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동네 다른 세대 ‘협업’ 합니다

2019.01.07 위클리 공감 최신호 보기

 

고대웅씨

▶‘예술공간 R3028’ 고대웅(28) 씨.  박승화 <한겨레> 기자

 

이효광씨

▶‘성문유리 이효광(55) 씨

 

을지로 문화 다시 쓰는 20대와 50대

“왜 왔어?”
“볼트 필요해서요.”
“몇 개?”
“세 개요.”
“뭐? 겨우 세 개?”

대량 주문이 상식인 을지로에서 볼트 3개를 사겠다? 아저씨는 ‘얘가 뭘 알고 여기 온 건가…’ 하며 청년의 아래위를 훑어봤다. ‘미술을 한다’니 조금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30년 전 미대생 시절, 화방에 재료 구하러 다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서울특별시 중구 창경궁로 복합문화공간에서 만난 청년 고대웅(28) 씨와 볼트가게 사장님 이효광(55) 씨. 두 사람은 첫 만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옆 가게 유리공장 사장 이태순이가 나타나서 ‘뭐야, 무슨 일인데?’ 하더라고. 그래서 ‘옜다, 볼트 세 개 준다’ 했지요. 알고 보니 옆집 2층 ‘R3028’이라는 작업실 청년이더라고. 그때부터 유심히 보게 됐어요. 그런데 말야. 우리 막걸리 한잔하면서 얘기 나눠야 하지 않겠어?” (이효광)
“요즘 제가 사장님 술 약속 많이 튕겼죠.(웃음)” (고대웅)
두 사람의 이야기꽃은 막걸리 두 병과 과자 하나를 놓고 피기 시작했다. 술이 들어가면 이씨는 ‘고 작가’를 ‘대웅아!’로, 고씨는 ‘사장님’을 ‘아트 선배’로 부른다.

‘볼트 3개’로 첫인사 나눈 유리가게 장인과 작업실 청년 
서울시 중구 창경궁로5나길의 옛 주소명은 ‘산림동’. 산림동은 북쪽으로 청계천, 남쪽으로 을지로3·4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금속을 깎거나 각종 기계 부품 만드는 기계·정밀 공장이 550여곳 몰려 있는 곳. 광복 이후 1970년대 산업화 시절에는 ‘뭐라도 만들기만 하면 현금이 쑥쑥 들어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호황을 누렸지만 산업화 시대가 저물면서 빈 공장도 늘어났다.
떠난 사람들 자리는 지난 2015년부터 청년들로 채워지는 중이다. 중구청이 을지로 내 산림동 빈 점포 등을 임대해 만 19~39세 청년 창작자들에게 작업 공간으로 제공하는 ‘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부터다. 고씨도 프로젝트 공모에 선정돼 지난 2016년 1월 1일부터 약 40평 규모의 현재 작업 공간을 이용하고 있다.
“이 지역에 연고는 없었어요. 대학 1학년 때인 2010년 교수님 따라 왔던 기억이 있죠. 교수님이 공실 생기는 거 보면서 ‘이 골목이 없어지면 미술인들에게는 큰 손해야’라며 눈물을 글썽이시더라고요. 그러다 2015년에 전시를 하면서 이 동네를 다시 만났죠. 지금은 이 복합문화공간에서 저와 2명의 작가들이 예술 창작활동, 교육활동을 하고 있어요.”
고씨와 비교하면 이씨와 산림동의 역사는 꽤 길다. 1980년 고1 때 아버지가 친구 권유로 볼트가게를 차렸다. 가족 모두 청주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대학 졸업 뒤 광고회사에 다니다 잠시 쉬며 ‘아버지 도와드리자’고 했던 게 여기까지 왔다. 큰딸 나이가 어느새 24살. 현재는 볼트가게를 접고 유리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중이다.
“여기 사람들이 그라인더 손에 쥐고 일하잖아. 불꽃도 막 튀기고 하니 첫인상이 세 보여요. 그런데 얘기 나눠보면 마음씨가 다 좋아. 각자 여기 들어온 사연도 다양하고…. 젊은이들이 오면 말 잘 안 거는데 이 친구들은 먼저 말 걸더라고. 내가 늦게 결혼한 편이니까 대웅이는 아들뻘이야. 작업실이라고 하길래 어느 날 여기 올라와 봤어요. 파라핀 냄새가 나는 거야. 유화 물감에 섞는 거잖아. 냄새 맡으니까 옛날 생각 확 나대. 근데 요새도 대학시험에서 석고 데생 실기시험 보나?”
“요샌 안 볼걸요. 저도 고등학교 입시 때는 준비했었는데 대학에선 안 봤어요.”
“그렇군. 우리 때는 그거 손가락 아플 정도로 연습했었는데….”

 

사람플러스사람

두 세대 협업해 녹지 공간 ‘장인의 화원’ 완성하기도
오며가며 인사 나누고 수다 떨면서 인연을 맺은 지 4년 차. 이젠 단순한 친분을 넘어 작품활동 등도 함께 한다. 두 사람을 포함해 장인과 청년이 협업해 완성한 대표 작품 가운데 하나가 ‘장인의 화원’이다. 성문유리에서 대림상가로 가는 골목길에 만든 녹지 공간이다. 을지로 지역 핵심 산업인 철공업과 오랜 시간 공업에 종사한 장인들의 역사를 기념하자는 뜻을 담았다. 녹지 공간 제작 공정에는 산림동 장인들이 참여했다. 화원 둘레와 구조물 등은 모두 철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거 지원 받으려고 제가 워드 문서 작업 열심히 했잖아요. 시 예산 7000만 원 따왔죠. 아트 선배님 비롯해 다른 선배님들 기술적인 아이디어도 많이 들어갔고요. 공동 작업해서 서울시에서 상도 받았죠. 동네 화단이지만 시·구청에서 관리도 해줘요.”
“그거 대웅이 이름으로 받은 상이잖아.”
“에이, 아니죠. 팀이 받은 거고, 선배가 받은 겁니다. 지역이 함께 받은 거고.”
이렇게 협업할 일을 가져오거나 조언을 구하러 오면 귀찮을 법도 한데 장인들에게 이런 제안은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여긴 일이 획일적이거든요. 대량생산 제품들이니까. 근데 이 친구들이 색다른 물건을 많이 제안해. 뭔가 예술적인 느낌이 나는 것들 있잖아요. 같이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들어요. 가져오면 흐뭇하죠.”
“작업하다가 잘 안 풀리는 게 있어서 가져가면 ‘성수동 어딜 가보라. 그럼 문제 해결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기도 해요. 저는 역사를 참 좋아하는데 이곳 어른들이 들려주신 을지로 얘기를 모티브로 그림책도 준비하고 있어요. 고려시대 철을 먹는 괴물 신화 이야기나 을지로 지명에 담긴 을지문덕 장군의 의미 등을 담아볼 예정입니다.”
장인의 화원 화단 앞마당에서는 음악회도 열린다. ‘철의 골목: 도시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가요, 팝, 전통연희 등 다양한 공연을 펼치는 식이다.
“내가 여기 유리공장 사장 이태순이랑 사람들 꾀어서 공연도 보러 갔잖아. 2003년부터 시작한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이 지역이 많이 가라앉았거든. 떠난 장인들 자리에 청년들이 와서 지역을 꽃피우려 하는데 뭐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야지. 얘기라도 더 해주고, 하다못해 소주라도 사주고 싶지. 행사 있으면 더 많이 참여하려고.”

 

장인의화원

▶예술공간 R3028 고대웅 씨가 기획하고 지역업체들과 협업하여 만든 ‘장인의 화원’. 박승화 <한겨레> 기자

 

새해 ‘을지로 공장제’ 이름으로 축제도 열어보고파

고 씨는 “예술을 매개로 지역의 장인들과 지역 자체가 품은 여러 가능성을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게 하는 일을 계속 해보고 싶다”고 했다. “공업지대인 밀라노와 예술가들이 만나 ‘밀라노’라는 브랜드가 생겼잖아요. 저희도 이렇게 함께 호흡하다 보면 언젠가는 ‘을지로’라는 브랜드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꿈꿔봅니다. 이 지역에는 철공, 유리, 금속, 섬유, 세공 등 외국 예술가들이 보면 ‘보물’이라 불릴 만한 요소가 많아요. 근데 많은 한국 작가들이 이곳에 대해 잘 모르니 거리를 두거나 두려워하거든요. 일반인들 중에는 개발 논리로만 이 지역을 바라보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 편견이 아니라 이 지역이 가진 문화 정체성, 사람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고 씨는 “선배께 정식으로 말씀 안 드렸는데 새해 일 하나 더 드리려고 한다”며 웃는다. 이씨는 “또 뭐 생각하는데?”라고 되묻는다.
“새해에 ‘을지로 공장제’를 열 예정입니다. 고단하게 일만 하지 마시고, 사장님들도 하루쯤 술도 한잔 하시면서 노는 거죠. 저처럼 청년들이 이곳 안내 프로그램 등 만들어서 바이어들한테 ‘어딜 가면 어떤 업체가 있고, 어떤 분 만날 수 있다’고 장인들을 소개해주는 시간도 마련하고요. 맛있는 것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질펀하게 노는 거죠 뭐. 선배도 기획단으로 참여하셔야 합니다.”
“그래? 기자분 아까 12시쯤에 공장 사람들 점심 먹고 낮잠 자는 거 봤다고 했죠? 옛날엔 안 그랬어. 점심이면 모여서 화투 치고 1000원, 2000원 모아 저녁 삼겹살 파티를 했지. 지나가는 사람들도 와서 먹으라고 하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이야기 나누고 그랬거든. 축제 얘기하니까 그 시절 생각나서 좋다.”


김청연 기자

 


R3028이 진행한 을지로 프로젝트
 

 

‘철의 골목: 도시 음악’

도시음악

▶을지로 지역 장인들과 청년 세대들이 ‘철의 골목: 도시 음악’이라는 음악회를 함께 즐기고 있다. 고대웅 씨 제공


도시화 이전에 마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당’이 있었다. 마당은 사람들이 다니는 이동 통로이면서 각종 문화행사 등이 벌어지는, 그야말로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철의 골목: 도시 음악>은 을지로가 더 이상 공업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 그리고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열었던 마당 음악회다. 가요, 팝, 전통연희 등 다양한 주제 공연을 했는데 을지로 장인 세대들 중에는 흥에 겨워 일어나 어깨춤을 추는 이들도 많았다.

‘을지로 사용법’

 

을지로사용법

▶젊은 세대에게 을지로를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로 시작한 워크숍 ‘을지로 사용법’에 참여한 청년들. 고대웅 씨 제공


건축, 미술, 인테리어 등 을지로에서 활동하며 의미 있는 작업물을 남긴 작가들을 초청해 <을지로 사용법>이란 이름으로 워크숍을 열었다. 을지로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어떤 의미의 작업물이 완성됐는지, 장인 세대와는 어떻게 협업했는지 등을 소개하는 자리. “예술가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 뭔지 배웠다.” “을지로 철공소 장인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등 의미 있는 평을 남긴 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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