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 단 두 글자 불멸의 혁명

2019.01.21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조선, 대한제국으로 이어진 봉건 왕조는 외세 침략자에 의해 타살되었다. 한국인은 이를 추모하는 과정, 곧 3·1 만세투쟁을 통해 이방 지배세력에 저항했고 여기서 새로운 주체를 성립해냈다. 그 중심에 ‘만세’라는 지렛대가 있었다. 만세란 글자 그대로 만 년, 또는 불멸을 담고 있는 말이다.
3·1운동 당시 한국인은 ‘만세’를 세 가지 의미로 확장했다. 우선 ‘만세’는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에 쓰기 시작한 말이다. 이전까지는 ‘천세’를 사용했다. 따라서 이 말을 외치는 것만으로도 왕을 기리는 일이었다. 이 소멸한 왕조의 국장 현장에서 거대 대중이 만세를 외친 건 왕조의 죽음과 국권 멸실에 대한 불인정 투쟁이었다.

학생과 여성, 새로운 인간 군상
일제 총독부 권력은 한국을 강점한 34년 11개월 보름 동안 단 한 번도 옥외 집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인이 국상이라는 장례 기간과 공간을 투쟁 현장으로 삼은 건 불가피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후 첫 집회였다. 물론 ‘불법’이었다. 이 대중 행위는 한국인이 집회와 시위, 표현의 자유를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자 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에 이 조항이 기본권으로 들어간 진정한 기원이 여기 있다.

추모, 독립, 표현의 자유를 전개한 만세투쟁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난 새로운 인간 군상은 두 가지였다. 무엇보다 학생 대중의 전면 부상이다. 근대교육 혜택을 받은 이들이 민족사에서 새로운 주체가 된 건 탑골공원 만세와 연관되어 있다. 그날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식 후 유혈 사태를 우려한 끝에 대중 집회가 약속된 탑골공원으로 나오지 않자 학생들은 스스로 이 국면을 장악하고 투쟁을 전개해나가야 했다. 불특정 다수 대중에 의한 주체 형성이라는 점에서 이는 장차 우리 사회가 대중 민주체제로 가야 한다는 걸 노정한 전환적 대사건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학생 대중이 독립과 민주화운동의 핵심이 된 건 우연이 아니다.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4월 혁명, 6월 시민항쟁 등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이를 잘 말해준다.

3·1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역사의 중심에 다투어 진입한 건 여성이었다. 이는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여학생’이란 말은 당대 통념상 ‘여성’ ‘학생’이라는 유보된 존재였다. ‘남의 유관순, 북의 동풍신’은 열여덟, 열여섯 살이었다. 이들이 더 일찍부터 사회운동을 해왔거나, 달리 명성이 있다거나 세력이 있거나 할 리 없었다. 식민지 억압을 돌파하는 치열한 전선에서 이 평범한 여성들은 3·1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남성에 비해 명백히 저평가된 여성 독립운동가 300여 명 가운데 가장 많은 직업군은 기생으로 50명을 헤아린다. 어떤 항쟁이든 사회 모순으로 억눌린 사람들의 열망이 더 치열한 법이다.

3·1운동을 통해 한국인은 새롭게 태어났다. 시간, 공간, 인간적으로 두루 그러했다. 봉건시대에서 근대사회로, 왕토에서 국토로, 백성에서 시민·국민으로 거듭났다. 이를 발화하고 매개하고 전개해나간 중심 언어는 단 두 글자 ‘만세’였다. 그 만세 소리는 독립이고 광복이며, 조국과 인간 해방이고, 또 미래를 향한 노래였다. 미래란 내일 오는 게 아니라 현재로 끌어와야만 비로소 진짜 미래일 수 있다. 그 첫 번째 일은 3·1운동 그날 꿈꾼 100년 뒤의 나라가 지금 이 나라인지 돌아보는 성찰이다. 100년 전 약속한 대로 ‘만세’를 살아가기 위해.

서해성 3·1운동100주년서울시기념사업 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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