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독립운동이자 민족혁명이요, 겨레의 등불이다. 국내는 물론 중국 만주, 러시아 연해주와 미주 그리고 일본에서까지 한민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3·1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마당에는 종교적 편견도, 지역적 갈등도, 계급과 계층의 위화감도 없었다. 오직 조국의 광복과 민족 독립을 갈망하는 열기만 가득했다. 3·1운동은 전국 218개 군에서 무려 1500여 차례나 전개되었고, 남녀노소는 물론 학생·교사·유생·종교인·상공인·농민·노동자 등 각계각층 200여만 명이 동참했다. 가히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특히 만세운동 현장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결집한 독립 의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성립시켰다.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를 부정하고 민족 정권을 세운 것이다. 고조선 이래 대한제국까지 이어진 전제군주국이 아니라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것이다. 실로 민족혁명이자 민주혁명의 출발이었다.
3·1운동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고조시켰다. 3·1운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된 청·장년들이 독립군 부대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독립운동 역사에 빛나는 봉오동·청산리 대첩도 이로써 가능했다. 국내에서도 3·1운동은 민족 대중의 항일투쟁을 한층 고조시켰다. 3·1운동으로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이 고양된 노동자와 농민, 학생 등 대다수 민중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정의와 인도주의를 부르짖은 3·1운동은 한 줄기 신선한 동방의 빛이 되었다. 제국주의 지배하에 신음하던 식민지·반(半)식민지 국가와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촉발한 것이다. 중국의 항일 5·4운동은 물론 간디와 네루가 중심이 된 인도 국민회의파의 무저항·비폭력 저항운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는 3·1운동을 기억하면서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고 예견했다. 네루도 옥중에서 “자유를 되찾기 위해 수없이 죽어갔고 수없이 일본 경찰에 구속되었지만, 그들의 이상을 위해 희생하고 순국하는 한국 민족의 용감한 투쟁을 본받으라”고 자신의 딸 인디라 간디에게 말했던 것이다.
3·1운동은 과거의 역사로만 남은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서 빛나는 등불과 같은 존재이다. 국민 통합이나 민족적 결단이 필요할 때 3·1 정신은 길잡이가 되고, 고난과 역경에 처했을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빛과 용기를 주는 고귀한 역사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3·1 정신은 절실하게 요구된다. 보수와 진보의 진영 논리가 정치판을 흔들고 해묵은 좌우 이념 갈등이 여전하며 경제위기 속에서 계층과 계급 간 위화감이 커지고 있는 이때, 지금이야말로 대동단결해 3·1운동을 일으키고, 한마음 한뜻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 선열의 지혜를 되새길 때다.
이제 곧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용광로처럼 만세운동의 마당에서 하나가 되었던 기억을 상기하며, 불굴의 의지로 민족 독립과 민주혁명의 길을 열었던 3·1 정신의 DNA를 되살리자. 남북 화해와 협력의 길이 다시 열리며 통일로 가는 열차가 이미 기적을 울리고 있고, 인류 평화의 깃발을 펄럭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용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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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