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마(Palma), 2012년
디자인의 본질은 실용성, 즉 기능에 있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인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는 건물의 3요소로 기능, 구조, 미를 꼽는다. 여기에서 기능은 건축주의 요구에 해당된다. 건축은 건축주가 원하는 어떤 집을 짓고자 하는 그 ‘요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디자인되는 사물 역시 최초의 시작은 ‘요구’이고 그것은 ‘기능’으로 구현된다. 미국의 1세대 산업 디자이너인 월터 도윈 티그는 “기능이란 그 사물을 통해 용솟음치는 일종의 생명력이며, 그 사물의 발전을 결정짓는 원천”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물이 아무리 기능이 뛰어나더라도 아름답지 못하면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힘들고, 선택받았다 해도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제 기능을 잘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하므로 건물의 3요소로 미가 포함된 것이다. 하지만 사물의 아름다움이란 기능으로부터 독립되어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이 바로 예술의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디자인의 아름다움이다. 다시 말해 사물의 아름다움은 기능에 종속되어 있다. 오히려 기능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에 이른다.
▶공기 의자, 1999년
이런 사물의 아름다움이 기능과 갖는 밀접한 관련성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가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하나의 나뭇잎은 그것이 맵시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스럽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엄격한 기능에 의해 빈틈없는 모양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름답다. 디자이너는 하나의 물건을 마치 나무가 잎을 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들려고 한다. 그는 그가 디자인하는 물건을 자기의 개인적 취미로 덮어버리지 않고 객관적이게 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그는 물건이 그 자체의 고유한 방법으로 만들어지게끔 도와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디자인하고자 하는 사물의 기능적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사명이라는 뜻이다.
이론은 그렇지만 이 세상 사물이 다 그렇게 디자인되지는 않는다. 자의식 강한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고자 기능보다 아름다움, 더 나아가 ‘독특함’으로 승부를 보려 한다. 필립 스탁, 론 아라드, 하이메 아욘 같은 이른바 스타 디자이너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그들이 아름다움과 독특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기능은 희생당한다. 이런 스타 디자이너들은 대개 기능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디자인은 예술을 실현하는 방편이 된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런 예술적 디자인이 강세를 보였다. 여기에 반기를 든 스타 디자이너가 있었으니 바로 재스퍼 모리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그의 전시회가 ‘피크닉’이라는 문화 공간에서 열리고 있다.
▶심플론(Simplon), 2003년
재스퍼 모리슨은 일본의 디자이너 후카자와 나오토와 함께 21세기 전반기에 ‘슈퍼노멀(super normal)’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 슈퍼노멀을 한국말로 옮기면 ‘극도로 평범한’ 정도가 될 것이다. 시장에서 팔리는 흔하디흔한 제품들. 이를테면 동그란 모양의 스테인리스 접시나 그릇, 아무 장식 없는 검은색의 투박해 보이는 주전자, 사각 박스의 수납장, 다리가 4개인 특징 없는 플라스틱 의자 같은 제품 말이다. 그 제품을 만든 사람은 익명의 디자이너, 그도 아니면 그냥 기술자들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기의 예술적 재능과 개성을 발휘하겠다는 욕망, 기존 제품과 차별화한 디자인을 선보이겠다는 의지가 눈곱만큼도 없다. 그저 잘 작동하고 싸게 많이 파는 것이 그들이 하는 디자인의 목적이다. 이런 물건들은 아주 옛날부터 만들어져 왔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묵묵히 자기가 맡은 기능을 다한 뒤 폐기되는 물건이다.
재스퍼 모리슨은 이런 디자인에서 디자인의 본질을 발견한다. 시장에 널린 그런 사물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예술가처럼 ‘창조하지 않고’ 기능을 구현하려 한다. 하지만 익명의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사물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성의 결여다. 자랑하지는 않지만 기능 구현의 극단까지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싸게 생산해서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극도로 평범하면서도 완벽한 기능을 추구한다. 시장의 평범한 의자가 오래 못 가서 다리가 흔들리고 부실해지는 반면, 모리슨이 디자인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HAL 의자는 다리와 상판이 만나는 결합 구조가 대단히 견고하기 때문에 의자가 가벼우면서도 튼튼하다. 이는 견고함이라는 실용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브루노 무나리가 말한 것처럼 어떤 최선의 기능 추구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아름다움을 덤으로 얻는다.
▶HAL 의자, 2010년
슈퍼노멀의 디자인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형태를 이어받는다. 그것은 특정 기능에 대한 최선의 형태로서 어떤 원형이 된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슈퍼노멀은 전통적인 제작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다. 예를 들어 모리슨이 디자인한 에어 체어는 단순한 플라스틱 의자지만 공기 주입 사출 성형이라는 신기술로 플라스틱 속을 비워서 훨씬 가벼운 의자를 만들었다. 모리슨의 디자인은 정말 평범해서 미술관에서 전시된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다. 시장에서도 이런 유의 디자인을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에 모리슨은 우리에게 디자인의 본질, 사물의 기능과 그것의 구현 과정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라는 이치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