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단순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많이 보려고 하지 말고, 많이 참견하려 하지도 말고, 약속도 줄이고, 침묵과 고요의 시간을 갖고.
7, 8년쯤 되었을 것이다. 저녁을 먹지 않는 일이. 저녁을 먹지 않으니 저녁 약속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러고 나니 저녁 시간이 한가하다. 낮에는 강의도 있고 사람도 만나니 어쩔 수 없이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의식적으로 침묵하는 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말 많은 사람이 될 것 같아 결단으로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녁의 고요가 좋다. 때때로 나는 조용한 밤을 기다린다.
추석 무렵 대학생 조카가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강추했다. 너무너무 재미있다고. 그 얘기를 하는 조카의 눈빛과 표정이 보물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빛이 났다. 추석 때 조카들과 얘깃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왕좌의 게임’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편만 볼 생각이었는데, 세상에 뭘 그렇게 유혹적으로 만들었는지 연휴 내내 시리즈 전체를 보고 말았다. 그 긴 것을 어떻게 봤는지도 모르게.
북왕국 윈터펠은 겨울왕국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을 가훈으로 삼는다. 지금 추위는 추위도 아니라며 진짜 겨울과 함께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가 오고 있단다. 그 가문의 영주, 타협할 줄 모르는 용맹한 사내가 함정에 빠져 어처구니없이 죽어갈 때는 주인공을 저렇게 쉽게 죽여서 어떻게 드라마를 끌고 갈까 싶어 다음 편을 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처녀가 숱한 사건을 겪으며 자기의 힘을 인지해가고 세력을 규합해갈 때는 괜히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전쟁까지 불사하며 간절히 원했던 여인을 잃은 왕이 젊은 날의 사랑을 추억하는 대목에선 심쿵하기도 했다. 그때 그 여인의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때 생긴 마음의 빈자리는 7왕국 전체로도 채우지 못했단다. 우리가 느끼는 마음의 허기의 본질을 그렇게 콕 집을 수 있을까. 어리석음 때문에 죽어간 그 왕을 어리석다 느끼지 않고 인간적이라 느낀 이유이기도 하다.
무능한 독재자, 유능한 독재자, 잔인한 왕, 멍청한 왕, 잔인하고 멍청한 왕,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으나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망가진 아들, 전략만 있고 인정사정은 없는 부친을 살해하고 적의 조언자가 된 난쟁이, 엄마의 자궁에서부터 함께했던 남매 오시리스와 이시스처럼 사랑한 남매들의 근친상간, 동성애, 예언, 부활 등 온갖 금기들이 다 나오는데도 막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거기 온갖 유형의 인간이, 우리의 성격들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추석에 조카들과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렇게 몰입해서 TV를 볼 때는 몰랐다. TV 때문에 내가 얼마나 산란해졌는지. 가만히 앉아 묵상하는데도 스타크 가문의 사람들이, 대너리스가, 티리온이, 머저리가 어른거린다. 드라마 한 편은 시간을 느낄 수 없게 훌쩍 지나가는데, 드라마 한 편 보는 시간의 묵상은 너무나 길고 지루해진 것이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오만 가지 영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왜 수행처에 TV가 들어오면 영성의 파산선고와 같다고 했는지도.
물론 TV 보는 일이 뭐 그리 나쁜 일이겠는가. 머리를 식혀주고 무료함을 달래줄 좋은 프로그램도 많다. 그러나 TV와 적당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성찰의 힘은 붙지 않는다. 나는 바깥 영상에 또는 바깥일에 온갖 시선을 빼앗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밤 놔라, 대추 놔라 참견하는 사람보다는 밤 놓고 대추 놓은 사람을 존중해주고 그들의 문제는 그들에게 놔주고, ‘나’를 만나는 시간,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감정과 정서를 돌보는 시간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 시간을 낼 수 있어야, 그 시간을 사랑할 수 있어야 중심을 잡고 살 수 있다. 그래도 ‘왕좌의 게임’은 잘 봤다.
이주향 |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