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대였다. 한 세기 내내 전국에 걸쳐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표현대로 하면 ‘관리의 탐학이 풍습’인 시대에 ‘호소할 곳마저 없어 종기가 안에서 곪아 터진 듯’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농민항쟁으로 세 사건을 꼽을 수 있다. 1811년 홍경래는 지역 차별에 반발하며 평안도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북부지방 부호들의 후원 아래 삭풍의 겨울을 견디며 다섯 달을 항거했다. 1862년 경상, 전라, 충청을 아우르는 삼남지방 농민들은 불공평한 조세제도와 관리의 부정부패에 항의하고자 봉기했다. 이때 농민항쟁은 주로 군현 단위로 일어났다. 초봄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봉기가 70여 개 군현을 휩쓸었다.
1862년 이후로도 전국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농민들의 저항에 미온적 태도를 취했다. 개혁 조처가 없진 않았다. 대원군은 호포제를 실시하는 등 민생 안정을 모색했고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을 일으키며 농민의 요구를 혁신정강에 담았다. 하지만 대원군은 10년 만에 권력을 놓아야 했고 급진개화파의 세상은 삼일천하에 그치고 말았다.
▶1895년 2월 27일 전봉준이 서울의 일본영사관에서 취조를 받은 뒤 법무아문으로 이송되기 직전 찍힌 마지막 모습으로, 2015년 고 양상현 교수가 발굴해 공개했다.
이방인 눈에도 혁명 전야처럼 동요
1890년대에 들어와 조선 사회는 이방인의 눈에도 혁명 전야 같아 보일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프랑스인 뮈텔 주교는 1891년 11월 6일 자 일기에서 “나라 안에 불평등이 노골화되고 있고 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소문이 유럽 거류민 가운데 돌고 있었다”라고 썼다. 동학농민군 지도부였던 오지영은 당시 분위기에 대해 “조선 각지의 백성들은 말끝마다 ‘이 나라는 망한다. 꼭 망해야 옳다. 어찌 얼른 망하지 않는가’라며 날마다 망국가를 일삼았다”라고 기록했다. 그가 보기에 이제 조선은 “도덕상, 정치상, 윤리상, 법률상, 경제상으로 모두 파멸에 들어가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은 1894년 봄 고부민란에서 시작되었다. 수령에게 적폐를 시정하라는 청원운동을 벌이고 이를 거부하자 농민들이 봉기한 과정은 종전의 농민항쟁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고부민란에는 전봉준이라는 지도자와 동학이라는 조직이 있었다. 동학 조직이 여러 지역을 아우르는 동학농민군으로 묶이고 전봉준이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로 우뚝 서면서 고부민란은 전국을 뒤흔드는 반정부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19세기 농민들은 신분제라는 차별적 제도와 문화를 기반으로 소수의 독점 권력이 스스로 법을 무너뜨리며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현실에 직접행동으로 맞섰다. 향회 혹은 동학 조직을 기반으로 부패하고 불공정한 권력에 맞섰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결코 느닷없는 봉기가 아니었다. 19세기 농민이 100년을 준비한 농민항쟁의 절정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부안에 있는 백산에서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정부군과의 전투에 나섰다. 황토현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주성 점령에 성공한 동학농민군은 조선 정부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전봉준은 전라도 일대에 치안 기능을 맡는 집강소를 설치했다. 동학의 자치기구인 도소를 통해서는 폐정개혁을 실시했다. 동학농민군의 승리와 폐정개혁의 실시는 조선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문화적 충격이 컸다. 동학농민군은 상하귀천의 신분 질서를 당연시하는 유교문화를 따르지 않았다. 누구나 평등한 대접을 받는 자치공동체를 통해 폐정개혁에 나섰다.
▶<오사카매일신문>은 사진을 토대로 삽화를 그려 ‘압송당하는 전봉준 장군’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실었다. | 한겨레
자치공동체 통해 폐정개혁 실시
동학농민군 간에는 신분 차별이 없었다. 양반부터 백정까지 상하귀천에 관계없이 다양한 신분층이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에는 천민이 적지 않았다. 일찍이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동학 지도자로 발탁했던 남계천은 노비였다. 담양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한 김석원과 남응삼도 노비였다. 만경에서 활약한 석구와 순익은 원래 성도 없던 노비였으나 역시 동학농민군 지도자로 활약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김개남의 주력부대는 백정으로 구성되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전라도 장흥에서 전투를 벌일 때 22세의 여성인 이소사가 두령이 되어 선두에서 지휘를 하다 체포되었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은 평등한 자치공동체인 도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을 실시했다. 당시 동학은 포와 접이라는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포와 접을 아울러 이끄는 자치공동체가 바로 도소였다. 도소는 탐관오리를 쫓아내고, 횡포한 부호를 응징하고, 온갖 잡세와 빚을 없애고, 인민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해결하는 역할을 했다.
전봉준 꿈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
1894년 가을 전봉준이 외세에 휘둘리는 나라를 구하고자 재봉기를 결정했을 때, 동학농민군의 면모는 처음 봉기할 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첫 번째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최시형 휘하의 동학 접주들이 재봉기할 때는 동학농민군 지도부로 가담했다.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신분 해방의 붐을 타고 동학에 들어온 평민과 천민들로 구성되었다. 하나가 된 동학의 지도부와 농민군은 새 세상을 꿈꾸며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무장력이 월등한 일본군을 이기지 못했다. 동학농민군이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섰건만, 정부군은 외세인 일본군을 거들며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결국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의 꿈은 공주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했다.
전봉준은 1894년 겨울,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서울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판사가 봉기의 동기를 묻자 “백성이 평등하게 대우받도록 악한 정부를 고쳐 선한 정부를 만들고자 나섰다”고 일갈했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 스스로가 정부 개혁의 주체로 나서고자 항쟁을 벌였다는 얘기다. 전봉준을 처형했던 집행 책임자는 그를 “약자의 동무가 되어 강적을 대항한 자이고,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운 세상을 고쳐 대평등과 대자유의 세상을 만들고자 한 자”라고 평했다. 백성이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의 주인으로 사는 것, 그것이 전봉준의 꿈이었다.
전봉준은 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동학은 도적 떼가 아니라 서양에서 집회를 열어 정부를 감시하는 조직인 민회와 같다”고 주장했다. 또한 군주로의 권력 집중을 막는 합의제 정치를 꿈꿨다. 그는 “나랏일을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망 있는 선비가 협력해 합의제에 따라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으로 서울로 진격했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 합의제 정치의 꿈이 완전히 좌절된 것은 아니었다. 1894년 여름, 온건개화파인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수립되어 본격적인 개혁이 추진되었다. 이를 갑오개혁이라 부른다. 갑오개혁 정권은 개혁 추진 기구인 군국기무처를 설립하자마자 동학농민군이 줄기차게 요구했던 신분 해방 조처를 단행했다.
▶전봉준 장군(가운데)이 1894년 9월(음력) 2차 봉기를 해 삼례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행진하던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기록화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고종은 월급 받는 자동인형”
동학농민군의 ‘노비 문서를 불살라 없애라’는 요구는 ‘공사노비 제도를 모두 없애고 인신매매를 금지한다’는 법령으로 실현되었다.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 위의 평량갓을 벗기라’는 요구는 ‘역인, 창우, 피공 등은 모두 천인에서 면함을 허용한다’라는 법령으로 수용되었다.
동학농민군은 당시 첨예한 사회문제였던 과부의 재혼 허용을 요구하기도 했다.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하라’는 동학농민군의 요구는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자유에 맡긴다’라는 법령으로 제도화되었다. 한편 갑오개혁 정권 역시 전봉준과 마찬가지로 군주로의 권력 집중을 막고자 했다. 일본의 궁내부 제도를 참조해 왕실과 정부를 명확히 분별하고자 했다. 또한 왕을 배제하고 내각회의를 중심으로 국정을 꾸려가고자 했다. 영국의 여성 지리학자인 비숍은 갑오개혁으로 군주권이 제약받는 상황을 지켜보며 고종을 ‘월급 받는 자동인형’이라고 불렀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조선 사회는 크게 달라졌다. 제도적 신분 해방이 완결되었다. 왕의 권력에 제약을 가하고 내각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려는 시도도 일어났다. 민이 함께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발적으로 결사체를 만드는 풍토가 본격화되었다. 동학농민전쟁 이전과 이후는 분명 다른 시대였다. 동학농민전쟁은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김정인_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와 현대 대학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역사전쟁, 과거를 해석하는 싸움>, <대학과 권력> 등이 있다. 현재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기획소통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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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