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모 세계적 패션잡지 표지에 해외 유명인 커플 사진이 실렸다. 이들은 화려한 무늬의 슈트를 차려입고 다정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눈에 띄는 건 두 사람이 당장 옷을 바꿔 입는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다수의 여성 유명 인사들은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드레스를 입을 법한 장소에서 슈트를 착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짧은 시간 동안 한눈에 당당함을 표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남성 영역에 도전하는 문화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해외 여성들이 지향하는 도전적인 삶을 알아봤다.
▶ 비비아나 스타인하우스가 독일 분데스리가 사상 최초 여성 주심으로 데뷔했다. ⓒ연합
“나는 갈매기, 기분 최고.” 세계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가 우주에서 지구로 보낸 첫 송신이다. 1963년 6월 16일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보스토크 6호가 굉음과 함께 발사됐다. 성공적으로 우주에 진입한 이 우주선의 조종사는 26세의 러시아 여성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였다.
그는 우주선에 홀로 몸을 실은 채 70시간 50분 동안 지구를 48바퀴 선회한 뒤 지구로 귀환했다. 그의 우주비행은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우주비행에 대한 선입견을 타파하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소련을 통치하던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여성은 약하지 않다”며 테레시코바의 공적을 대내외적으로 공식 인정했다.
테레시코바의 우주비행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다. 앞선 우주비행사들이 엘리트 군인이었던 데 반해 그는 민간인, 특히 노동자 계급이었다. 때문에 테레시코바를 통해 ‘누구나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사회적 인식을 깊이 심어줬다. 그의 우주비행은 남녀 비행사의 우주 도킹이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테레시코바를 에스코트한 것은 발레리 비코프스키 중령이 조종한 보스토크 5호. 두 사람은 우주 속에서 통신을 이어가며 주요 임무 수행을 마쳤다.
미국 최초 여성 하원의원 저넷 랭킨은 남성의 대표 영역이라 여겨지던 정치권 내 여성 진출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대표적 인물이다. 정치 부패의 원인 중 하나로 여성의 정치적 참여가 부족한 점을 꼽았던 그는 직접 변화를 주도했다. 1914년 11월 몬태나 주가 여성의 참정권에 대한 제한을 풀어버린 것과 맞물리며 랭킨에 힘이 실렸다. 랭킨은 유난히 넓은 몬태나 주 전역을 돌며 선거운동에 나섰고 7500표 이상을 얻어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랭킨의 당선 사실은 100여 년이 흘렀음에도 여성 정치인이 두각을 나타낼 때마다 거론되곤 한다. 랭킨이 여성 정치 참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한다.
최근 독일 분데스리가 경기에서 선수보다 심판에게 전 세계 시선이 집중된 적이 있다. 독일·스페인·이탈리아·잉글랜드·프랑스 등 유럽 프로축구 5대 빅 리그를 통틀어 남자 경기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주심을 맡았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축구 심판으로 활동해온 비비아나 스타인하우스는 지난 5월 새 시즌을 앞두고 발표된 주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축구 경기에서 여성 주심은 흔한 편에 속한다. 그렇지만 남자 경기에서 여성 주심이 판정을 내리는 경우는 드물다. 스위스 출신 니콜 패티냇이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스위스 1부 리그 주심과 유럽축구연맹(UEFA)컵 경기 주심을 맡은 것을 제외하곤 유럽 빅 리그에선 여성 주·부심이 경기를 이끈 사례는 없었다.
▶ 1 최근 총선에서 승리, 4선 연임에 성공하며 전후 독일 최장수 총리로 기록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연합 2 여성의 운전금지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로 운전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 ⓒ뉴시스
남성 주 무대에 능력으로 맞선 여성들
한 가지 더 특기할 점은 독일축구협회는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의 축구 경기 참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축구 문화 속에서 스타인하우스가 보여준 성과는 성역을 허문 여성의 도전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 역시 “축구협회가 보여준 신뢰는 심판 업무에서도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언급했다.
딱딱하고 남성적인 이미지를 지울 수 없는 건축 영역에서도 세계 여성들의 입지가 굳건해지고 있다. 2004년 건축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의 최초 여성 수상자 자하 하디드가 대표적. 이라크 출신의 하디드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건축물에 그만의 유기적인 선과 형태를 입히는 도전 정신은 여전히 남성이 주인공으로 평가받는 건축 영역에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냈다.
인도에서는 여성 해군 장교 6명이 요트 세계 일주 도전에 나섰다. 도전에 성공하면 인도 최초로 여성에 의한 요트 세계 일주라는 새 역사를 쓰게 된다. 이들의 도전 목표는 ‘여성은 힘들고 거친 일을 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다른 여성에게도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함이다. 인도 고아 항에서 출발해 호주 프리맨틀과 뉴질랜드 리틀턴,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등을 거쳐 내년 초 귀항할 계획이다. 항해 거리는 2만 1600해리다.
일본인 다베이 준코는 1975년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산에는 유리천장이 없었다. 그는 남성 산악인들도 혀를 내두르는 코스 등반에 성공하며 ‘여성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각인시켰다. 앞서 다베이 준코는 일본 최초로 여성산악인클럽(LCC)을 결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LCC는 스위스 마테호른, 안나푸르나 등을 오르며 산악인으로서 명성을 얻으며 여성 등반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70대에 이른 다베이는 위암 판정을 받은 뒤에도 일본과 세계 각국의 산에 오르는 일을 이어갔다. 세계 190여 개 국의 가장 높은 산을 오르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60여 곳에서 목표를 이뤘다.
성역을 파괴한 여성의 도전은 당연하게 성별을 구분 짓던 곳곳에서 변화를 이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의 운전을 금지해온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난달 사상 처음으로 여성에게 자동차 운전을 허용했다. 국왕이 여성 운전 허용 칙령을 발표함에 따라 2018년 6월까지 모든 여성은 자동차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됐다.
일반적으로 여성 운전자는 남성의 영역에 도전한 사례로 평가할 수 없으나 사우디아라비아는 예외다. 이슬람국가 중에서도 강한 보수적 성향을 드러내는 사우디는 여성의 사회활동을 엄격히 제한해왔다. 여권 취득이나 여행을 위해서도 여전히 남성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부터 여성의 권리가 제한된 사우디이기 때문에 이 변화가 특별하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신입생들이 신학기 등록 기간에 자신의 성을 표기할 때 남성 또는 여성이 아닌 중립적인 성 ‘ze’나 ‘they’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보수적인 문화가 자리 잡은 교육기관에서도 성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한 마케팅도 등장했다. 스페인 완구 기업인 토이 플래닛은 사람들의 흔한 관념과 반대로 공룡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 모형 유모차를 미는 남자아이의 모습을 담은 광고를 연출했다. 장난감조차 젠더적 성격을 부여하는 사회 문화를 지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근하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