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출근길에 오른 시민들이 1월 2일 오전 서울 광화문 네거리 일대에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 한겨레
한국경제 진단과 처방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중반기 핵심 경제정책으로 혁신성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10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의 전제 조건으로 혁신을 제시했다. 즉, 일자리를 만드는 힘은 혁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새해 벽두 혁신성장을 화두로 꺼내 든 배경은 무엇일까?
혁신성장은 기술, 산업, 인력, 제도 등 사회 각 분야의 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여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이끈다는 전략이다. 수요 측면의 소득주도성장과는 달리, 혁신성장은 공급 측면을 강조한다. 소득주도성장은 임금 인상을 통해 가계소득을 늘려 유효수요를 창출하면 기업의 투자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혁신성장은 생산성 향상을 통해 고부가가치 제품을 개발하면 기업이 높아진 임금을 부담하고도 수익을 내서 고용으로 연결된다는 논리다. 장석인 산업연구원(KIET) 선임연구위원은 “문재인정부의 정책 기조는 저성장과 양극화를 동시에 극복하고 분배와 성장이 선순환을 이루는 사람중심 경제의 구현”이라고 설명했다.
고용지표 부진하지만 반전 신호도
문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고용지표가 부진한 게 가장 아쉽고 아픈 점”이라고 실토했다. 지난해 연간 취업자 수 증가 폭은 9만 7000명으로 전년도인 2017년(31만 6000명)에 견줘 30%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생산가능인구(만 15~64세) 감소 등 구조적 요인과 경기 둔화, 일부 정책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생산가능인구는 한 해 전보다 6만 4000명 줄었다. 고용률이 높은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면 취업자 수 증가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도 생산가능인구 중 취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인 고용률이 0.1%포인트 하락에 그쳤다는 점에서 취업자 수 증가 폭 둔화는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주요 원인이라고 봤다.
제조업 고용은 생산직·임시직을 중심으로 5만 6000명 줄었다. 2016년 이후 시작된 조선업 구조조정에다 지난해 5월부터는 한국지엠(GM) 등 자동차업계 구조조정까지 겹친 탓이다. 문 대통령은 고용 부진의 원인에 대해 “근본적으로는 제조업이 아주 오랫동안 부진을 겪고, 구조조정도 일어나면서 지속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들고 그 여파로 서비스업이 함께 어려워진 것”이라면서 “그래서 강조하는 게 혁신”이라고 되뇌었다.
고용 지표가 죄다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취업자 중 고용계약 기간이 1년 이상인 상용직 비중은 51.3%로 전년(50.2%)보다 1.1%포인트 상승했다. 정부의 정규직 전환 유도 정책, 고용보험료 지원 대상 확대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임시(1개월∼1년)·일용직(1개월 미만) 비중은 24.3%에서 23.5%로 축소됐다. 임시·일용직 비중이 줄고 상용직이 늘어났다는 것은 일자리의 안정성이 개선됐다는 의미다. 홍콩상하이은행(HSBC)은 “고용 증가가 대부분 상용직에서 이뤄지고 임금 상승률(2017년 2.8%→2018년 1~10월 5.5%)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점은 성장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고용보험 가입자가 전년보다 47만 명이나 늘어난 점도 일자리 질이 개선됐다는 해석에 힘을 싣는다. 임시직도 고용보험 대상이지만,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받는다는 점에서 고용의 포용성이 개선됐다는 신호로 읽힌다. 문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에서 상용직과 고용보험 가입자 증가 등을 “반가운 소식”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자영업자 증가 폭 확대 ‘희망’
최저임금이 올랐지만 직원에게 월급을 줘야 하는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의 증가 폭이 확대된 점도 희망으로 읽힌다. 도매·소매업, 숙박·음식점업은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와 임시·일용직 등을 중심으로 감소했지만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 비중은 6.0%에서 6.2%로 상승했다. 물론 이러한 지표들이 일자리 질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전반적인 고용 회복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 둔화 가능성이 커지면서 당분간 고용 상황이 개선될 여지는 크지 않다. 국책 연구기관들은 세계 경기 위축 가시화로 올해 취업자 증가는 지난해보다 소폭 늘어난 10만∼12만 5000명 안팎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정부는 투자와 일자리 예산 대폭 확대를 통해 취업자 수 15만 명 증가를 목표로 삼고 있다.
취업자 수 증가 폭 감소가 경기 순환 요인 때문이라면 일시적으로 재정 확대나 통화 완화 정책을 쓸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자동차·조선 등 제조업 침체라는 구조적 문제가 주요 원인이라면 더 근본적인 정책 대응이 필요하다. 그 해법은 문 대통령 말처럼 혁신성장이 될 수 있다. 백흥기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과거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자동차, 철강, 조선 등 주력 산업이 침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 혁신 동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짚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12월 14일 발표한 2019년 경제정책방향에서 성장률을 2.6~2.7%로 전망했다. 안팎의 여건이 녹록지 않지만 가능한 정책 수단을 총동원해 2018년 수준을 유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세계은행은 지난 1월 8일 ‘어두워지는 하늘’이라는 부제목을 단 보고서에서 올해 세계경제가 2.9%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6개월 전보다 0.1%포인트 하향 조정된 수치다. 세계적인 보호무역 확산과 경제성장 둔화로 교역 환경이 나빠지고 있다. 정부는 올해 수출 증가세가 지난해 6.1%의 절반 수준인 3.1%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미·중 무역분쟁 악화가 최대 위협
국책 연구기관들은 올해 한국 경제를 위협할 대외 위험 요인으로 미·중 무역분쟁 악화를 우선적으로 꼽았다. 최정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통상 마찰 확산으로 세계 교역량 증가세가 꺾이고 우리나라의 수출 증가세도 점차 약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나라의 1, 2위 수출국인 두 나라의 분쟁이 한국 무역에 미치는 영향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중국의 대미 수출이 줄면 우리나라 대중 수출의 약 80%를 차지하는 중간재 수출이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러한 우려 역시 돌이켜보면 시대적 전환기에 미리 대응하지 못한 탓에 자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0~2010년 중국은 세계 1위의 제조 국가로 발돋움했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부터 8위로 약진하면서 지금은 제조업 5위에 올라 있다. 이 기간에 우리는 특별한 기술혁신 없이 국내 자본재와 중간재를 중국에 수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저성장 시대에 진입한 중국은 혁신의 필요성을 느껴 한국에서 수입하던 많은 중간재를 국산화하겠다는 기조로 돌아섰다. 장석인 선임연구위원은 “2000년대 세계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강화된 게 되레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 ‘성공의 덫’이 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이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반도체마저 가격 하락 등의 영향으로 올해 수출 증가율이 한 자릿수로 내려앉을 전망이다. 지난달 수출액은 반도체, 석유화학 등 비중이 큰 품목을 중심으로 감소했으며 지역별로는 대중 수출의 감소 폭(-13.9%)이 컸다. 반도체 산업에도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은 경쟁사들의 공세가 거세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반도체가 포함된 전자부품업에서도 취업자 수가 줄고 있다. 미래 먹거리가 될 신사업을 발굴하기 위한 혁신성장이 더 절실해지는 이유다.
초연결과 산업 융복합 확산
한국 경제도 2010년대부터 연평균 2~3%대의 저성장 국면에 들어섰다. 투자 증가율 둔화와 고령화, 양극화 등 구조적 요인 때문으로 분석된다. 장석인 선임연구위원은 “주력 제조업이 약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산업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은 변화의 큰 흐름에 둔감했음을 시사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혁신성장을 위해 우선 “추격형 경제를 선도형 경제로 바꾸겠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들의 기술·플랫폼 선점 경쟁이 치열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닌 ‘퍼스트 무버’로 새 길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장석인 선임연구위원은 “과거 고도성장을 위해 양적인 결과를 중시한 모방형 성장 패러다임의 수명은 이제 다했다”고 진단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혁신으로 기존 산업을 부흥시키고,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신산업을 육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랜 부진을 겪고 있는 자동차·조선·석유화학 등 주력 제조업에 ‘혁신의 옷’을 입히고 벤처 창업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뜻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글로벌 산업구조의 재편은 저성장 기조를 타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의 열쇳말은 초연결과 산업의 융합 확산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빅데이터 등 핵심 기술이 접목된 신산업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전통 제조업을 혁신하려면 디지털 전환이 시급하다고 진단한다. 스마트 공장 자체가 하나의 신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백흥기 본부장은 “주력 제조업이 스마트 선박 등 미래형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빠르게 전환해 경쟁력을 회복한다면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고 봤다.
벤처 창업 활성화도 중요한 과제다. 아이디어나 사업 모델,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혁신창업은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다. 기술혁신의 원인을 아이디어 축적에서 찾는 신성장 이론이 발전하면서 인적 자본과 혁신 역량이 경제성장의 핵심적 요인으로 간주됐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루카스 시카고대 교수는 아이디어와 인적 자본의 축적이 기술혁신을 가져온다고 했다.
혁신창업 위한 생태계 조성
국내 스타트업 규모는 양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가 1조 원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성공한 혁신창업 기업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영국의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저서 <기업가형 국가>(2013)에서 “정부는 시장 실패에만 개입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벗어나 기업들이 주저하는 리스크가 큰 기술과 프로젝트에 선제적인 투자를 해 미래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고 썼다.
문 대통령은 혁신성장의 구체적인 방안 중 하나로 혁신창업을 위한 생태계 조성을 제시했다. 상생의 생태계는 지속 가능한 혁신성장의 필수 조건이다. 스타벅스는 좋은 커피를 수입하기 위해 더 좋은 커피에 더 많은 투자를 해서 구입했다. 반면 네슬레는 커피 생산자들이 더 좋은 커피를 만들 수 있도록 영농 방식을 지원했다. 덕분에 커피 농장은 양질의 커피를 팔아 수익을 내고 시장을 확대해 임금 상승과 일자리 증가가 이뤄졌다. 정부의 역할은 목표와 수단을 정하는 게 아니라 기업이 혁신사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데 있다는 얘기다. 박승록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경제의 강점인 인적 자본, 혁신 역량, 기술 역량이 혁신성장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정부는 규제 개혁과 제도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광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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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