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겨울은 30장짜리 목욕탕 정액권으로 시작한다. 원래 한 장에 6000원이 기본요금인데(여느 동네나 그렇듯 사우나복 별도에 야간 할증이 있다), 30장을 한 번에 사면 장당 1000원씩 할인해 15만 원에 산다. 물론 사용기한이 넉 달 정도로 제한이 있다. 같이 쓸 사람이 없다면 네댓새에 한 번 꼴로는 가야 기한을 넘겨 이용권을 날리는 불상사를 막는다. 올해 초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여행이다 뭐다 해서 생각보다 자주 못 가는 바람에, 날도 더운 오뉴월에 사흘돌이로 대중목욕탕을 찾았다.
목욕탕이란 게 그런 거 같다. 한 번 안 가기 시작하면 가는 일이 엄청 낯설고 두렵기까지 한데, 한 번 가기 시작하면 집에서 씻는 일이 목욕탕의 불완전하고 부실한 대체재 정도로 격하된다. ‘하는 수 없지. 오늘은 집에서 대충 씻어야겠네.’ 이런 기분이 된다는 거다. 지금 다니는 목욕탕에 처음 들어설 때도 그랬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옷을 홀라당 벗고 돌아다녀야 한다니, 살아생전 처음 하는 경험이 아닌데도 심장이 옥좼다. 그런데 신기한 게 딱 한 번의 통과의례면 끝난다는 거다. 두 번째부터는 안면 튼 사이처럼 편안해진다. 목욕탕이 무슨 인격체도 아니건만.
그래도 목욕탕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가장 두려운 일은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거다. 게다가 나는 시력이 나쁜 관계로 이 문제에서 불리(?)하기까지 하다. 상대는 내 몸을 샅샅이 보는데, 나는 하나도 볼 수 없으니 완전 불공정거래 아닌가. 한번은 직장 근처 사우나에 갔다가 직장 상사를 입욕장 안에서 마주쳤다. 사실 회사 근처 목욕탕이라는 거 자체가 이미 경솔한 처사다. 비극의 예감이 가득하다고 지적할 수 있지만 어쩌겠는가. 그때 내가 사는 집이 직장 근처였다. 이미 탕 속에 들어앉은 그녀는 약 올리듯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안녕, 은하!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
그동안 봐온 눈짐작으로는, 나와 하드웨어 상으로 비슷한 몸매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서로 동시에 액면(?)을 공개했다면 적어도 이런 열패감까지는 맛보지 않았으련만. 그녀도 자기의 승리가 고작 타이밍의 도움을 받은 데 불과하다는 것을 똑똑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물속에 몸을 목 끝까지 담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등을 돌리고 앉았어도 신경이 온통 그녀에게 집중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끈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우리 둘을 연결하고 있었다. 이 긴장감은 조금 허무한 이유로 막을 내렸다. 내가 그만 소변이 급해진 것이다. 그녀가 그 짧은 틈을 이용해 탕을 빠져나와 옷을 입기 시작했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요즘도 알몸으로 입욕장에 들어설 때면, 몸을 가린 수건을 꽉 붙잡은 채 습관적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제발 아는 사람이 없기를 빌면서. 누가 말을 걸면 내용과 상관없이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옆자리 앉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말을 걸었다.
“등은 원래 안 미나요?”
내가 때를 미는 걸 지켜본 모양이다.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와 오른쪽 겨드랑이를,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와 왼쪽 겨드랑이를, 아무리 해도 손이 안 닿는 등짝은 패스. 이것이 나의 오랜 세신 원칙이다. 절대 남의 손에 내 몸을 맡길 수 없다는 신념이 아니다. 단순히 이제껏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다는 게 이유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묻는 내용은 생각지도 않고 “네!” 하고 답했다. 돌이켜보니 그게 기회가 될 수도 있었는데, 쩝…. 다음번에는 “아니요, 제가 먼저 밀어드릴까요?”라고 싹싹하게 말해볼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게 아는 사람이라면 싫다. 아는 사람은 그냥 아는 척하지 말아 달라. 나중에라도 목욕탕에서 나를 봤다며 갑자기 친근한 눈빛을 보내는 건 더더욱 별로다. 오늘 아침에 요가 수업에서 만난 그녀처럼.
김은하 | 번역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