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왜 그토록 매력적인 선을 보유하고 있는지 알겠다. 저토록 영리하고 선한 육체파라니!”
권혁웅 시인은 어떤 동물에게 이런 멋진 찬사를 보냈습니다. □□는 과연 어떤 동물일까요? 힌트를 조금 더 드리죠. 시인은 동물의 매력적인 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의 코끝에서 머리, 등, 엉덩이, 꼬리로 이어지는 선은 아무리 봐도 섹시해.
힌트를 준다고 해놓고 더 오리무중으로 만든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진짜 힌트입니다. 영화 <꼬마 돼지 데이브>를 만든 조지 밀러 감독의 말을 들어보세요. “□□에게는 비극적인 색채가 있다. 수천 년을 ○○만을 위해 길러졌는데도 총명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
답을 아셨나요? 이제 마지막 힌트입니다. ○○은 바로 ‘고기’입니다. 아직도 모르시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올해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입니다. 오행에서 ‘기(己)’는 흙을 의미하죠. 올해는 누렁 □□띠입니다. 황금돼지보다는 누렁돼지가 맞지요.
돼지는 사람과 아주 친숙한 동물입니다. 무려 9000년 전에 사람에게 왔지요. 늑대가 사람을 선택해서 개가 된 것과는 달리 돼지는 사람이 멧돼지를 잡아다가 집돼지로 만든 겁니다. 돼지는 쓸모가 많았습니다. 두꺼운 가죽은 방패를 만들고, 뼈는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 쓸모가 있었습니다. 거칠고 뻣뻣한 털은 솔을 만들기 좋았지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고기를 얻는 데 돼지만 한 게 없었습니다. 돼지는 육체파거든요.
▶류우종 <한겨레> 기자
갓 태어난 돼지는 약 1킬로그램밖에 안 됩니다. 사람의 아기가 3~4킬로그램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아주 작지요. 돼지는 115킬로그램일 때 잡습니다. 이때 잡으면 고기가 180근쯤 나옵니다. 돼지고기 180근을 얻는 데 필요한 시간은 180일에 불과합니다. 하루에 한 근씩 자라는 셈이니 정착해서 농사를 짓는 신석기시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고기 공장인 셈이었죠.
물론 돼지가 115킬로그램까지만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10~15년 살면서 품종에 따라 250~350킬로그램까지 자라지요. 그런데 왜 6개월 만에 잡는 걸까요? 이때 잡아야 가장 경제적이기 때문입니다. 돼지는 하루에 3킬로그램의 사료를 먹거든요. 약 1500원어치입니다. 115킬로그램보다 더 커지면 사료를 먹는 양에 비해서 살이 찌는 속도가 줄어듭니다. 그래서 이때 잡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사람은 삼겹살을 아주 좋아하지요. 그런데 115킬로그램짜리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오는 삼겹살은 12킬로그램뿐입니다. 고등학생 한 반이 삼겹살 파티를 한다면 돼지 한 마리를 잡아야 할 정도로 조금밖에 안 나와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벨기에 같은 나라에서 삼겹살만 수입해오지요.
저는 자라면서 “야! 이 돼지 같은 놈아!”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하도 많이 먹어서 듣는 지청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감각이 떨어진다고 하는 소리더군요. 저를 흉보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좀 과학적으로 하셔야지요. 돼지가 가죽이 두껍다고 감각마저 떨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보통 사람의 감각 능력이 다른 동물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감각이 별로인데 어떻게 만물의 영장으로 버티고 있겠어요? 시력만 해도 그래요. 사람보다 시력이 좋은 동물은 하늘을 높이 날면서 먹잇감을 찾는 맹금류뿐입니다. 사람은 전체적으로 뛰어난 감각을 자랑하지만 모든 감각이 최고인 것은 아닙니다.
냄새를 맡는 후각 능력을 살펴볼까요? 동물들의 후각 유전자 가운데 상당수는 작동하지 않지요. 사람에게는 작동하는 후각 유전자가 199개입니다. 하지만 후각 수용체가 조합을 이뤄서 작동하기 때문에 1만 가지 냄새를 구분할 수 있지요. 개는 사람보다 모든 감각이 떨어집니다만 후각은 훨씬 좋습니다. 개에게는 작동하는 후각 유전자가 무려 817개나 있거든요. 개가 탐색견으로 활약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요. 돼지에게는 작동하는 후각 유전자가 무려 1113개나 있어요. 당연히 돼지가 개보다 냄새를 더 잘 맡죠.
야생에서 생활하는 돼지는 이렇게 많은 후각 유전자를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요? 우선 먹이를 찾는 데 썼겠죠. 이 능력을 파악한 사람들은 송로버섯을 찾을 때 돼지를 앞세우죠. 그런데 단지 먹이를 찾는 데 쓰기에는 너무 과합니다. 과학자들은 돼지가 예민한 후각으로 다른 돼지와 교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냄새로 동료와 대화하고, 냄새로 서로 위협하면서 위계질서를 세우고, 또 냄새로 암컷과 수컷이 상대를 유혹하는 거죠. 돼지가 서로 킁킁대는 건 이야기를 나누는 겁니다.
“돼지 같은 놈”이란 욕에는 멍청하다는 뜻도 있지요. 물론 사람보다는 멍청합니다. 뭐 돼지만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특별히 흉을 볼 정도로 멍청한 동물은 아닙니다. 물건을 가져오라는 사람의 말과 몸짓을 알아듣는 능력이 돌고래나 침팬지보다 떨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람도 잘 구분해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이 손가락으로 어떤 물건을 가리키면 침팬지는 물건 대신 손가락을 봅니다. 사람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지요. 개는 손가락이 가리킨 물건을 보지요. 그래서 우리가 개를 똑똑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돼지도 손가락이 아니라 물건을 봅니다. 앞으로 “돼지 같은 놈”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 침팬지 같은 놈”이라고 하세요. 좀 이상하죠? 그러니 괜히 동물에 빗대서 말하지 맙시다. 그냥 “야, 이 바보야!”라고 하시면 돼요.
돼지는 외롭지 않습니다. 지구에 무려 8억 4000만 마리가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 전 세계에서 베이컨이 되는 돼지는 단 네 종류밖에 안 됩니다. 역시 이유는 간단하죠. 바로 경제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조건 빨리 무럭무럭 자라는 돼지만 좋아하니까요. 왠지 양심에 찔리네요.
권혁웅 시인은 돼지의 매력적인 선에 애착이 많습니다. 그 선의 완성은 꼬리에 있죠. 그는 <꼬리 치는 당신>(마음산책, 2013년)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돼지는 새끼일 때 꼬리가 잘린다. 좁은 우리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서로 꼬리를 물어뜯기 때문에 미리 자르는 거라고. 돼지에겐 꼬리가 없고 우리에겐 양심이 없네. 마음 어디 갔니? 응, 돼지 꼬리 붙였더니 어디론가 날아갔어.”
이정모
필자 이정모는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생화학을 전공하고 대학교수를 거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지냈다. <250만 분의 1>,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내 방에서 콩나물 농사짓기> 등 읽기 편하고 재미있는 과학 도서와 에세이 등 6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인기 강연자이자 칼럼니스트로도 맹활약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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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