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퀴즈 공감퀴즈](http://www.korea.kr/goNewsRes/attaches/editor/2019.01/04/20190104190318784_I8T4UQQJ.jpg)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위클리 공감>이 신박하고 재미있는 역사 퀴즈를 준비했습니다.
퀴즈를 풀다 보면 몰랐던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를 새롭게 알게 됩니다.
당신의 역덕(역사 덕후) 점수는?
자, 첫 문제는 쉬운 걸로 나갑니다.
1. 3·1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3·1운동에 놀란 조선총독부는 지배 방식을 문화(문치교화)통치로 변경했다.
② 일본 도쿄 유학생들이 벌인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았다.
③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독립운동으로 1919년 3월 1일에만 주로 일어났다.
④ 을사오적으로 유명한 이완용과 훗날 친일의 길을 걸은 윤치호에게도 민족대표 추대 권유가 있었다.
▶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짧게는 4월 말, 길게는 12월까지 이어진 독립운동이었다. 당시 1700만의 인구 중 10분의 1이 참여한 세계에서 유례 없는 전국적·대규모 시위였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조선 소요사건 일람표>도 3월 1일부터 4월 말까지 58만7641명(50명 이하 참여자의 경우는 제외)이 참여했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1542회 시위에 참여인원 2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어린 학생부터 장삼이사까지 남녀노소를 망라한 일제강점기 최대의 운동이었다.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려달라고 사전에 요청 받은 이완용과 윤치호는 이를 거절했으나 총독부에 밀고는 하지 않았다. 정답: ③
2. 3·1운동과 관련해 사실이 아닌 것은?
① 종교계가 주축이 된 것은 무단통치 기간 종교조직을 제외한 모든 사회단체가 해산된 이유도 있었다.
② 총독부는 이승훈의 사생활에 대해서 마타도어를 퍼트리는 등 기독교에 대해 더 심한 핍박을 가했다.
③ 고종의 서거 외에도 3년 동안 3배의 쌀값 폭등, 전년도의 스페인 독감 창궐 등 민생고도 영향을 끼쳤다.
④ 시위가 잇따르자 도장관(도지사)들이 총독부에 “진짜 조선이 독립한 것이 맞느냐”고 문의한 해프닝도 있었다.
▶ 조선총독부는 천도교에 대해서 특히 더 가혹한 탄압을 벌였다. 성전 건축을 위한 예금을 동결하거나 포교 활동을 억압하기도 했다. 교주인 손병희의 사생활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등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총독부의 탄압으로 천도교의 신도 수는 꾸준히 감소하는 등 교계 입장에선 위기의식을 느낄 만했다. 3·1운동 당시 천도교가 가장 열성적으로 운동에 참여한 배경에는 그동안 총독부로부터 받은 이러한 핍박이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정답: ②
3. 거사일(3월 1일)과 관련해 사실이 아닌 것은?
① 1월 21일 서거한 고종의 국장이 3월 3일이라 장례 참석 인파를 고려했다.
② 3월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 쪽의 참여가 어려운 것도 한 원인이었다.
③ 거사 모의가 새어나가 급하게 날짜를 정했다.
④ 2월 20일 권동진의 집에서 최린·오세창·이승훈이 모여 결정했다.
▶ 성공한 역사에는 남다른 우연이 작용한다. 민족대표들이 상하이·서울·도쿄를 오가며 거사를 논의했고 거대 종교 세력과 학생들을 망라한 두 달에 걸친 준비 기간에 선언서 비밀 인쇄와 배포까지. 살벌했던 무단통치 시대에도 3·1운동 모의는 기적처럼 새어나가지 않았다. 정답: ③
4.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에 앞서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2만1000 부 인쇄해 전국 각지로 보냈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역사적인 공간은 다음 중 어디일까요?
① 보성사 ② 단성사 ③ 대각사 ④ 명월관
▶ 기독교와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에서는 천도교 관련 서적과 월보 등을 발행하는 인쇄소 보성사를 운영했다. 보성사는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의 신문관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한 곳. 당시 등사기는 등록제로 총독부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3·1운동에 앞선 1919년 2월 27일 저녁,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보성사로 넘겨졌다. 이날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보성사 사장이자 천도교계 인사인 이종일의 지휘 아래 보성사에서 극비리에 독립선언서 2만1000 부가 인쇄됐다.
이종일은 몇 차례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끝에 독립선언서의 인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인쇄 중인 보성사에 악질로 소문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승희(또는 신철로 불림)가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당신도 조선 사람이니 눈감아달라”던 이종일의 호소가 통한 것인지,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가 건넨 5000원이 통한 것인지 신승희는 이 일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함구했다. 인쇄가 마무리된 독립선언서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는 과정에서도 일본 경찰의 검문을 받았지만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이종일은 인쇄된 선언서를 자신의 집에 보관했다가 이튿날인 28일 종교계 인맥을 활용해 전국 각지로 보냈다. 이종일 등은 3월 1일 첫 발행한 <조선독립신문>도 보성사에서 인쇄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일본 경찰은 즉시 보성사를 폐쇄했을 뿐 아니라 그해 6월 보성사 건물에 불을 질러 다시는 ‘불온 문서’를 발행할 수 없도록 했다. 정답: ①
5.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같은 시각 종로 탑골공원에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요.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그들 대신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가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① 한용운 ② 이광수 ③ 유관순 ④ 정재용
▶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가졌던 시각인 3월 1일 낮, 탑골공원에는 독립선언 계획을 들은 학생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당초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 했던 민족대표들은 격앙된 학생들과 총독부 경찰의 충돌을 우려해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탑골공원에 모여든 학생들이 아무 소득 없이 발길을 돌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기독교 쪽 인사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기다리던 정재용이 돌발적으로 팔각정에 올라 선언서를 읽게 된다. 기획된 낭독이 아니었고, 잘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기에 당시 관련자들의 신문조서에는 ‘수염이 있고, 머리를 깎은, 마르고 흰 얼굴의 백색 한복을 입은 남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3월 1일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시위는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를지 모를 일이다. 정답: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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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