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갈수록 점점 더 추위를 탄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는 슬금슬금 겨울이 다가오는 신호만 보여도 기분이 울적해져버리고 만다. 남들처럼 겨울이 되면 울컥 치솟는, 무상한 시간이며 속절없는 인생에 대한 형이상학적 장탄식이 아니다. 외출 한번 하려면 옷을 겹겹이 껴입는 게 귀찮고, 칼바람을 피하려고 온몸을 오그리고 다니는 통에 뼈마디가 쑤시며, 별로 한 일도 없는데 해는 왜 이리 빨리 떨어지는지 동동거리고 다니는 게 숨찰 뿐이다. 그러니까 완전 형이하학적인 슬픔이다.
울적해진 심사를 달래보려는 마음이 닿은 곳은 엉뚱하게도 <황제내경>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이 의학서는 중국 신화의 인물인 황제와 그의 의관인 기백이 천문이며 의술에 대해 문답을 나눈 것을 기록한 책이다. 건강의 원리를 생명 현상의 본질과 우주만물의 운행과 엮어 논하고 있어서 읽다 보면 뜬구름 잡는 논리에 취해 겨울의 근심을 다 까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선인이 전하는 고대의 지혜를 온전히 실천하고 경험해보고 싶다는 새로운 의욕이 샘솟는다. 겨울에 대해서 <황제내경>은 이렇게 말한다.
“겨울 석 달을 폐장(閉藏)이라고 한다. 물이 얼고 땅은 균열한다. 사람이 양을 어지럽히지 않으려면 일찍 자고, 반드시 햇빛을 기다렸다가 일어난다. 뜻을 안으로 침잠시키며, 사사로운 마음이 있더라도 억제하며 기분도 내지 않는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 추위를 피하고 따뜻함을 취하며, 피부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기가 밖으로 달아나지 않게 한다. 이것이 겨울의 기(氣)에 응하여 장(藏)을 기르는 방법이다.”
역시나 고대의 지혜는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기백의 조언은 천하를 제 발 아래 두고 호령한 제왕을 위한 것이다. 먹고사느라 분주한 민초를 위한 게 아니다. 햇빛을 기다려 일어나라느니, 그렇게 꾸물거렸다가는 지각하기 십상이라느니, 마음을 억제하며 기분도 내지 않으면 온종일 ‘솔’ 음계로 목소리 톤을 유지하는 감정노동자는 어떻게 일을 하냐는 불평은 통하지 않는다. 농업 중심 사회였다면 저절로 우주의 운행과 호흡을 맞춰 살아갔겠지만, 산업사회의 노동자들에게는 알다시피 계절도 없고 밤낮도 없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냐고? 아마 기백은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그거야 적당히 알아서들 해. 그렇다고 내가 아닌 걸 맞다고 해야겠어? 진리가 당신들 마음에 들려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겨울은 돈이 많이 드는 계절이기도 하다. 생애 처음 맞이하는 겨울이 아닌데도, 며칠 전에는 쇼핑을 꽤나 했다. 새로운 전열기구며 새로운 옷가지, 새로운 방한용품 등 필요한 물품 목록이 길었다. 거실에 톡톡한 겨울용 카펫을 깔고, 솜이 들어간 털실내화를 신고 앉아 있으니 모닥불이라도 쬐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아늑하고 따뜻해졌다. 동남아를 여행했던 어느 겨울에 누군가가 들려준 흥미로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인 여행자들은 여기 채소가 물렁거려서 씹는 맛이 없다고들 해요.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재배한 채소의 특징이죠. 단단한 기가 없어서 흐물거리기만 하고 아삭아삭하지 않거든요.”
희한한 얘기다. 한 달이면 수확하는 채소에도 그 땅에 서린 사계절의 기운이 스민다는 걸까. 그러고 보니 차 덖는 솜씨로는 우리를 압도하는 대만의 숱한 명차들도 우리 차가 가진 특이한 맛-옹골찬 기운의 맛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하나만큼은 따르지 못했는데, 그게 말하자면 ‘겨울의 맛’이었던가 보다. 고단하고 성가시고 유지비까지 많이 드는 곤란한 계절, 겨울이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우리 삶에 그렇게나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봄여름에는 양(陽)을 기르며, 가을겨울에는 음(陰)을 기른다.”
<황제내경>의 화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알려준 겨울의 정의는 밖으로 유형의 성장을 멈추고, 안으로 무형의 성장을 하는 시간이다. 이번 겨울도 보나마나 혹독할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잘해보고픈 기분이 들었다. 입 안에 들어가서도 아삭아삭한 채소처럼 꿋꿋하게 말이다.
구승준 | 번역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