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임세경(42)은 유럽의 내로라하는 극장들이 앞다퉈 찾는 세계 오페라 무대의 디바다. 그는 2004년 유럽 무대에 처음 데뷔한 이후 2015년 오페라 ‘나비부인’으로 오스트리아 빈국립오페라극장 무대에 섰다.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베로나 아레나 페스티벌 ‘아이다’의 주연을 맡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세계 3대 테너로 불리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지휘한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토스카’에 타이틀롤을 맡는 등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 지난 4월 국립오페라단 공연 오페라 ‘팔리아치&외투’에서 넷다와 조르젯타 역을 동시에 맡은 소프라노 임세경 ⓒ임세경
경남오페라단과 밀레니엄심포니오케스트라가 공동 제작해 지난 10월 26일부터 사흘간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선보인 오페라 ‘아이다’ 지방공연을 마친 임세경은 12월 1일부터 사흘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서울 관객들을 맞는다.
“외국 무대보다 국내 무대에 서는 게 몇 배는 더 떨려요. 아무래도 집에서 식구들을 앞에 앉혀놓고 노래를 하는 기분이라 쑥스럽기도 하고, 잘되라고 채찍을 들고 오시는 날카로운 시선들도 있어서 부담스럽기도 해요. 특히 이번에는 저 임세경의 이름을 보고 오시는 관객들도 있기 때문에 베로나 페스티벌 때보다 더 정돈되고 성숙한 ‘아이다’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는 지난 10월 1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베로나 축제 때와 달리 눈앞에 있는 관객을 향해 노래하고 연기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베로나 축제는 매해 여름 3개월에 걸쳐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오페라 축제다. 이 무대에 마이크 없이 서는 것은 성악가에게 큰 영광이지만 동시에 공포이기도 하다.
1만 5000명 규모의 원형경기장에서 열리는 야외 축제라 뒤쪽까지 노래를 전달하기 위해 세계적인 성악가들도 최대한 큰 성량으로 노래하려 안간힘을 쓴다. 베로나 축제 이후 유럽 관객들은 작은 체구에 청아한 목소리로 폭발적 성량을 자랑하는 소프라노 임세경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베로나 축제에 출연하는 성악가들의 가장 큰 목표는 노래를 크게 부르는 거예요. 출연자들은 무대 곳곳에 숨어 있는 마이크를 찾아다니느라 바쁘죠. 야외 축제다 보니 아기들이 울기도 하고, 배고픈 관객들은 빵을 먹기도 하죠. 공연에 집중할 수 있는 무대는 아니지만, 섬세하면서도 찌르는 듯 폭발적 창법을 구사하는 ‘리릭 스핀토’ 소프라노인 저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내년 여름 베로나 축제도 이미 초청 받았어요.”
임세경은 “베로나 무대에서는 소리도, 행동도 다 커지고 과해졌던 것 같다”며 “이번에는 1막부터 4막까지 인물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그려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12월 열리는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임세경뿐 아니라 국내 정상급 성악가들이 대거 출연한다. 메조소프라노 이아경, 테너 이정원, 베이스 손혜수 등 국내외 오페라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연주자들이 함께한다.
1975년 전주에서 태어난 임세경은 어린 시절 자신이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전주KBS 어린이합창단에서 노래 부르는 기본을 익혔고, 고3 때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온 옆집 오빠의 노랫소리가 마음을 이끌었다. 서울대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던 옆집 오빠의 레슨으로 수업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한양대 음대에 합격했다.
대학 시절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임세경에게 유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다 대학 4학년 때 가볍게 떠났던 이탈리아 여행이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피아노학원에서 아르바이트로 받는 월급을 모아 밀라노로 떠났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이탈리아 고어를 외워가며 베르디국립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솔리스트 전문 연주자 과정에 지원했다. 200명이 넘는 경쟁을 뚫고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합격했지만 스승은 레슨 2년 과정 내내 그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으며 냉대했다.
타고난 성량에 연기력 조화로 유럽 각국서 ‘러브콜’
임세경의 스승은 터키 출신 레일라 겐서였다. 마리아 칼라스의 계보를 잇는 전설적 소프라노로 라 스칼라 극장의 대모였다. 레일라 겐처의 마지막 레슨이 다시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레일라 겐서는 임세경이 부르는 ‘나비부인’의 아리아를 듣고 “너의 진정성을 내가 알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임세경은 스승의 권유로 1년 더 스칼라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2년 과정인 스칼라 전문 연주자 과정을 장학금까지 그대로 받으며 1년 더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행운이지만, 이미 과정을 마친 그에게 스칼라 극장 무대에 오페라 단역으로 서게 되면서 오페라 인생의 커리어가 쌓이기 시작했다. 임세경은 “선생님이 주신 가장 큰 아이디어는 외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이고, 언어로 노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면서 “무대에서 어떻게 발성하고 연기해야 하는지, 오페라의 전체적인 것을 알려주신 잊지 못할 분”이라고 했다.
2007년 이탈리아 도니제티극장에서 오페라 ‘파리지나’에 출연한 임세경은 이후 아르침볼디, 라 스칼라 극장에서 수십 편의 오페라를 리카르도 무티를 비롯한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공연했다. 타고난 소리와 압도적인 성량, 뛰어난 연기력의 조화로 무대마다 돋보이는 그를 주목한 유럽 각국의 극장들이 그를 불렀다. 세계적인 오페라 잡지들은 ‘전율을 느끼게 하는 성량과 혼연일치된 소리로 연기’하는 작은 한국인 ‘리릭 스핀토’ 소프라노의 등장을 환호하며 반겼다.
▶ 1 지난해 10월 플라시도 도밍고가 지휘한 빈 국립오페라극장의 ‘토스카’에 주역으로 출연했을 때의 모습 ⓒ임세경 2 2017년 여름에 열린 베로나 아레나 페스티벌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의 주인공 ‘초초상’으로 출연한 모습 ⓒ임세경 3 지난 4월 6일 국립오페라단 ‘팔리아치&외투’ 공연사진. ‘팔리아치’에서 화려한 넷다로 보였던 임세경이 ‘외투’에서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조르젯타로 나오며 격차가 큰 ‘감정의 점핑’을 연기했다. ⓒ국립오페라단
2015년엔 한국인 리릭 스핀토 소프라노로는 최초로 비엔나 빈 슈타츠 오퍼 극장에서 오페라 ‘나비부인’ 주역으로 공연했으며, 그해 8월에는 이탈리아 베로나 축제의 ‘아이다’ 주역으로 발탁됐다.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 102년 역사상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올해 봄과 여름, 빈 슈타츠 오퍼 극장과 베로나 축제에 다시 섰던 그는 독일, 헝가리, 미국, 그리스 등 전 세계 공연을 이어왔다.
임세경은 국내 공연 요청을 마다하지 않는다. 2008년부터 국립오페라단의 대표작을 비롯해 국내 오페라 무대도 꾸준히 지켜왔다. 특히 올해는 국내 공연이 더욱 활발하다. 국립오페라단의 ‘팔리아치’와 ‘외투’에서 열연, 호평을 받은 데 이어 10월 창원 공연에 이어 12월 서울에서 ‘아이다’를 공연한다. 내년에는 스페인, 독일, 일본, 핀란드, 이탈리아 오페라 공연이 예정돼 있다.
그는 “많은 아티스트가 국내 공연을 솔직히 두려워한다”면서 “국내에서 잘해내면 외국에 가서 더 좋아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그의 스승 곽신형 한양대 명예교수는 “임세경이 세계 최고의 무대에 갈 때까지 체크해줄 것”이라며 지방공연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올 정도로 애정을 보인다.
임세경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와 푸치니의 ‘외투’라는 별개의 두 오페라에서 1인 2역을 연기했다. ‘팔리아치’에서는 유랑극단 배우이자 극단 단장의 아내 ‘넷다’를 연기했고, ‘외투’에서는 가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인 ‘조르젯타’ 역을 맡았다. 임세경은 “처음엔 요부로 나왔다가 다음 작품엔 청소부 아줌마로 나오니까 관객들이 어리둥절해한다”며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드는 역할은 플라시도 도밍고 선생님과 함께한 ‘토스카’”라고 했다.
임세경은 “도밍고 선생님은 팔순을 넘겼는데도 자신의 무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며 “국경을 넘나들면서 공연을 하면서도 리허설을 위해 늦은 밤 다시 연습실에 나오는 열정을 보며 거장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세경도 만만치 않은 ‘연습벌레’다. 오페라가 끝나면 공연 녹음테이프를 들고 숙소로 돌아가서도 밤새워가며 오페라의 처음부터 끝까지 바둑의 복기처럼 다시 부르곤 한다.
최근 오페라는 음악적 기량은 최대한 발휘하되 관객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이 편안하게 관람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는 추세다. 이런 경향이다 보니 이제는 성악가가 사랑과 슬픔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연기’를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됐다고 그녀는 말했다.
임세경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인 성악가들은 소리는 정상급이지만 연기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면서 “우리나라가 세계 정상급 성악가를 계속 키워내려면 재능 있는 학생들을 일찌감치 발굴해 해외로 내보내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빛나는 가수로 롱런하는 것이 제 꿈”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들면 소리 빛깔 자체가 변하게 되니 맑아지게 하는 것은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고, 관객들이 연극을 보는지 오페라를 보는지 헷갈릴 정도로 연륜과 내공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오동룡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