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대민접점인 읍면동 운영에 일대 혁신이 일어날 전망이다. 앞으로 정부는 읍면동을 주민참여와 소통의 장으로 삼고 마을단위 자치기반을 강화해나갈 계획이다. 주민자치를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틀로 차근히 다지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풀뿌리 주민자치의 중점 추진과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읍면동 운영에 행정혁신을 이루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민참여 강화를 위해 법과 제도적 뒷받침을 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혁신 읍면동 정책을 추진해 주민참여 공동체를 활성화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주민자치회의 권한을 강화한다. 그동안 각 읍면동에 설치된 주민자치회의 권한이 미비했지만 앞으로는 마을계획을 수립하고 주민자치센터도 운영할 수 있다. 실질적 주민협의체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징수된 주민세 중 균등분이 주민자치 예산으로 사용된다. 그동안 특별시·광역시 소속 구에서 걷은 주민세는 광역지방자치단체로, 시·군에서는 시·군 자체 재원으로 편입되었다. 이제는 주민자치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주민세를 쓸 수 있게 되며 권한도 대폭 강화된다. 이와 함께 주민의 정책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해 주민생활과 밀접한 각종 정책 제안이나 공모사업 등에 모바일 주민참여시스템도 도입된다.
읍면동 행정혁신을 통해서는 현장밀착형 보건·복지 및 방문 건강서비스를 확충한다. 복지담당 공무원, 방문 간호사 등 현장 전담인력을 확충하는 등 찾아가는 복지 구현 및 공공일자리를 확대할 계획이다. 또한 읍면동 주민센터 등의 유휴공간을 주민 사랑방으로 공유하고, 지역사회 공공공간 중 유휴공간을 조사해 필요한 주민에게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마을자치 지원을 위한 플랫폼도 구축할 계획이다. 주민이 필요로 하는 사업을 마을의제로 수립하고, 마을총회를 거쳐 선정된 마을계획을 적극 지원한다.
▶ 경기 남양주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현답토론회’는 주민의 일상과 밀접한 사안을 주민들 간의 대화와 토론으로 결정한다. ⓒC영상미디어
경기 남양주시의 ‘현답토론회’는 마을자치 지원 플랫폼의 좋은 사례로 꼽힌다. 남양주시는 전통시장 활성화와 숲 관광자원 개발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이슈를 주민들과 공유한다. 문제 인식에서부터 해결 방안까지 주민들 스스로 소통하며 답을 찾게 만든 것이다. 남양주시의 숲 자원 활용을 위한 ‘숲에서 교육을 말하다’란 주제의 현답토론회에서는 “동네에 도보로 갈 만한 공원이 없다”, “아이들이 자연에서 놀면서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 오갔다. 실제로 남양주시는 산림자원이 풍부하지만 도농지역이 혼재되어 공원 같은 녹지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림녹지과는 현답토론회의 내용을 다음 해 정책에 고스란히 반영했고, 이후 5억 6000만 원의 사업비로 권역별 유아숲체험원 4개소를 신규 설치했다. 정부는 이러한 주민주도형 마을자치 계획을 적극 지원한다고 밝혔다. 또한 지역별 특성을 고려해 도시재생, 마을 일자리 창출, 복지 사각지대 발굴 등을 특화한 다양한 마을모델 발굴을 위해서도 지원할 방침이다.
예산 전 과정에 주민참여예산제 적용
주민참여 활성화를 위한 방안들도 마련됐다. 눈에 띄는 것은 주민소환 청구요건과 주민소환 개표요건의 완화다. 이것은 주민소환제의 요건이 너무 엄격해 시행 10년이 넘도록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현행 제도는 시·도지사는 유권자의 10%, 기초·광역단체장은 15%, 지방의원은 20%의 동의를 받아야만 주민소환투표를 청구할 수 있다. 현행 규정대로라면 경기도지사와 세종시장의 경우 똑같은 10%를 적용받는다. 유권자가 많은 경기도는 주민소환이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과거에는 유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찬성해야만 단체장이 해임됐다. 때문에 제도 도입 이후 65번의 주민소환 투표가 시도됐으나 실제 소환으로 이어진 경우는 2건밖에 없었다. 정부는 획일적이고 과도한 주민소환 청구요건을 지역별 인구규모와 선거투표율 등을 반영해 완화할 방침이다. 아울러 일부에만 적용됐던 주민참여예산제를 예산의 전 과정에 적용하고 이를 위해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설치 근거 마련 등을 위한 ‘지방재정법’ 개정을 추진할 방침이다. 주민참여예산제 운영결과 평가, 사후 컨설팅 등 환류장치도 강화된다.
주민 조례개폐청구제도도 대폭 손질한다. 조례개폐청구제도를 이용할 때 가장 큰 난관으로 지적됐던 주민 서명의 확보를 공인전자서명을 통한 온라인 방식으로 변경할 수 있게 관련 시스템 개편에 착수한다. 1999년 주민의 직접참여와 풀뿌리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지방자치법에 도입된 주민 조례개폐청구는 일정한 숫자 이상의 주민 서명을 모아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조례의 제정이나 개정, 폐지를 청구할 수 있는 제도이다. 전국적으로 ‘학교급식지원조례’에 대한 주민조례제정운동이 일어나 학교급식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킨 바 있고, 허가제로 운영되던 서울시청 앞 광장 사용을 신고제로 변경하는 등 주민의 뜻을 자치행정에 반영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일정 수 이상 주민 서명을 필요로 하다 보니 연평균 13건, 자치단체별 0.9건으로 활발하게 운영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
행정안전부는 ‘스마트 주민 조례개폐청구’ 시스템을 개발하고 지방자치법 시행령에 관련해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2018년부터 온라인으로 조례개폐청구안에 손쉽게 서명을 할 수 있도록 추진한다. 이는 현 정부에서 추진 중인 지방분권 핵심 전략 가운데 풀뿌리 민주주의 강화를 구체적·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정책에 해당된다.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하면 행정이 효율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진정한 주민자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주민참여의 바탕이 마련돼야 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시스템 구축사업은 자치입법권을 활성화하는 의미가 있다”는 취지를 밝혔다. 이어 “주민 조례개폐청구의 활성화는 ‘풀뿌리 민주주의 제도화’ 제1호 사업으로, 이 제도를 활용해 주민 생활에 도움이 되는 조례가 널리 제정되고, 바람직하게 개정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주민이 직접 지역문제 해답 고민”
“현답토론회를 통해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했어요.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스스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소속과 계층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이니까 나와 다른 관점이나 고충을 폭넓게 알게 되고요. 토론회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이 자리를 계기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도 생겨나고 있어요.”
이수현 진접시민연합회 회장은 현답토론회의 효과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낀 사람 중 한 명이다. 경기 남양주시는 단기간 발전으로 인해 도농지역의 문제뿐만 아니라 주민 간 이해관계도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주민의 뜻을 한데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이 회장은 남양주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현답토론회에 참여한 주민들이 진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토론회에 임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현답토론회로 애향심과 배려심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지역의 문제에 대해 주제를 선정하고 진행, 피드백까지 모든 과정이 주민주도형으로 설계되다보니 여기 참여한 주민은 시민 전문가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인 변화다.
“한번은 청소년의 놀이 문화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 적이 있어요. 그때 당사자인 청소년들도 참여했는데, 온도 차이가 크다는 걸 피부로 느꼈죠. 어른들은 술, 담배 등의 탈선이나 화장, pc방 출입 등의 문제를 규제의 측면으로 접근했고, 청소년들은 그들의 활동과 문화 등의 관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청소년들이 갈 만한 곳이 없다’, ‘남양주에 청소년들의 문화시설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모았어요. 토론회 이후 진접읍 주민자치위원회 주최로 ‘꿈자랑 끼자랑 경연대회’라는 청소년 문화제를 만들어 청소년들이 주도하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마을 주민이 머리를 모아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았다는데 큰 자부심을 느껴요.”
이수현 진접시민연합회 회장
강보라 |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