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프로스포츠협회가 재미있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6년 9월부터 11월까지 국내 프로 스포츠 4대 종목인 축구, 야구, 남녀 농구와 배구의 62개 구단 관람객 262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6 프로 스포츠 관람객 성향 조사’다.
조사 결과, 관람객이 프로 스포츠에서 가장 만족을 느끼는 것은 ‘응원’이었다. 10대 요인별 만족도 조사에서 ‘팀 응원문화’는 100점 만점에 68.9점을 기록했다. 이는 구단 직원의 친절(65점), 경기장 접근성(64.4점), 이벤트(63.4점)보다 높고, 전체 평균보다 무려 8.1점이 많다.
응원문화 만족도는 특히 프로야구에서 높았다. 73.3점으로 남자 농구(66.9점), 축구(66.6점), 배구(65.9점)를 크게 앞질렀다. 해마다 인기를 거듭해 2016년 국내 프로 스포츠로는 사상 최초로 연 관중 800만을 돌파한 프로야구의 인기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35년의 역사를 자랑하듯 팬들의 평균 응원기간 역시 프로야구는 7.9년으로 2위인 축구보다 무려 2.8년이나 더 길다.
물론 경기장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응원하는 팀의 경기력’(16.8%)이지만, ‘경기장 현장 분위기’(12.9%)도 그에 못지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팀의 승리와 성적, 좋아하는 선수의 출전도 중요하지만 치어리더의 화려한 율동과 응원단장의 호쾌한 구호, 응원가에 맞춰 다채롭게 펼쳐지는 단체응원, 다양한 응원도구와 유니폼 패션 등이 프로야구 관람을 더욱 재미있고 매력적으로 만든다는 얘기다.
프로 스포츠의 관중석을 남성이 독점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여자 선수가 뛰거나, 유난히 여성 팬이 많은 남자 선수가 뛰는 배구와 농구는 말할 것도 없고 야구 관중도 42.9%가 여성이다. 여성 팬이 가장 적은 축구도 29.2%나 된다. 프로야구 두산은 이미 여성 관중이 절반을 넘어섰다.
스포츠의 3대 요소를 꼽으라면 선수, 경기장, 관중일 것이다. 관중보다 감독이나 심판, 규칙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기장에서 선수들끼리만 경기를 하고 응원하는 관중이 하나도 없다면 치열한 승부라 하더라도 맥이 빠질 것이다.
한번 상상해보라. 관중 한 명 없이, 설령 있더라도 한마디 응원도 없이 치러지는 스포츠 경기를. 실제로 축구 경기장 폭력으로 북한에서 관중 없이 월드컵 예선이 열린 적이 있다. 중동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텅 빈 관중석, 그때 모습을 보면 마치 진공 속에서 경기를 펼치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고 박진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스포츠, 특히 프로 스포츠는 팬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이 아니다.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 팀을 응원하고 선수들과 함께할 때 경기가 살아나고 선수들도 신이 난다. 거꾸로 스포츠가 없으면 당연히 관중도 없다. 스포츠와 관중은, 선수와 팬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어느 한쪽만이 일방적으로 존재하거나 성장할 수 없다. 좋은 응원문화가 경기장의 분위기와 선수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그것이 수준 높은 경기로 이어져 관중을 더 불러 모은다.
단순히 승부에 집착하거나 자기 팀,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만 맹목적으로 응원하는 관중으로는 안 된다. 스포츠맨십까지 저버리면서 이기기만 하려는 팀이나 선수도 안 된다. 실수와 패배에도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보내고, 상대 팀의 멋진 승리도 기꺼이 축하해주는 미덕과 아량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선수들, 관중과 순간순간 펼쳐지는 승부의 순간을 함께 공감하고, 긴장과 이완이 출렁거리는 경기장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사람들이 프로야구 경기에 가장 매력을 느끼는 이유 역시 그렇게 서너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수준 높은 관중, 성숙한 응원문화다.
▶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 치어리더들이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뉴시스
모든 문화가 그렇듯 응원문화도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프로야구도 그랬다. 창단 초기에는 자기 지역 연고 팀에 대한 지나친 애정과 승부욕에 집착한 나머지 폭력과 욕설, 집단행동으로 경기장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고, 원정 팀 선수들을 불안에 떨게 하기도 했다. 야구뿐만이 아니었다. 축구도, 심지어 올림픽 경기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자기가 사랑하는 팀, 나아가 스포츠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함께 응원해야 할 관중을 쫓아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모든 스포츠, 경기를 응원하면서 그 자체를 축제로 즐길 줄 알게 됐다. 우리 스스로 스포츠의 본래 정신과 의미, 그리고 승리보다 값진 것들을 발견하고 느끼는 눈과 가슴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 관중이 있기에 선수들부터 결과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것을 더 아름답고 값지게 생각하고, 팬들 역시 거기에 공감하고 함께 즐길 줄 알기에 기꺼이 경기장을 찾는다. 스포츠 선진국, 성숙한 응원문화란 이런 것이 아닐까. 오로지 1등이나 승리만을 원하고, 그런 결과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스포츠는 스포츠가 아니라 전쟁이자 투전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팀, 우리 선수만 잘해야 된다고 목소리 높이고, 상대는 아무리 잘해도 찬사는커녕 욕을 해대고 마구 짓밟으려 하는 응원은 응원이 아니라 위협이자 공포다. 유럽의 훌리건을 보라. 누가 그들을 진정한 팬, 서포터라고 하겠는가. 팀 선수들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스포츠의 발전을 가로막고, 스포츠의 가장 소중한 파트너인 관중이 경기장에 오는 것을 막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마다 응원문화도 조금씩 다르다. 같은 프로야구라도 미국은 치어리더도 응원가도 없다. 자기가 좋아하는 팀의 경기를 편안히 응원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열정적이고, 역동적이고, 공동체적이다. ‘한류’처럼 우리 사회와 문화의 특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넘칠 때도 있지만 갈수록 성숙하면서 우리의 독창적 색깔을 지니게 됐다.
경기장을 찾아 이따금 직접 응원도 하고 다양한 응원 모습을 구경하면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현장의 생생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 그들에 의해 또 하나의 문화가 자란다.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