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모티프로 만든 평창동계올림픽 금·은·동메달은 베일을 벗자마자 큰 화제를 모았다. IOC와 국제경기연맹으로부터 역대 올림픽 메달 중 가장 신선하고 창의적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대중의 호평도 쏟아졌다. 메달을 디자인한 이석우 디자이너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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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에요. 올림픽이나 큰 행사는 신경이 많이 쓰이거든요. 디자인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대중이 별로 안 좋아할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이슈가 생기기도 하잖아요. 굉장히 부담스러운 작업인데 다행히 피드백이 괜찮은 것 같아요.”
‘신선하고 창의적이다’, ‘선수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 ‘한글을 이렇게 세련되게 해석할 수 있다니 놀랍다’ 등 평창동계올림픽 메달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다. ‘기분 좋음’보다는 ‘다행’이라는 마음이 더 크다는 이석우 디자이너가 인터뷰를 위해 그동안 작업했던 샘플들을 꺼내 보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메달 작업은 의미 부여가 중요해요. 저는 두 가지에 주안점을 뒀어요.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과 로컬리제이션(localization)이에요. 올림픽 경기에는 글로벌한, 인류의 다양성이 담겨 있잖아요. 선수들이 인고의 과정을 거쳐 기량을 쌓아 경기를 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을 표현해야 하죠. 동시에 지역적인 특색, 국가적인 특색도 보여줘야 해요. 이를 바탕으로 상징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석우 디자이너는 우리 언어인 한글을 모티프로 한국적인 세련미를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한글이 갖는 상징성과 동계올림픽의 정체성을 접목시킨 것이다.
“한글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요소를 갖고 있어요. 지역적인 미학이나 소재로도 좋죠.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요. 미개인들에게 한글을 쓰라고 권한다고 하잖아요. 한글을 소재로 아트워크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독특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죠.”
메달 앞면은 올림픽 전통에 따라 오륜을 배치했고, 선수들의 노력과 인내를 역동적인 사선으로 디자인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입을 모으는 이번 평창동계올림픽 메달의 하이라이트는 측면 디자인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이공일팔’의 자음과 모음의 조합 중 자음의 ‘ㅍㅇㅊㅇㄷㅇㄱㅇㄹㄹㅁㅍㄱㅇㄱㅇㅇㄹㅍㄹ’을 메달의 측면에 입체적으로 표현해 눈길을 끈다.
“저는 한글을 평면적으로, 그래픽적으로만 해석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한글을 입체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실험을 했어요. 한글이 커가는 것과 문화가 커나가는 것, 선수들의 기량이 커져가는 것까지 감안한 결과물입니다.”
메달을 목에 걸 리본도 한국적인 소재를 이용해서 정체성을 살렸다. 전통 한복 특유의 갑사 기법을 통해 한글 눈꽃 패턴과 자수를 섬세하게 적용했다.
“하계올림픽은 메달 규정이 엄격해요. 소재도 메탈만 써야 하는 등 가이드가 명확하게 있어요. 상대적으로 동계올림픽은 규정이 열려 있어요. 소재도 적극적으로 쓸 수 있고, 디자인도 열려 있어요. 그만큼 나라별로 의미 부여나 소재를 다양하게 할 수 있어서 재미있죠.”
산업디자이너인 이석우 디자이너는 작업의 폭이 넓다. 휴대전화를 비롯한 각종 IT 제품 디자인 작업을 했던 그는 주로 인공지능 디바이스 작업을 하지만 최근에는 디자인 트렌드대로 영역이 파괴되어 칫솔 디자인, 아파트 전경 및 시공 등 작업 영역이 크게 확장됐다. 조명과 가구 디자인 등도 그의 중요한 작업물이다. 그래서인지 메달 디자인 역시 재미있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하계대회 비해 메달 규정 개방적, 작업 내내 재미 느껴
이번 평창동계올림픽 메달 작업은 작년 5월부터 시작했다. 최종 디자인이 나온 것은 10월경. 이후 해를 넘겨 최종 버전이 탄생하기까지 많은 수정·보완 과정을 거쳤다. 준비 작업이 길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제조 공정상의 문제다.
“후처리 과정에서 조폐공사와 함께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대량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꽤 까다롭더라고요. 입체적으로 만든 것도 그렇고, 측면에 한글을 새기는 것도 다양한 시도를 거쳐야 했어요. 메달의 크기와 무게도 계속 조율해나가야 과정도 거쳤어요. 그래서 초반 과정과 최종 버전에 차이가 좀 있습니다.”
메달이라는 특수성도 일반 디자인과는 다른 지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메달은 사진촬영을 했을 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메달은 디자인 자체도 예뻐야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조건도 많아요. 목에 걸었을 때 눈에 잘 띄어야 하고, 사진을 찍었을 때 잘 보여야 해요. 5m, 3m에서도 아름답게 보일 수 있어야 해서 입체감을 살렸어요. 밋밋한 평면보다는 꼬였을 때 입체감이 살아나서 잘 보이게 되죠.”
한복 소재로 만든 리본 역시 사진 촬영을 감안해서 최종 컬러가 정해졌다. 실제로 봤을 때 아름다운 것도 중요하지만, 사진으로 찍었을 때 잘 보이는 것이 중요해서 채도가 처음 버전보다 진해졌다.
“저는 1986년 아시안게임을 경험했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 1988년 서울올림픽을 봤어요. 1988년 올림픽 때 어머니가 ‘올림픽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비디오 녹화를 해라’라고 하셨던 게 생각나요. 40대에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있는데, 올림픽에 조금이나마 참여한 것이라서 의미가 있습니다. 모두에게 축제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임언영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