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가까스로 러시아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경기 내용을, 정말 복기하기 싫을 정도로 역대 최악의 과정을 거친 끝에 월드컵 본선행 자격을 얻었다. 월드컵 본선에 가지 못하면 대표팀은 물론 한국 축구 산업 전반에 걸쳐 엄청난 악재가 올 거라 걱정했던 축구계로서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과정이 워낙 좋지 못했음을 아는 ‘태극전사’를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은 차갑다 못해 냉랭하다. 어쩌면 신태용호는 역대 가장 저조한 기대치를 안고 월드컵 본선에 임하는 A대표팀일 수 있다.
▶ 9월 5일(현지 시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분요드코르 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대한민국 대 우즈베키스탄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신태용 감독이 월드컵 본선 9
회 연속 진출을 확정시킨 후 선수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뉴시스
결과부터 짚겠다. 사령탑을 신태용 감독 체제로 바꾼 후 임한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9라운드 홈 이란전, 10라운드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대표팀은 각각 득점 없이 무승부를 기록했다. 냉정히 추락을 거듭하던 슈틸리케호와 비교해 그리 나은 경기 내용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란전에서는 상대 선수가 하나 적은 상황에도 유효 슛 하나 날리지 못하는 굴욕적인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이전 경기에서 무려 10골이나 내주며 흔들리던 수비를 수습했다는 점은 그나마 긍정적 요소다. 내용은 좋지 못했으나 이 두 번의 무승부 덕에 한국은 2018 러시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에서 10전 4승 3무 3패를 기록, 시리아·우즈베키스탄을 따돌리고 조 2위까지 주어지는 월드컵 본선 직행 티켓을 얻는 데 성공했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면 대표팀은 물론 한국 축구 산업 전반에 악영향이 미칠 거라 우려했던 축구계는 천신만고 끝에 티켓을 손에 넣은 대표팀의 행보에 겨우 한숨을 놓았다. 그런데 결과만 좋았을 뿐이다. 이제 월드컵 단골손님을 자처할 만한 한국 축구의 목표는 월드컵 예선 통과를 넘어 본선에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느냐에 맞춰져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금의 대표팀은 팬들에게 큰 기대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망감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지금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난 불을 가까스로 진화한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 두 경기에 축구 인생 전부를 걸어 월드컵 본선행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신 감독을 향한 비판이 다소 과한 느낌이 들긴 해도 이대로라면 본선에서 좋은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건 분명하다. 명분상 도저히 합리적이지 못한 히딩크 감독 선임을 둘러싼 논란이 난데없이 터져 나온 것도 팬들의 불안한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남은 9개월 만에 팀을 확 다르게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애석하게도 15년 전 4강 신화를 이뤘던 히딩크호 시절처럼 K리그의 절대적 희생 속에 월드컵 본선을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지금은 전 세계 모든 A대표팀이 FIFA 선수 차출 규정에 따라 운영되고 있으며, 그 규정을 외면해 소집 훈련을 강행한다고 해도 대표팀 주력 선수들이 대부분 해외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어 유의미한 효과를 보기가 힘들다. 주어진 적은 시간에 강점과 약점을 최대한 살펴 강화하고 보완하는 작업에 주력해야 한다. 대한축구협회는 월드컵 본선까지 약 80일에 달하는 소집 기간을 확보하고 최대 11경기에 달하는 A매치 평가전을 준비할 계획이다. 본선 통과 후 재빠르고 철저한 플랜으로 본선을 준비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하지만 2014 브라질월드컵 이후 3년간 팀이 발전 없이, 오히려 체계가 크게 망가진 현 상황을 감안할 때 협회가 어렵사리 마련한 훈련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 월드컵 본선 9회 진출에 성공한 축구 국가대표팀 신태용 감독이 9월 7일 귀국해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뉴시스
도전자 자세부터 갖춰야
일단 신 감독은 아픔만 가득했던 지난 최종예선 10경기를 모두 잊고 본선에 대비할 수 있는 옥석을 최대한 가리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오는 10월 6일 러시아전(모스크바)·9일 튀니지전(프랑스 칸)에는 유럽파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꾸릴 예정이다. 최종예선 두 경기를 앞두고 위기에 놓인 A대표팀을 위해 선수 조기 소집을 허락해준 K리그에 대한 보답으로, 평가전이 열릴 때 K리그 경기가 열리는 일정을 감안해 K리그 소속 선수들을 이번 원정 A매치 2연전에서 배제한다. 현재 유럽파 선수들의 컨디션과 경기력이 꽤나 큰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만큼 신 감독은 승패를 떠나 두 차례 평가전을 통해 이들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짚어볼 참이다. 그리고 12월 일본에서 예정된 2018 EAFF(동아시아축구연맹) 동아시안컵에서는 K리그·일본 J리그·중국 슈퍼리그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을 시험대에 올릴 계획이다. 마찬가지로 이를 통해 현재 동아시아권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의 경기력을 면밀하게 점검한다. 대표팀 스케줄상 이 동아시안컵을 기점으로 본선에 나갈 선수들이 대략적으로 추려지리라 보인다. 신 감독이 추리고 추렸을 베스트 전력은 내년 초가 돼야 확인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분석은 현 시점에선 할 수 없다. 상대가 결정될 본선 조 추첨식은 오는 12월 1일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열린다. 32개 팀 중 한국·러시아·브라질 등 총 7개국만이 본선행이 확정된 상황이라, 어느 팀이 본선에 올라올지도 가늠할 수 없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상대에 대한 분석과 이에 따른 맞춤 전술 훈련은 빨라야 내년 초에나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이 있다. 상대에 대한 과소평가다. ‘4강 신화’의 여운이 아직 남아선지 몰라도, 한국 축구계와 팬들은 소위 ‘이름값’을 하는 팀이 아니면 가볍게 여기는 자세가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브라질·독일은 무섭지만 우루과이·나이지리아는 해볼 만하다는 식으로 전망한다.
이런 관점은 월드컵 본선, 특히 다른 국가에서 벌어지는 월드컵 본선을 현장에서 단 한 경기만 지켜본다면 엄청난 망상임을 깨닫게 된다.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월드컵 본선에 만만한 팀은 하나도 없다. 월드컵은 어린 선수들이 뛰는 연령별 월드컵 또는 올림픽과는 질적으로 다른 대회다. 전 세계 최고 선수들이 이 무대에 서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며, 당연히 참가팀들은 저마다 최강의 전력을 갖추고 승부에 임한다.
브라질월드컵 현장 취재의 경험을 떠올려보겠다. 까다로운 유럽 팀 러시아와 비기고, 만만해 보이는 아프리카 팀 알제리를 꺾자는 단순한 발상이 어떠한 결과를 불렀는지 기억할 것이다. 지금의 신태용호는 브라질월드컵에 임했던 홍명보호에 비해 전력이 떨어지는 데다 팀 상황은 더 좋지 못하다. 아픈 평가일 수 있으나 본선 참가 32개국 중 32등으로 도전한다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게 월드컵 본선 무대에 선 한국 축구의 정확한 현주소다. 한 번도 하지 못한 1승에 대한 간절함을 품고 월드컵에 임했던 자세가 4강 신화의 시발점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종예선을 거치면서 가혹할 정도로 돌아선 ‘팬심’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러시월드컵 본선에서의 반전이다.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는 건 당연하고 기필코 이기겠다는 절박함을 안고 도전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축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김태석 | 베스트일레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