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5월의 햇살이 광화문을 비추고 있었다. 5월 28일 주말을 맞아 아이들은 광장 분수대를 천진하게 뛰어다녔다. 불과 몇 달 전 촛불과 함성이 가득 찼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광화문은 다시 국민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광화문 뒤로는 청와대가, 옆으로는 정부서울청사가 자리하고 있다. 국민은 목소리를 내야 할 때 광화문을 찾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화문 시대’를 천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민의 목소리를 더 귀 기울여 듣겠다는 뜻이다. 광화문을 국민에게 돌려줌으로써 국민 주권시대를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새 정부의 소통 의지는 ‘광화문 1번가’에 잘 표현됐다. 광화문 세종로공원 내에 마련한 이곳은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아무런 벽도 없다. 학생, 연인, 직장인, 노부부 등 남녀노소 상관없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다.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 단체 티를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이곳을 찾은 모두가 국민인수위원이다.
▶ ‘광화문 1번가’ 부스 내 국민정책 경청단 뒤로 온라인을 통해 접수된 국민 제안들이 전시돼 있다. ⓒ조선뉴스프레스
“공간 자체에 의미가 있다”
광화문 1번가를 상징하는 파란 컨테이너 박스 앞에 마련된 테이블마다 의견을 적고 있는 사람들이 자리했다. 이들은 형형색색의 메모지에 ‘새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을 다양한 색깔만큼 붙였다. 행여나 메모지가 떨어질까 봐 테이프로 붙이고 인증샷도 찍는다.
메모지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차별 없는 나라 만들어주세요’, ‘육아휴직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국민이 지지합니다’…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 새 정부에 대한 격려 등이 담겼다. 꾹꾹 눌러쓴 짧은 메시지에 간절함이 배어 있다. 그동안의 침묵이 봇물 터진 듯하다. 김성예(74) 씨는 “그동안 억울한 게 있어도 어디 가서 억울함을 표현하지 못했다”며 광화문 1번가를 반가워했다. 최이현(가명·29) 씨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공간으로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며 “모든 정책이 받아들여지지는 않겠지만 새 정부의 소통 의지가 엿보인다”고 희망을 내비쳤다.
몇몇 사람은 메모지가 아니라 ‘광화문 1번가 국민인수위원회 접수카드’라고 쓰인 일종의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정부에 제안하는 정책 내용을 적어 접수하면 번호표를 받았다. 관계자는 “꼭 실명을 쓸 필요는 없다”며 “부담스러우면 별칭을 사용하라”고 알려준다. 작성이 끝나면 파란 티셔츠를 입은 봉사자가 길을 안내한다. 파란 ‘정권인수의 문’을 지나니 정부청사에 몇 걸음 더 가까워진다.
가만히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주변에 각종 서류 뭉치를 들고 온 사람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전광판에 번호가 뜬다. “○○번 국민인수위원님 △번 제안 테이블로 오세요.” 순서가 돼 해당 창구를 찾는다. 4개의 컨테이너 부스에 12명의 국민정책 경청단이 앉아 있다. 경청단은 행정자치부, 국민권익위원회, 인사혁신처 등에 소속된 공무원이다. 경청단을 마주한 국민인수위원은 짧게는 1분, 길게는 1시간 동안 저마다의 정책과 민원을 제기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나 싶을 정도다. 한숨과 격앙된 목소리에 그간의 답답함이 여실히 묻어난다.
서울에 사는 김미숙(가명·54) 씨는 공공기관의 예산 낭비를 지적했다. 그는 “공공기관에서 5년이 지나면 새로운 컴퓨터를 구입하는데 안 쓰는 컴퓨터가 한쪽에 방치돼 있다”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용실태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예산이 줄어들지 않게 하려고 일부 조작된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의 세금 누수가 보완되길 바라는 의견을 전했다고 했다. 이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토로하는 국민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의견만 접수하고 가는 이도 상당수다.
▶ ‘광화문 1번가’를 찾아 정책을 제안하는 모든 국민은 ‘국민인수위원’이다. 국민인수위원은 메모지와 접수카드에 자신이 바라는 정책을 적는다. 7월 12일까지 50일간 수렴한 의견은 대통령에게 전달돼 새 정부 정책에 반영된다. ⓒ조선뉴스프레스
“불공정함 토로·신고할 수 있는 방안 마련할 것”
5월 30일 또 한 번 광화문 1번가를 찾았다. 휴무(월요일) 다음 날이라 시작 전부터 10여 명의 대기자가 있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문’이 열렸다.
전남 여수에서 왔다는 민재철(53) 씨는 오전 9시에 이곳에 도착했다. 국민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뉴스를 보고 한달음에 왔다고 했다. 군 복무를 하는 그의 아들은 지난해 훈련 도중 전치 16주의 중상을 입었다. 야간 훈련 도중 포복자세로 명령을 수행하다가 민간 차량에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민간 병원에서 치료한다는 서약을 해서 1000만 원의 진료비를 고스란히 개인이 부담하게 됐다. 또 아들이 고관절 난치성 후유장애가 생길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았지만 국가유공자 등록을 거부당했는데, 이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아직 군 복무 중인 아들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지만 부모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군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면서 이곳까지 찾았다. 그는 접수카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바람을 적었다.
▲훈련 중 입은 상해는 민·군 병원에 관계없이 국가에서 진료비를 보장해줘야 한다. ▲훈련 중 겪은 사고는 민간의 산재와 동일하게 처리돼야 한다.
단체를 대표해서 목소리를 내러 온 사람도 있다. 대한건설협회 강신우(가명·52) 씨는 17개 건설단체의 의견을 모아 탄원서를 가져왔다.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 전문건설공제조합 등이 대한건설협회와 이름을 올리고 수백 장에 달하는 증빙자료를 첨부했다. 최근 6년간 불경기의 여파로 수익이 30% 이상 하락했다는 설명과 함께 공공건설 산정체계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문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놓은 하도급 보호기관에 많은 건설단체가 포함된다”며 “이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입찰제도, 산정체계 등의 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온라인 공간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개진됐다. 그중 ‘EZT****’ 아이디를 사용하는 국민인수위원은 지방직 시간선택직으로 일하고 있지만 초과근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이 같은 현상은 기업에도 적용될 테니, ‘잡플래닛’이라는 사이트처럼 국가에서 공간을 구축해 기업의 연봉, 근무 시간, 노동 강도, 복지 등을 평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안했다. 근로자가 기업의 순위를 매겨 입사 시 참고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근로자 입장에서 좋은 회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며, 공간 마련은 좋은 중소기업에 입사하려는 구직자와 기업이 연결될 수 있는 일거양득의 정책이 될 것이라고 했다.
광화문 1번가를 찾은 국민 중에는 민원 제기자가 많았다. 이들은 민원 제출, 소송, 1인 시위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하다 이곳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억눌린 국민의 목소리가 표출된 것이다. 관공서 민원, 국민신문고 등의 창구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한편으로는 새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이 반영돼 있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은 5월 25일 “우리 사회 곳곳의 불공정함을 토로·신고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을 지시한 바 있다. 새 정부는 국민이 불공정 사례 및 개선 사항을 제안할 수 있도록 6월 1일부터 현장 및 온라인 접수처를 신설했다. 또 불공정 주간을 설정해 6월 18일까지 운영할 계획이다.
광화문 1번가, 새로운 소통 공간
5월 25일 오프라인 광화문 1번가가 문을 열고 다음 날 26일 온라인 공간이 운영을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홍보 영상을 통해 직접 ‘광화문 1번가’의 공식 오픈을 알렸다. 문 대통령은 “나라다운 나라, 국민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가겠다”면서 “많은 의견과 정책 제안을 부탁드리며 앞으로 50일간 열심히 듣고 제가 직접 보고드리겠다”고 말했다.
6월 1일 기준 온·오프라인에 23만여 명의 방문자가 다녀갔고 1000여 건의 전화벨이 울렸다. 광화문 1번가가 국민과의 소통 공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광화문 1번가 관계자는 “광화문 1번가가 소통의 공간이면 좋겠다”며 “정부는 공간을 제공할 뿐 콘텐츠는 국민이 직접 기획하고 참여하는 형태로 만들어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 광화문 1번가
• 7월 12일까지
• 온라인 www.gwanghwamoon1st.go.kr
휴대전화 인증을 통한 회원 가입 후 이용 가능
• 유선전화 02-6006-5000 문자 메시지 010-7391-0509
온라인/문자 메시지 24시간 참여
• 오프라인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89 세종로공원
화요일~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 수요일 오후 8시까지 연장, 월요일 휴무
국민마이크 ‘국민의 생각을 듣습니다’
국민인수위원회는 ‘광화문 1번가’에서 기획 프로그램 ‘국민마이크’를 시작했다. 5월 27일 오후 7시부터 작동한 국민마이크는 새 정부에 바라는 점을 이야기하면 정부가 경청한다는 콘셉트로 진행됐다. 현장에서 신청한 국민은 4~5분간 발언권을 갖고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다. 발언 내용은 녹취·정리돼 국민인수위원회에 전달된다.
이날 첫 발언권은 경북 김천에서 온 박경범 씨에게 주어졌다. 그는 “지금부터 새 정부가 사드 문제를 결정하기 전까지 사드와 관련된 어떠한 행위도 진행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두 번째 마이크는 군 인권센터 활동가 김형남 씨에게 돌아갔다. 그는 “군사법원은 일반법원과 달리 군인의 통제를 받는다. 사실상 행정부에 소속된 군인, 장군이 제도적으로 판결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며 군 인권제도의 개선을 희망했다.
국민마이크는 7월 12일까지 토요일마다 진행될 예정이다.
열린포럼 ‘국민의 정책을 삽니다’
5월 30일 오후 7시 ‘열린포럼’의 첫 무대가 열렸다. ‘소셜벤처와 창업’을 주제로 ‘사회혁신가들’이 주관했다. 소셜벤처를 창업하고 운영하는 종사자들이 직접 참가해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이날 조소담 ‘닷페이스’ 대표는 “작게 실험할 기회는 주지 않고 왜 크게 실패할 기회를 부추기는가”라며 현실적인 지원 정책을 요구했다. 또 장동현 ‘노페땅’ 대표는 소셜벤처 지원 정책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얘기하면서 “소셜벤처 재창업 도전 지원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회적기업가의 의견 수렴 후에는 정부를 대표해 고용노동부 박성희 고령사회인력정책관, 중소기업청 변태섭 창업벤처국장이 참여해 다양한 소감을 나눴다. 박 정책관은 “실패해도 재도전할 수 있는 지원이 중요해 보인다”며 “초기 창업 인큐베이팅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수개월 내 재창업할 수 있는 정책을 선보이겠다”고 밝혔다.
6월 1일에는 한국 YMCA 주관으로 ‘청소년이 보이는 대한민국을 위하여’라는 주제의 두 번째 포럼이 진행됐다. 특히 청소년들이 직접 ‘학교 밖 청소년 지원’, ‘청소년 정치 참여와 18세 참정권 실현’에 대해 발표해 눈길을 모았다.
열린포럼은 매주 화요일·목요일 오후 7시, 총 12회에 걸쳐 개최된다. 사전 고지된 주제와 관련 아이디어를 발표해 정책을 제안할 수 있다. 발표 주제와 관계된 정책 담당자·공무원도 함께 자리한다.
선수현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