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한국인인데 외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 일단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하자. 이 아이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아이에게 ‘한국말과 글’을 가르치려 했다. 그런데 아이는 고민에 빠졌다. 주변에선 다 영어를 쓰기 때문이다. 일상생활도 그렇고 친구끼리도 그렇다. 학교에선 말할 나위도 없다. 부모는 아이에게 외국어로라도 한국어를 배우라고 하지만, 요즘 뜨는 외국어는 한국어가 아니다. 앞길을 생각하면 중국어나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낫다.
자, 이 아이가 청년이 되어 한국에 왔다. 한국어는 더듬더듬 서툴지만 당연히 영어는 끝내준다. 게다가 중국어까지 번지르르 유창하다. 우리들은 이 아이, 아니 이 청년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조금 바꿔보자. 처음 말했던 외국을 미국 말고 중국이라 생각해보자. 그리고 똑같은 고민과 과정을 거쳤다 치고, 아이를 청년으로 뻥튀기해서 우리 앞에 놓아보자. 중국어는 그야말로 유창한데 한국어는 더듬거리다 못해 입도 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 우리들은 이 청년을 ‘어떤 맘’으로 대할까?
한 번만 더. 이번엔 일본이다. 자, 여기 우리 눈앞에 한국 핏줄인데 한국어는 전혀 못하고 일본어만 얄밉게도 잘하는 청년이 있다. 그를 대하는 우리는 과연 ‘어떤 심정’일까? 동일한 외국이고 동일하게 한국어를 잊어버린, 아니 잃어버린 핏줄만 한국인인 동포들을 대하는 시선과 마음이 너무나도 차이난다. 이것이 우리의 불편한 진실이다.
이제 입장을 바꿔 그 청년이 돼보자. 우리의 그런 눈빛을 받는 청년이 된 미국 동포, 중국 동포, 일본 동포는 어떤 심정일까? 그들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아마 잘은 모르지만, 미국 동포 청년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Yes!” 하며 주먹을 불끈 쥘지 모른다. 시대의 뒤떨어진 부모의 충고 대신 자신의 판단을 따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말이다. 반면, 중국 동포는 “취직을 위해서라도 한국말을 배워놓을 걸” 하며 후회하거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빨리 한국말을 배워야지”라며 결심할지도.
일본 동포는 어떨까? 그냥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국을 아예 싹 잊고 싶어 할 것이 거의 틀림없다.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만나본 재일동포 학생들은 ‘한국 놈이야 쪽발이야?’ 하는 시선에 기가 질려 입을 다물고 속으로 야속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일본으로 돌아가 잊고 싶다고 했다. 모두는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 그렇게 말했다.
이제 다시 미국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로 돌아가 보자. 이번엔 그 꼬마의 부모가 한국인이 아니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아프리카 어떤 소수민족인데, 정치적 박해를 피해 난민이 된 상태이다. 자, 이 꼬마는 어떤 언어를 배울까? 그리고 그 언어를 무슨 생각으로 배울까? 이 꼬마의 가장 쉬운 선택은 영어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영어는 세계 공용어이니 이렇게 자연스런 선택이 다시없다.
디아스포라의 애끓는 선택
그런데 이 꼬마가 영어가 아닌 자기 민족 소수언어를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 언어는 예전에도 소수민족 언어라 별로 쓰는 사람도 없고, 지금은 국가마저 사라져 민족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라 얼마 안 있어 그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도 없을지 모를 상황이다. 그런데도 꼬마는 그 소수민족 언어를 배우겠다고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 결국 주변에서 묻는다. 그런 바보 같은, 시대착오적이고 한심한 ‘똥고집’을 왜 부리냐며 한심스러워한다.
꼬마의 답은 간단하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니까.”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는 대꾸에 꼬마는 다시 답한다.
“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거든. 그걸 몰라?”
꼬마는 지금은 나라도 없어진 자기 민족을 사랑했다. 남들 눈엔 보잘것없을지 모르지만 그에겐 소중한 민족이고 또 말이었다. 너무 절실한 문제였다. 그래서 꼬마는 남들이 가는 크고 손쉬운 길을 버리고 아무도 가지 않는 좁고 힘든 길을 택한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자기 출신의 소수민족 언어로 시(詩)를 쓰겠다고 결심한다.
엥? 시? 시를 쓴다고?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아프리카 어느 소수민족의 유민이 미국에서 힘겹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 땅에서 태어났던 윤동주(尹東柱·1917~1945) 이야기를 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윤동주를 ‘민족시인’이라 부르고 그의 시가 멋지고 훌륭한 시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 쉽게 말하다 보니 그 안에 담긴 애끓는 간절함과 절박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결사적이었다. 당시 세계어인 일본어보다, 주변에서 쓰는 중국어보다, 쓰러져가는 조선어를 택했다.
이미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그는 그 말을 택했다. 그리고 그 말을 갈고 닦아서 시를 쓰려고 했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바로 ‘우리’임을 잊지 않는 길이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는 지금 그대로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였다. 당대의 다른 시인들이 쓴 시에 한문 투의 어려운 말들이 그대로 들어간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윤동주는 그런 노력이 우리말, 우리 민족, 우리나라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올해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 해가 거의 저물어가지만, 이런 디아스포라의 절박한 선택과 피나는 노력을 한 윤동주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올해가 지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윤동주는 단지 박물관에 곱게 모셔놓은 박제된 추억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윤동주를 몰라도 된다. 윤동주의 시를 읽지 않아도 된다. 윤동주가 바란 것은, 자신을 알아달라는 것도 자신의 시를 암송하고 시험에 출제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을 거다. 그가 바란 것은 단 하나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우리말, 우리글을 아끼고 사랑하세요.”
만약 그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도무지 당연하지 않게 들리는 말이지만 말이다.
유광수 |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