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트를 집으로 침낭을 침대로 삼아 매일 30~40km를 걷는 부부가 있다. 자전거 두 바퀴와 두 다리로 세계여행을 하는 부부라는 의미로 ‘두두부부’라고도 불린다. 부부는 먼 곳에서 내딛던 힘찬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평창으로 향하기로 했다. 지난 12월 1일 전북 전주시에서 성화봉송 주자로 나선 양희종·이하늘 부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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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종 씨와 이하늘 씨는 결혼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신혼부부다. 미국 본토 최고봉인 마운트 휘트니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치른 이후 1년 반째 신혼여행이자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 부부의 신혼여행지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운 수천 킬로미터의 길 위다. 남편인 양 씨가 미국 대표 3대 장거리 트레일 CDT(5000km)·PCT(4300km)·AT(3500km) 가운데 CDT의 절반을 걷던 중 결혼하면서 남은 절반과 AT 전체 구간은 이 씨와 함께 걷게 됐다.
부부는 세 가지 원칙을 약속했다. 첫 번째 ‘우리가 행복한 일을 하자’, 두 번째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일을 하자’, 세 번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을 해오던 부부가 긴 여행을 선택한 것은 이들 원칙의 일환이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경제활동이 아닌 여행은 저희만을 위한 일이었어요. AT 트레일에는 의미를 더하고 싶었어요.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 시작한 고민의 답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었어요. 대학 휴학 시절 2010년 밴쿠버동계패럴림픽대회 블로그 기자 활동을 하면서 패럴림픽 선수들의 노력을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있어요. 언젠가 내가 할 수 있다면 이 선수들에게 힘이 돼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죠. 그게 이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1 외국인 하이커들이 부부가 건넨 평창동계올림픽 기념품을 든 채 웃고 있다.
2 부부는 탄산음료 캔 겉면에 수기로 작성한 홍보 스티커를 붙여 트레일 위에 놓곤 했다. ⓒ양희종·이하늘
▶ 미국 카타딘산 팻말에 놓인 수호랑·반다비 인형 ⓒ양희종·이하늘
부부의 50리터 남짓 배낭에는 장거리 하이커라면 챙길 만한 길 위 살림살이가 빽빽이 담겼는데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수호랑·반다비 인형을 비롯한 평창동계올림픽 공식 기념품이 배낭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평창올림픽을 향해 더 많은 사람의 관심과 응원이 모이길 바라는 부부의 진심 어린 염원이 담겼다.
지난 3월 부부는 국내 한 포털사이트를 통해 ‘미국 동부의 장거리 하이킹 코스를 걸으며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을 알리겠다’는 취지의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다. 모인 350만 원은 마스코트 인형과 스티커 등 올림픽 기념품을 구매하는 데 모두 쓰였다. 부부는 트레일에서 만난 외국인 하이커들에게 기념품과 함께 대화를 건넸다. “한국 평창에서 올림픽이 열리는데 알고 있니?” 모르고 있다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길 위에서 만난 외국인에 올림픽 기념품 선물
장기간 트레일을 걷는 하이커들이 간절히 원하는 탄산음료 캔의 겉면에 수기로 작성한 ‘See you on the trail. See you in Pyeongchang 2018’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다. 일명 트레일 매직(Trail Magic, 길 위에 음식과 식수 또는 장비들을 두고 필요한 하이커들이 가져가도록 하는 예상치 못한 도움)이라는 미국 트레일 문화를 활용한 것이다. 장거리 하이커가 짐을 최대한 가볍게 꾸려야 하는 건 당연하다. 때문에 부부의 선택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체 구간을 한 번에 걷지 않고 5일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와요. 그때마다 필요한 짐을 챙겨서 다시 오르거든요. 사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평균 무게는 정해져 있어요. 산속에서 평창올림픽 알리기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도 한정돼 있죠. 우리가 이 길에 더욱 익숙해지면 더 많은 무게를 감내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칸쿤에 맡겨둔 자전거를 타고 남미 끝으로 가려던 부부에게 성화봉송 제의가 들어왔다. 계획 변경에 따라 소요되는 비용과 시간 탓에 망설여졌다. 하지만 뜻깊은 기회라는 생각에 지난달 한국에 오게 됐다. 그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전주시 경기전을 시작으로 약 3분 동안 성화봉송을 마친 부부의 얼굴을 통해 벅찬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으니 말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실감나지 않았는데 성화를 직접 마주한 순간부터 강한 떨림과 책임감이 느껴졌어요. 시민들이 보내주시는 커다란 호응에 벅차오르더라고요. 긴장한 탓인지 뛰는 동안에는 특별한 생각이 없었는데 종착점에 다다르고 나서야 ‘한국에 돌아오길 잘했구나. 이 발걸음은 절대 헛되지 않겠다’는 뿌듯함이 들었어요.”
부부는 눈으로 덮인 채 아무도 지나지 않은 길과 푸름이 우거진 숲 등 쉽게 볼 수 없는 장관을 눈에 담아왔다. 때로는 황홀한, 때로는 거대한 자연을 벗 삼는 그들에게도 성화봉송 중 만난 풍경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장관이 됐다. 양 씨는 성화를 든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아이의 눈빛이 계속 떠오른다고 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에 알 수 없는 성취감이 느껴져서다.
이제 부부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자신들만의 또 다른 평창동계올림픽 알리기 방법을 고민하려 한다.
“국내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건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이번 동계올림픽을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곳곳에서 노력했을까요? 특히 선수들에게 좋은 성과가 있기를 무엇보다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패럴림픽 선수들도 꼭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올림픽과 패럴림픽을 구분하기보다 하나의 평창동계대회로 여기고 저희와 함께 많은 힘을 보태주세요.”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