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2016년의 탄핵 촛불집회는 참여 인구만이 아니라 전개 양태에서 주의·주장에 이르기까지 빼닮은 평행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료 사진·한겨레 자료사진
대중이 주도해 민족·민주 외친 전국적 대규모 평등·평화 시위
3·1운동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열에 아홉은 장터에서 사람들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장면이 떠오르실 겁니다. 3·1운동이 1919년 3월 1일에만 일어난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모두 일면의 사실입니다. 3·1운동이 생기를 잃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박제화’한 까닭입니다.
인류 평등의 가치 최초로 일깨워
3·1운동은 인류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최초로 알린 운동입니다. 3·1운동의 숨겨진 의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을 같이 보시죠.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告)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하략)”
어렵죠? 풀이하면 이런 뜻이랍니다.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자손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세계에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알린다’는 글귀가 나오죠. 인류가 평등하다는 건 지금에는 상식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20세기 초였습니다. 세계를 문명국과 야만국으로 나누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정복하는 것을 문명의 시혜라고 강변하던 시대였습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대표되는 ‘사회진화론’은 그 시대를 지배한 사상이었습니다. 독립선언서의 인류가 평등하다는 인식은 그런 상황에서 나온 최초의 발상입니다. 선언문은 또 ‘침략주의’와 ‘강권주의’를 구시대의 유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을 극복한 인류 평등의 운동은 없었습니다. 피지배 민족의 목소리로 인간의 천부인권과 평등함을 세계에 처음 알린 것입니다.
인류가 평등하다는 인식을 세계가 공유하게 된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30여 년이 지난 1948년 12월의 일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치르고 나서야 인류는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제1조)”고 밝히게 됩니다.
세계대전 이후 첫 평화운동
1918년 11월 11일, 인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선언했습니다.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세계대전은 1천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참상 그 자체였습니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일어난 평화운동입니다.
독립선언서의 한 구절을 보시죠.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갈고닦아 길러진 인도주의적 정신이 이제 막 밝아오는 빛을 인류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온 자유권을 온전히 지켜 왕성한 번영에 삶을 즐겨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새봄이 가득 차 평화가 넘치는 온 세계에 우리 민족의 빛나는 문화를 맺게 할 것이다.”
이처럼 독립선언서 곳곳에는 평화와 자유, 인도주의의 가치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을 비롯해 인도의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은 이러한 새로운 시대정신의 발견이었습니다.
3·1운동과 촛불혁명은 세기를 가로질러 맞닿아 있습니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삼장 중 1장과 3장은 ‘비폭력·평화’주의를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폭력주의는 3·1운동에 다양한 계층의 광범위한 참여와 운동의 장기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입니다. 1919년 3월 1일부터 짧게는 4월 말, 길게는 12월까지 이어진 3·1운동에는 당시 1700만의 인구 중 10분의 1이 넘는 200만 명이 참여한 세계에 유례가 없는 전국적·대규모 시위였습니다.
2016년 당시, 세계 언론은 촛불의 ‘평화적 시위’를 격찬했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 초등학생 등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평화적인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2016년의 탄핵 촛불집회는 국민의 32.8%가 “참여한 적이 있다“고 대답할 정도로 대규모 운동이었습니다. 연인원을 인구수로 환산하면 1687만 명에 달합니다.
3·1운동은 지도부가 없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곧바로 총독부 경찰에 연행됐습니다. 그 시각 탑골공원에선 학생들이 모여서 만세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짧게는 4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이어진 3·1운동은 어린 학생부터 장삼이사까지 모두 자발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지도부 없는 운동이었습니다.
지도부 아닌 자발적 시민이 주인공
2016년 촛불집회도 아예 지도부가 없었습니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광화문에 모였고, 많은 사람이 모이자 집회 질서 유지를 위해 각계 시민단체가 연석회의를 구성한 것이 전부입니다. 자발적인 시민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운동이었습니다.
3·1운동은 빼앗긴 나라가 돌아갈 정치체제로 ‘왕정’이 아닌 ‘민주정’을 예고했습니다. 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은 ‘조선이 독립국’임과 함께 ‘조선인이 자유민’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을 바란 것입니다. 독립선언서의 뜻에 따라 1919년 4월 11일 설립된 상하이 임시정부는 공화정 체제를 기본으로 했습니다. 여기에 3·1운동의 민주성이 있습니다.
2016년 촛불혁명이 훼손된 민주주의를 복원한 운동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촛불은 탄핵을 이뤄냈고 정권교체로 이어졌습니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2016년의 촛불집회는 3·1운동 이후 100년간 4월(4·19), 5월(5·18), 6월(6·10)의 굵직한 역사가 하나로 모아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평화와 평등, 자유의 가치를 일깨운 최초의 운동,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오승훈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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