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기술사사무소를 운영하는 기술사가 책을 펴냈다. 공원은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천착한 게 시작이었다. 늦깎이로 시작한 석·박사 공부를 통해 ‘이과쟁이’가 공간에 스토리텔링을 입히는 ‘인문학쟁이’로 변신하게 됐다. <시네마 스케이프>는 영화 속 도시 풍경을 감성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그 안에서 그는 도시 재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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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기술사사무소 ‘이수’ 서영애(52) 소장은 서울시립대에서 조경학을 공부한 후 곧바로 건축설계사무소에 몸을 담았다. 당시만 해도 조경기술사사무소가 별도 독립돼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적당히 일하다 적당한 시기에 결혼해 주부로 살고 싶었는데 현실이 마음 같지 않게 풀렸다. 사무실을 드나드는 거래처와 인맥이 늘어나고 능력도 꽤 인정받는 기술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동업계 종사자와 결혼하고 아예 독립된 조경기술사사무소를 차리게 됐다. 잠재력을 무시하고 있다가 일복이 터지고 나서 능력을 깨달은 것. 이제 그는 50대 이상에선 보기 드문 현역 여성 조경기술사로 맹렬히 활동 중이다.
남들과 엇비슷하게 일하다 경관의 해석에 좀 더 눈을 뜨게 된 건, 서른일곱 때 석사논문을 쓰면서부터였다. 학위 논문 주제를 영화 속 도시경관 해석으로 정하면서 공부가 늘었다. ‘이과주의자’의 별스러운 주제가 세상에 나온 데는 교수의 적극 추천도 한몫했다.
“조경기술사라는 직업이 어찌 보면 말이 디자이너지 시쳇말로 노가다 같은 강도 높은 노동인데 만날 좋기만 한 건 아니죠. 힘들고 지루할 때도 있었는데 대학원에 들어가니 너무 신선하고 공부가 재미있는 거예요. 논문 주제를 정하고 자료가 너무 없어 막막한데도 오기가 생기고 그래서 더 재미있었죠.”
미친 짓이다, 가당치 않게 영화비평가 흉내를 낸다는 질책과 걱정도 샀다. 그럴수록 포기하지 않고 더 매달렸다. 문화지리학을 공부하고 영화 미장센을 이해하기 위해 영상기호학까지 탐독하고 공부했다.
박사과정까지 이어진 공부는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석사논문을 계기로 특강을 하면서 중간중간 강연 요청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냥 보는 것으로서의 ‘공간’이 아닌 감성과 스토리를 입힌 ‘장소’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원스’나 애니메이션 ‘업’ 등 원래 좋아했던 영화 이야기로 월간지 <환경과 조경>에 칼럼 연재를 시작한 것이 3년 전. 이후론 주로 매달 개봉하는 영화를 소재 삼아 연재를 이어갔다.
마침내 지난 9월 글을 모두 묶어 <시네마 스케이프>를 발간했다.책을 낸 이후에도 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엔 위안부 소재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다뤘다. 위안부 이야기는 전혀 언급 없이 동네 재래시장을 소재로 도시재생을 주제로 잡아냈다. 근작 영화 ‘남한산성’ 개봉 때는 남한산성을 비롯 한양도성 등 우리나라 옛 산성들을 공간의 유래와 역사를 엮어 풀어낼 예정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 ‘공원은 왜, 어떻게 생겨났을까’라는 물음을 집과 시장, 산성 등 영화 속 일상의 공간 모두로 확대해가는 것.
그가 하는 일련의 작업은 정부와 지자체가 추진하고 있는 도시재생과도 연관 있다. 도시재생은 막연한 건설이 아니라 기획과 스토리텔링을 필요로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건설과 달리 조경은 잉여에 해당돼요. 고성장 시대여야 투자환경도 좋고 실제 사업이 흥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경기가 하강해 분위기가 가라앉은 편이에요. 한마디로 토건 전성시대가 지나간 거죠. 여기에 상응해 나오는 개념이 도시재생인 것 같아요. 새로 지을 공간과 투자환경이 부족하니까 있던 걸 재생하고 바꾸는 작업이 주가 된 거죠. 신도시가 아니면 이제는 새로운 공원 하나 만들 수 없어요. 그러니 돈이 되는 사업이 줄었죠(웃음). 하지만 있던 공간을 가지고 활용 콘셉트를 잡고 문화를 기획하고 코디네이팅 하는 트렌드는 바람직하고 재미있어요. 공간을 누구랑 어떻게 활용하고 즐길 것인가를 기획하는 건 설계자나 소비자나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 도시재생의 본질도 거기서 출발해야겠죠.”
최근 오픈한 서울 상암동 문화비축기지나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와 함께 오픈된 돈의문 박물관마을 등은 그가 말하는 문화기획 차원에서 만들어진 도시재생 사례다. 전통적 의미의 조경은 갈수록 수요가 좁아지는 반면 문화적 접근이 가미된 조경, 그리고 도시재생은 점차 수요가 늘어갈 것이라고, 그는 전망한다.
“옛날 같은 토목과 조경 사업은 점점 드물어질 거예요. ‘다리 하나 놓으면 몇 백 억 한다’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자잘하게, 아기자기하게 문화적 전문성을 살려야 하는 시대인 듯해요. 그래서 제가 이런 쪽으로 논문도 쓰고 책도 쓰고 있는지 몰라요(웃음).”
도시재생은 생태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접근해야
그의 말마따나 조경은 잉여 또는 사치라는 편견이 강한 편이다. 대규모의 자본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도 일반적이다. 그러나 요즘은 생활조경도 일반화되어 도시농부, 베란다 텃밭 같은 가드닝 트렌드도 늘어나고 있다. 서 소장은 이를 도시민들의 삶의 질 변화, 높아진 문화적 욕구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다만, 이것이 취미를 넘어 산업화까지 이어질 것인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조경에 대한 오해가 몇 가지 있어요. 조경이 무조건 큰 사업만은 아녜요. ‘에코 스쿨’이란 게 있는데, 지자체에서 1~2억 원 정도를 지원해 학교를 예쁘게 바꿔주는 작업이죠. 조경은 부정적인 토건사업을 미화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도 오해입니다. 청계천에 나무나 심어 치장해준 거 아니냐는 식의 말 있잖아요. 실제로 조경은, 공원이나 가로, 아파트 외부 공간 등 건축물 빼고는 다 해당되니 범위가 매우 넓어요. 토목과 달리 공간의 생태적 특성을 살리는 작업이지요. 도시재생도 그런 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요.”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돈의문 박물관마을도 도시재생사업으로 잘 복원은 됐지만, 어떻게 운영할지는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 건축가가 추구한 콘셉트와 양태가 복원되고 유지되기 위해선 공간을 최적 활용하는 문화기획이 수반돼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제는 공간을 만들어만 놓고, ‘와서 노세요’ 하는 시대는 아니죠. 더 면밀한 기획이 있어야 정착하는 시대인 것 같아요.”
<시네마 스케이프>에 소개한 장소 중 그가 가장 마음에 든 곳은 어디였을까. 인터뷰 중 가장 여러 번 사례로 제시했던 곳,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였다. 한 단면이 아니라 오래도록 누적된 세월과 일상이 배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란다. 감독 우디 앨런의 영화엔 30년 이상 센트럴파크가 등장한다. 그 영화에 나타난 갖가지 이야기와 등장인물의 일상이 그 공원과 함께 기억된다는 것은 기록할 만한 경이적인 사실이라고.
“센트럴파크에 반해 우디 앨런 영화를 소재로 소논문을 썼을 정도였죠. 센트럴파크가 등장하는 그의 영화는 다 모았어요. 그처럼 사실적으로, 일상성 위주로, 꾸준히 영화를 찍은 이는 없을 거예요. 센트럴파트를 거닐 때 마차 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기가 바로 우디 앨런 집이라고 알려준 게 기억납니다. 그가 표현한 영화 속 일상에 감독 자신이 들어가 있다니… 참 재미있고 부러운 일이죠.”
기획된 것보다 우연성과 일상성이 좋다는 그는, 여백이 있어 다 가르쳐주지 않는 영화, 삶을 돌아볼 시간을 주는 영화, 이미지가 남는 영화를 찾아 오늘도 영화관을 기웃거린다.
영화로 읽는 도시 풍경 <시네마 스케이프> 5선
브루클린
그녀의 결정은 본인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순탄한 삶을 저절로 부여받게 될 안정된 장소(아일랜드)와 어려움을 극복하며 획득한 자신감으로 스스로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된 장소(브루클린)를 두고 고민하게 된다. 건축 이론가 노베르그 슐츠는 장소란 “실존의 의미 있는 사건을 경험하는 초점”으로 사건과 행위는 장소의 맥락에서만 의미 있다고 강조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녀를 인정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고,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렇게 낯선 공간에 자신만의 경험과 기억이 쌓여 새로운 정서와 의미가 생기면서 장소가 된다. 브루클린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로운 세계관을 바탕으로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특별한 곳이라곤 없어 보이는 장소와 그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는 것은 장소와 사람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탐색의 결과다. 감독이 처음 고조에서 느꼈을 오래된 풍경의 느낌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진다. 고조에 대한 안내는 덤이다. 고조의 자연과 인문 사회환경에 대해 책으로 공부한들 이렇게 생생하게 알 수 있을까. 영화제 측은 적은 투자로 고조라는 도시를 알리는 전략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원스’와 ‘비긴 어게인’
영화 ‘비긴 어게인’은 감독(‘원스’의 감독)이 더블린에서 관객 몫으로 남겨둔 여운을 뉴욕으로 장소를 옮겨 일일이 주석을 달아 친절하게 설명하는 완결형 영화다. 주인공들이 노래하는 센트럴파크, 지하철, 옥상, 골목길은 그들의 진심이 전해지는 장소라기보다는 관광객을 위한 예쁜 그림엽서 같다. 좀 더 삐딱하게 보자면 광화문 뒷골목에서 함께 소주를 걸치던 친한 친구가 오랜만에 만났더니 진짜 술맛은 비행기 일등석에서 마시는 샴페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위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뉴욕에서 보내온 그림엽서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긴 하다. 이 가을 마룬 파이브 리드싱어 애덤 리바인의 섹시한 음색과 판타지에 풍덩 빠지고 싶다면 ‘비긴 어게인’을, 진짜가 주는 날것의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오래전에 보았던 ‘원스’를 한 번 더 보길 권한다….
암살
안옥윤은 안경을 사러 백화점에 들어서는 순간 빨간 카펫과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곳에 기노모와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는 내부 풍경에 놀란다. 2층에서 벌어지는 최고위층의 결혼식 장면은 당시 백화점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아네모네 사장이 카페에서 자결하는 비극적인 장면 다음으로 백화점과 전차와 사람들로 붐비는 선은전 광장의 스펙터클이 대조적으로 이어진다. 피지배자가 체험하는 민족과 근대, 전통과 낯섦,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너의 이름은
도시의 풍경 역시 아름답게 재현된다. 복도식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자 타키의 몸이 된 미츠하의 눈앞에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미천루와 도시의 공원이 펼쳐져 있다. 공사 중인 도로에 꼬리를 문 자동차, 엄청난 사람들로 붐비는 전철, 옥외광고의 조명 등 활기찬 도시의 모습이 묘사된다. 친구들과 처음 가본 카페는 미츠하에게 경이 그 자체다. 형형색색 예쁜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는 세련된 도시인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소비를 위해서는 그만큼 희생도 따른다. 방과 후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하느라 늘 바쁘게 지내야 한다. 빠르게 하루가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은 스펙터클하다. 도시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이상문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