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도 평면은 지루하다. 360도 구석구석 돌려가며 볼 수 없을까? 무버(Mooovr)는 360도 가상현실(VR)의 1세대 기업이다. VR란 단어조차 생소하던 2011년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 최초로 네 시간에 가까운 프로야구 중계와 한류 콘텐츠를 선보이며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C영상미디어
대화 내내 단단한 내공이 느껴졌다. 스타트업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색할 정도다. 무버(Mooovr)는 2011년 설립된 360도 VR 토털솔루션 업체다. KT, 네이버 등 국내 기업들과 캐논, 소니, 파나소닉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전 세계 360도 VR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투자까지 확보하며 연 매출이 5억 원. 30억 원 달성이 무난할 때도 있었다. 대화를 마칠 무렵 역시 괜히 나온 내공이 아니란 생각에 이르렀다. 짧은 시간에 수차례 시행착오를 견디며 차근차근 내실을 쌓아온 터였다.
김윤정 무버 대표의 뿌리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CJ미디어, 연예기획사 등에서 일했다. 손담비, 가희 등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잘나가던 연예기획자가 회사를 박차고 나와 IT 산업에 뛰어든 것은 무심코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구글 스트리트뷰(길거리 정보 서비스)를 보며 “이걸 동영상으로 만들면 정말 재미있겠다”라고 했다. 지금은 많이 보편화됐지만 스마트폰으로 실사 촬영한 거리 모습을 보여주는 건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던 때였다.
동료들과 아이디어를 구체화해갔다. 정부에서 운영 방법과 자금을 지원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청년창업사관학교도 찾았다. 무버는 우수기업으로 선정돼 1억 원의 지원금을 거머쥐었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360도 상하좌우를 보며 동영상을 찍는 것. 이론적으로는 가능했으나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프로듀서, 콘텐츠 담당자와는 의기투합이 돼 있었지만 개발자가 없었다. 당시는 VR 산업 초기 단계로 세계에서도 기술자를 찾기 어려웠다. 진행이 될 만하면 오류가 생겼다. 자바(JAVA)를 이용한 요즘 기술이 아닌 원초적 영상 기술이 필요했다.
360도 자유자재 영상, 팬심 저격
기술자를 찾아 개발을 이어가는 사이 처음 기획했던 360도 동영상도 필요했다. 그 답은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찾기로 했다. 360도 카메라를 이용해 1초당 15프레임을 찍어 연결한 것이다. 마치 ‘움짤(연속 화면)’과 같았다. 대신 콘텐츠의 완성도를 높였다. 현직 감독, 배우, 작곡가 등이 대거 참여해 첫 뮤직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완전한 동영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각적으로는 자연스러웠다. 영상을 보고 국내외 러브콜이 쇄도했다.
사업을 이어가려면 투자가 필요했다. 물론 경쟁자는 없었다. 하지만 관심도 없었다. “VR가 뭐야?”, “그게 되겠어?” 투자처를 찾아 고군분투했지만 쉽지 않았다. 국내 대기업이 VR HMD(Head Mounted Display, 영상표시장치)에 휴대전화를 얹으며 관심이 생기기 시작할 때도 콘텐츠는 차순위였다. 우리나라는 HMD와 같은 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김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본질은 콘텐츠의 질이었다. 아무리 텔레비전이 좋아도 프로그램이 재미없으면 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VR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무버를 알아본 곳이 있었다. 실리콘밸리였다. 콘텐츠를 중시하는 관점이 같았고 무버는 VR계의 신데렐라로 급부상했다.
360도 VR와 한류의 접목. 연예기획자의 감이 김 대표를 깨웠다. 시너지 효과가 분명해 보였다. 무버는 윤상의 ‘Waltz’, 인피니트의 ‘BAD’, 비스트의 ‘뷰티풀 콘서트’, 포미닛의 ‘캔버스’ 등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였다. 또 ‘보이는 라디오’에서 이를 활용했다. 그룹 B.A.P가 게스트로 참여했을 때 360도 VR를 시도한 것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회수 40만 건을 넘으며 서버가 다운됐다. 기존의 보이는 라디오는 웹캠 분할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룹의 멤버 수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출연자의 얼굴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360도 자유자재로 화면을 움직일 수 있게 되니 팬들은 ‘우리 오빠’만 확대해서 볼 수 있었다. 팬심을 저격한 것이다.
▶ 360도 VR로 촬영된 그룹 ‘포미닛’의 ‘캔버스’ 뮤직비디오(위) 무버가 제작한 ‘무버리그’에 미러리스 카메라를 장착하면 360도 VR 촬영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 ⓒ무버
스타트업은 유지보다 지속 성장이 관건
무버의 다음 목표는 생중계 서비스였다. 고화질로 생중계를 할 수 있는 콘텐츠 기술은 마련한 터였다. 이제 필요한 건 대용량 네트워크였다. 때마침 우리나라 통신사들도 5세대(5G) 기술을 확보한 상황으로 그에 걸맞은 콘텐츠를 필요로 했다. 무버는 KT와 손을 잡았다. 무버와 KT는 프로야구를 360도 VR로 촬영해 네 시간 가까이 생중계했다. 1루와 3루, 포수석에 설치된 총 3대의 카메라는 실시간으로 경기를 전송했다. 세계 최초였다. 반응도 좋았다. 투자자를 찾지 못해 쩔쩔매던 것이 엊그제인데 5G 이동통신 시대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무버는 콘텐츠 제작업체로서 입지를 다졌고 KT는 5G를 선도한다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한류 콘텐츠와 스포츠 중계, 이 시장만 바라봐도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무버의 선택은 예상 밖이었다. 김 대표는 “스타트업이 성장하지 않고 유지하는 사업만 한다면 승산이 없다”고 말한다.
무버는 ‘무버리그’를 내놓았다. 무버리그는 카메라와 렌즈를 연결하는 장치다. 다른 업체들은 영상미를 좌우하는 요소를 기술력에서 찾았지만 무버는 달랐다. 애초에 좋은 촬영을 해야 좋은 결과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황별로 어떤 카메라와 렌즈 조합이 영상미를 높일 수 있는지, 화각과 스트리밍 속도는 어떤 게 좋은지 터득해왔다. 무버는 ‘무버리그’와 함께 노하우를 판매 서비스한다.
무버리그는 국내외 업체에 보급되고 있다. 김 대표는 해외시장을 주목했다. 북미, 인도, 일본, 캐나다, 싱가포르 등의 업체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최근에는 네덜란드 업체와 프리미어리그 경기 중계를 연구 중이다. 지난해 프로야구 생중계에서 지적된 거리감을 극복하고자 한다. 안전상 근거리 촬영이 불가한 스포츠 중계에서 초고화질 촬영으로 거리감을 줄일 계획이다. 필드를 뛰는 선수들의 신발 상표까지 보일 수 있게 함으로써 현장감도 살릴 것이다.
무버는 시장을 따라가지 않는다. 리드한다. 김 대표는 “IT 분야는 순식간에 가품이 나와 계속해서 다음 모델을 갖고 있어야 한다”며 “무버리그 역시 금방 가품이 나오겠지만 그 사이에도 우리는 진화한다”고 했다. 무버가 360도 VR 시장을 선도하는 것은 끊임없이 다음 시장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VR는 어떤 역할을 할까? VR 생중계로 공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이 VR로 표현될 것이다.
“VR가 4차 산업혁명의 중심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VR 역시 상호작용하며 이 시장은 확대된다고 본다. 그 가운데 당연히 무버가 있을 것이다.”
선수현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