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가 조금 넘는 일본 여행을 위해 트렁크에 15권의 책을 넣었다. 장강명의 <5년 만에 신혼여행>이나 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처럼 가벼운 책도 있지만 <사피엔스>나 <나, 소시오패스>처럼 제법 두꺼운 책도 있었다. 가져간 책을 다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후쿠오카에서 교토로 끝난 이번 여정 동안 가져간 책 15권을 전부 읽었다. 2주가 채 되기도 전에 ‘돗토리’에서 말이다. 밤에는 가져온 책을 아껴 읽기 위해 영화를 봤는데 헤아려보니 9편이나 됐다. 여행을 할 땐 그곳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는 습관이 있다. 도쿄의 키치 조지를 여행할 때 ‘구구는 고양이다’를 ‘다시’ 보는 식이다. 그렇게 히로시마가 등장하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일본 시골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하코다테가 배경인 ‘오버 더 펜스’, 가마쿠라를 둘러싼 가족 이야기 ‘바닷마을 다이어리’ 같은 일본 영화들을 봤다. 히로시마에선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보다가 반쯤 졸기도 했다.
이번 여행이 이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기차 여행’이었다는 점이다. JR패스를 끊고 거의 이틀에 한 번씩 도시를 바꿔가며 여행했다. 단지 기차를 더 오래 타기 위해서였다. 기차만큼 책 읽기 좋은 장소를 발견한 적이 없다.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맥박과 리듬, 주위의 적당한 소음들, 무엇보다 끝없이 바뀌는 창 밖 풍경은 내게 책 읽기 최적의 상태를 제공한다. 책을 읽다가 종종 멈추고 먼 곳을 보는 버릇이 있는 나는, 바뀌는 풍경들 속에 갓 읽은 따끈한 문장의 잔상을 놓아둔다. 생각은 깊어지고, 몸은 나른해지며, 책과 풍경이 뒤섞인 자리에선 이전에는 생각지 못한 뜻밖의 단상이 피어난다. 남들에게 피해 입히지 않는 걸 생활철학으로 알고 있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 때문에 기차 안은 고요하기만 하다.
나가사키에선 신칸센 대신 보통 열차를 일부러 골라 타기도 했다. 읽고 있던 <심리조작의 비밀>의 결말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충동적으로 ‘우동 버스’를 타볼까 싶어 갔던 다카마쓰(사누키)의 기차 안에선 헨리 밀러를 읽고 있는 미국인 남자를 발견했고, 가고시마의 열차에선 십자말풀이를 하는 독일인 부부가 읽고 있던 책이 궁금했다. 코믹북을 읽는 남자아이, 교복을 입은 채 로맨스 소설을 읽던 여자아이와 자세가 꼿꼿한 일본 할머니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교토행 열차에서 읽은 <닥터 도티의 삶을 바꾸는 마술가게>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의도는 재미있는 친구다. 그래서 뇌는 자신의 의도를 어디에 놓건 그것을 보게 된다. 특정 형태의 차량을 사겠다고 생각하고부터 어느 순간 가는 곳마다 정확히 그 형태의 차량을 보게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그 자동차를 마술처럼 눈앞에 나타나게 한 것이 당신의 의도일까? 아니면 결국 항상 당신 앞에 있는 것을 보게 하는, 뇌의 집중력이었을까?”
책을 읽을 때는 거짓말처럼 책 읽는 사람들‘만’ 보인다. 국적이 어디든 그들이 꼭 나의 친족처럼 느껴진다. 여행에 가져갔던 <이동진 독서법>에서 그는 최적의 독서 장소를 ‘욕조’로 골랐다. 그곳에서 책을 읽으면 자궁 속에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어쩌면 내게 기차는 독서의 자궁 같은 곳이 아닐까. 단지 책을 읽기 위해 기차를 타고 나니 세상의 많은 것이 달라 보였다.
백영옥 | 소설가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