램이나 영화 속에서 종종 우스꽝스럽게 그려온 1980년대를 고고88은 진지하게 고증해 사진과 영상으로 담고 SNS 채널을 통해 소개한다. 보도기자단 콘셉트는 영화 <택시운전사> 속 시위 진압 장면에 등장했던 취재기자의 모습에서 착안한 것. 기존 광고 사진이나 영화 장면 등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고 고고88만의 기획을 하느라 사전 작업부터 공이 많이 들어간다.
“당시 신문을 보면 시계 브랜드 중 세이코, 오메가 유행 현상이 화제였어요. 그중에서도 사각 테두리 시계가 유행했기에 그런 시계를 차고 촬영했습니다. 옛날 신문은 ‘중고나라’에서 판매하는 분이 있더군요. ‘보도’가 적힌 완장은 제가 직접 도안을 그렸습니다.”
▶‘고고88’의 ‘1980 보도사진단’ 프로젝트│<고고88> 제공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가 창구
사람들은 이들의 사진을 보고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해 포토샵 등으로 보정했을 거라고 오해한다. 촬영에 쓴 카메라는 필름 카메라다. 진짜 옛날을 보여주고 싶어 유통기한이 10년 이상 지난 필름을 사용해 찍었다.
‘디지털 세대’라고 불리는 20대지만 김씨의 재킷 주머니에는 클래식 필름 카메라인 롤라이(Rollei)가 늘 있다. “필름 카메라는 찍는 사람이 모든 걸 조작할 수 있잖아요. 스스로 조작하고 통제한 것에 확신이 있어야 좋은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 그게 매력이죠.”
옛날 문화를 그만의 해석을 더해 재현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제가 모르던 것, 새로운 것이니까 일단 재미있다”고 했다. “기획을 하려면 옛날 문화를 천천히, 깊이 연구해야 하잖아요. 그것도 재미있습니다. 저는 뭐든지 천천히 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이 자꾸 빨리빨리 하라고 시키더라고요.(웃음) 저희 팀요? 모두들 빨리 앞서가라고 하는데 저희는 반대로 ‘남들보다 앞서서 뒤처지는 팀’입니다.”
고고88의 사진이 SNS 채널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등은 과거를 경험해보지 못한 1020세대에게 복고 감성을 소개하고, 이를 소비하게 하는 창구가 되고 있다. 지난 1월 14일 기준, ‘뉴트로’에 해시태그를 붙여 인스타그램에 검색하자 약 5000개 게시물이 검색됐다. 주로 20대로 보이는 이들이 복고 감성이 담긴 공간에서 찍은 사진이나 자개장, 빈티지 컵 등 소품 컷을 올렸다. 레트로(16만 2000개), 빈티지(200만 개) 단어에 해시태그를 붙여 검색해도 마찬가지다.
주인도 마니아, 가게마다 개성 활짝
지난 1월 11일. 서울 지하철 4호선 명동역 1번 출구 근처 골목으로 들어서자 ‘케이코쇼텐’(@keiko_shoten)이라는 카페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 여성 둘이 보였다. 각각 1990년대 유행하던 이른바 ‘떡볶이 단추 코트’를 입은 김소진(24) 씨와 ‘핫핑크 페이크 퍼’를 입은 이여랑(19) 씨. 두 사람은 “명동은 대형 브랜드 옷 가게와 백화점만 있어 잘 안 왔는데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이곳에 빈티지한 카페 겸 상점이 있다고 해서 와봤다”며 “가게 건물부터 뭔가 예스럽고 멋져서 빨리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싶었다”고 했다.
케이코쇼텐은 지난 2017년에 문을 연 카페로 빈티지 마니아인 김윤지·민재기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내부에 들어서면 1920년대 인디언들이 입던 조끼와 원피스를 비롯해 1970년대 앨범 재킷, 1940년대부터 미국에서 많이 쓰던 내열유리 제품인 ‘파이어킹’ 접시와 찻잔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마치 50년 전 미국의 한 카페로 시간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이다.
자매 곽미선(26)·곽미옥(29) 씨 역시 인스타그램에서 이 공간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휴가까지 쓰고 찾아왔다. 동생 곽미선 씨는 “이태원에 자주 다녔는데 그곳은 비슷비슷하게 생긴 카페만 줄지어 생겨 개성이 없다. 여긴 주인 손길과 콘셉트, 스토리가 보여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서촌 길을 걷다 보면 ‘너는 오락이 땡긴다’는 글귀의 입간판이 보인다. 지역 문화 스토리텔러이자 여행 칼럼니스트인 설재우 씨가 20년 넘게 운영하다 2011년에 문을 닫은 용오락실을 그리워하며 주민 크라우드 펀딩으로 되살려낸 공간, ‘옥인오락실’이다. 이곳에는 ‘보글보글’ ‘테트리스’ 등 옛날 아케이드 게임기(지폐나 동전 등을 넣고 게임할 수 있는 기계)가 가득하다. 이곳을 찾는 이들 중엔 이런 게임을 처음 접해보는 1020세대도 많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헤어숍 ‘상수동화’에 가면 자개 콘셉트 인테리어를 만나볼 수 있다.│상수동화 인스타그램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컬래버레이션”
지난 1월 11일 저녁 옥인오락실에서 만난 최미림(23) 씨와 허문규(27) 씨도 20대였다. 경기도 용인시에서 왔다는 이 커플은 “데이트 장소를 찾다 인스타그램에서 ‘옛날 느낌이 나는 곳’으로 소개돼 놀러 와봤다”고 했다. 허씨는 “요즘 우리 세대에게는 이렇게 예스러운 곳을 찾아다니고 사진 찍어 SNS에 올리는 게 일종의 유행”이라며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미스터 션샤인> 등 과거 문화를 다룬 드라마가 인기를 얻은 것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옥인오락실 설재우 씨는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향수를 주는 것뿐 아니라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클래식을 경험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날로그 오락실이 주는 느낌들이 있잖아요. 손맛이 느껴지고, 왁자지껄함이 있죠. 그걸 경험 안 해본 세대가 이곳을 찾는 걸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물성에 대한 본능, 아날로그로 향하는 감수성 같은 게 있나 봅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인기도 클래식, 오리진의 힘은 세대를 넘나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줬잖아요.”
서울 마포구 상수동. 20대 트렌드를 선도하는 ‘홍대앞’에 자개장과 옛날 전화기 등 소품이 놓인 복고 콘셉트의 미용실이 등장했다. 1년 전 문을 연 ‘상수동화’(@sangsudonghwa). 장영진 원장은 “20대들은 이곳에 들어와 ‘우아!’라고 감탄사를 내뱉는다”고 했다.
▶레트로한 과거의 음악을 즐겨 듣고 디제잉 작업도 하는 디제이 브라더펑크(Brotherfunk)│브라더펑크 제공
“아버지와 술한잔 할 얘깃거리 생겨”
으레 현대적이어야 할 것 같은 헤어숍을 복고풍으로 꾸민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복고풍을 좋아하기도 하고, 일본 등 해외에서 100년 넘은 자신들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알리려는 이들을 보며 ‘왜 우리는 해외에서 유행하는 것들만 따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며 “우리 옛 아이템을 배치해 그 편안한 느낌과 가치를 전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고객들이 옛것이 주는 편안함 속에서 서비스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도 담겨 있어요. 과거를 그대로 가져오는 건 ‘레트로’죠. 레트로한 공간에서 가장 트렌디하다는 헤어 연출을 한다는 점에서 여긴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컬래버레이션 공간이죠. 이런 게 ‘뉴트로’ 아닐까요.”
뉴트로 현상은 음악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각각 홍대, 을지로 음악 공간인 ‘채널 1969’와 ‘감각의 제국’에서는 과거 유행했던 디스코, 시티팝 등이 흘러나온다. 1980년대 복장으로 디스코 음악을 전문으로 트는 디제이 ‘타이거 디스코’는 20대들 사이에서 ‘존재 자체가 ‘레트로’인 힙함의 결정체’로 통하며 인기를 얻고 있다.
브라더펑크(Brotherfunk)라는 이름으로 디제이 활동을 하는 안광영(28) 씨도 1970년대 이전 올드 스쿨(1974년부터 1980년 후반 시기에 녹음된 힙합 음악) 힙합부터 누디스코(Nu-Disco·디스코를 계승해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 장르) 등 영역 구분 없이 레트로 스타일의 음악 활동을 한다. 좋아하는 뮤지션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 김현철. 그가 태어나기 전 또는 태어난 직후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들이다.
음악은 물론이고 레트로 패션을 즐기는 그는 “옛날 음악을 들으면서 50대 후반 아버지와 얘기할 거리가 많아졌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이태원 LP 판매점에 간 적이 있는데 내가 즐겨 듣는 음악 중 아버지가 대학 시절 좋아하셨던 곡이 많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와 술 한잔하며 나눌 얘기가 생겨 좋더라”고 했다.
안씨가 이렇게 옛날 음악과 패션을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2010년대 문화는 너무 화려하고 자극적이고 버거운 감이 있다”며 “과거 문화들은 그만의 ‘심심하다’는 느낌을 줘 좋다”고 했다. “음식으로 치면 2010년대 초반에 젊은이들이 대량생산한 ‘단짠단짠’(달고 짠) 맛에 빠졌다가 2010년대 후반 들어와서 평양냉면이나 메뉴가 특화된 노포 음식을 찾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네요. 옛날 문화에는 각자 세분화된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포인트가 많아요. 그동안엔 대형 미디어가 그야말로 ‘매스하게’ 문화를 장악했잖아요. 그렇게 자극적이고 큰 규모의 문화에 지친 세대에게 ‘옛것’은 ‘신선한 휴식’ 아닐까요.”
김청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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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