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 5200만 년 전 고생대가 끝나고 중생대 막이 올랐다. 그런데 무대에 등장인물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고생대를 끝낸 페름기 말 대멸종 후유증은 컸다. 그리고 길었다. 대멸종은 지구 역사상 가장 센 한 방의 타격이었다. 지구 생명 역사에 있었던 다섯 번의 대멸종 중 최고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대멸종의 어머니’라고 불린다. 원인은 지구온난화였다. 기후변화는 당시 지구 생태계를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고생대 종의 90~95%가 멸종했다. 중생대 생태 서판에 새로운 종이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50만 년이 필요했다.

공룡은 신데렐라 사우루스
아비규환에서 가까스로 생환한 동물이 있었다. 일부 파충류가 낯익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생태계에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걸 알아차렸다. 빈 구멍을 빠르게 채워갔다. 여러 가지 형태와 크기로 몸을 새롭게 설계해내는 적응방산(adaptive radiation)을 했다. ‘파충류 시대’라는 중생대 호칭은 그래서 나타났다. 그중 지배파충류에 속하는 공룡이 중생대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중생대 1억 8600만 년 중 1억 5000만 년을 지배했다.
왜 공룡은 지구 생물 사상 유례 없는 성공을 거뒀나? <공룡 오디세이>(2009년) 저자 스콧 샘슨(전 미국 유타대 교수)에 따르면 공룡의 드라마는 우연과 필연이란 키워드로 설명된다. 성공은 우연이고, 이들의 멸종은 필연이다. 성공 측면에서 보면, 공룡은 기회주의자다. 지상의 최고 포식자들이 환경의 습격을 받고 꼬꾸라지자 기회를 잡았다. 생태계 문호가 개방되어 있을 때 공룡은 생태계 에너지 흐름의 빈자리를 밀고 들어갔다. 키 작은 공룡에서부터 높은 침엽수 입을 따먹을 수 있는 몸무게 100톤에 가까운 초식공룡에 이르기까지 몸집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거대한 초식공룡의 몸집은 지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크기였다. 스콧 샘슨은 공룡을 ‘신데렐라 사우루스’라고 재치 있게 부른다. 자신의 힘으로 성취를 이뤄낸 게 아니라, 구원 천사가 나타나 행운의 주인공이 됐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공룡은 오늘날 유럽인과 같다고 스콧 샘슨은 말한다. 유럽인이 성공한 건 그들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장소에 올바른 때에 우연히 있었기 때문이라고 얘기된다(미국 지리생물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저서 <총, 균, 쇠>에서 주장).
중생대란 연극은 3막으로 구성된다. 트라이아스기(2억 5200만 년 전~2억 130만 년 전), 쥐라기(2억 130만 년 전~1억 4500만 년 전), 백악기(1억 4500만 년 전~6600만 년 전). 흥미로운 건 공룡이 1막인 트라이아스기에서는 주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중생대 연극 막이 올라가자마자 공룡이 주인공으로 바로 등장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1막 내내 파충류, 양서류, 수궁류가 같이 살았다. 낯선 수궁류가 오히려 득세했다. 수궁류 운명은 트라이아스기에 흥했다가 이울었다. 공룡은 중생대 1막이 끝날 때쯤 나타났고, 2막과 3막의 주인공으로 올라섰다.
한때 거대한 이빨과 뼈 화석이 나오면 공룡 화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트라이아스기에 대한 연구가 더 깊어지면서 공룡이 아닌 다른 지배파충류 화석인 걸로 드러났다. 지배파충류는 트라이아스기 후반에 나타났고 악어, 공룡, 조류를 낳은 그룹이다. 트라이아스기 후반에는 학자들이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공룡이 다양하지 않았던 게 분명해졌다.
공룡이 중생대 2막부터 주역에 오른 것과 관련 마이클 벤턴(영국 브리스톨대 고생물학자)은 트라이아스기 말 두 차례의 대멸종이 원인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 대멸종은 중생대 1막 후반인 2억 2500만 년 전에 일어났고, 대형 초식동물을 싹 쓸어갔다. 수궁류와 린코사우루스류라고 불리는 지배파충류의 친척이 멸종했다. 두 번째 대멸종은 중생대 1막을 끝냈다. 2억 년 전이었다. 이 대멸종은 피토사우루스류와 라우이수키아 같은 악어류 대형 육식동물을 제거했다. 첫 번째 생태계 청소로 원시용각류가 대형 초식 공룡으로 가는 길이 열렸고, 두 번째 생태계 청소로 육식공룡인 수각류가 중생대 2막(쥐라기)에 퍼져나갈 수 있었다.
공룡 이야기를 다룬 과거 책을 보면 바다에는 어룡, 수장룡이 있고, 하늘에는 익룡이 있다. 중생대 땅과 바다, 하늘을 공룡이 다 차지하고 있다. 이건 잘못이었다. 나는 <공룡 오디세이>를 읽고서야 이를 알았다. 공룡은 육상동물이다. 바다에 살고 하늘을 날았던 거대한 공룡처럼 생긴 동물은 공룡이 아니고, 파충류다. 스콧 샘슨이 들려주는 공룡의 정의는 이렇다.
공룡이 활개 칠 때 인간의 진화적 조상은 뭐했나
“공룡은 중생대 마지막 1억 6000만 년 동안 살았던, 특수화된 엉덩이와 뒷다리를 지닌 육상동물이었다.”
공룡의 조건은 육상동물이어야 한다. 그러니 시조새도 공룡이 아니다. 또 중생대 거주민이어야 한다. 매머드는 공룡이 아니다. 중생대가 아닌 신생대에 살았기 때문에 자격 미달이다. ‘특수화된 엉덩이와 뒷다리’는 공룡과 다른 파충류를 나눈다. 최초의 공룡은 똑바로 선 자세를 취했다. 넓적다리뼈가 수직 방향에 더 가까웠다. 파충류 선조 대부분과 달리, 초창기 공룡은 뒷다리로만 걸어 다닌 두 발 보행자였다(물론 나중에 네 발로 걷는 공룡이 나타났다).
파충류는 다리가 옆으로 벌어져 있고, 무릎 관절을 구부리고 움직인다. 공룡의 두 발 사이는 좁으나 파충류 발자국은 상대적으로 많이 벌어져 있다. 파충류는 걷기가 힘드니 몇 걸음 움직이고는 쉬기 위해 배를 지면에 내려놓아야 한다. 두발 보행은 공룡의 초기 진화의 견인차로 얘기된다.
공룡은 중생대 3막인 백악기에 위세가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대한 육식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는 백악기 북반구를 지배했다. 영화 ‘쥐라기 공원’에는 티라노사우루스가 나온다. 쥐라기에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없었다, 이 때문에 유전자를 바탕으로 공룡을 되살려냈다는 영화 ‘쥐라기 공원’은 ‘백악기 공원’이란 이름이 정확하다고 한다. <공룡 오디세이> 책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견된 공룡은 700종이다. 우리가 모르는 공룡이 무수히 많다. 미국 통계학자 스티브 왕(스와스모어 칼리지)과 공룡학자 피터 도슨(펜실베이니아 대학)은 전체 종의 3분의 2는 발견되지 않은 걸로 추정한다. 평균적인 공룡 한 종은 다른 멸종한 척추동물 종처럼 약 100만 년 존속했던 것 같다.
공룡이 활개 칠 때 인간의 진화적 조상은 뭐했나. 인간은 포유류다. 포유류는 공룡과 중생대 동기생이다. 2억 2000만 년 전인 중생대 1막(트라이아스기) 후반에 포유류도 공룡과 함께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대 말 대멸종, 즉 페름기 멸종에서 살아남은 수궁류의 한 혈통인 키노돈트류에 속하는 트리낙소돈이 포유류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트리낙소돈은 동물 사체와 곤충을 먹고 살았을 걸로 추정된다. 트라이아스기 말에 살았던 포유류 조상은 메가조스트로돈이다. 몸집이 작았고, 중생대 2막(쥐라기) 전기까지 살았다.
포유류는 그러나 1억 5000만 년이 넘도록 작은 몸집을 유지해야 했다. 볕 들 날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수백만 년 동안 그늘 속에서 종종걸음 쳐야 했다. 포유류는 공룡이 주도하는 생태 서판이 다시 백지로 돌아갔을 때가 돼야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최근 공룡 연구자는 공룡을 연구하되 공룡이 살았던 생태계를 함께 이해하려 든다. 스콧 샘슨 책도 ‘공룡 오디세이’라기보다는 ‘중생대 이야기’로 읽힌다. 공룡이 살았던 생태(공간)와 진화(시간)를 함께 보아야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를 알 수 있다. “공룡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게 뭡니까. 나는 공룡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다”고 유명한 공룡생물학자 잭 호너(로키산맥 박물관 근무)는 말한 바 있다. 공룡학자는 공룡이 무엇을 먹었는지, 짝은 어떻게 구했는지, 새끼는 어떻게 키웠는지를 살핀다. 중생대 시작 당시 한 개의 대륙이었던 지구 땅덩어리가 중생대가 진행되면서 다시 쪼개졌고 이는 공룡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공룡 당시 식물 생태계는 어땠는지, 공룡이 지구 생태계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를 말하려 한다. 이게 오래된 자연사를 보는 이 시대의 새로운 관점이다.
최준석 | 주간조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