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가난해지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家貧思良妻),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이 생각난다(國亂思良相).”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한 말이다. 인물은 이렇듯 평안할 때보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더욱 간절하다는 이야기다. 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뛰어난 장수가 더욱 소중하듯이. 그러나 ‘어진 재상’과 ‘뛰어난 장수’에 앞서 지혜롭고 현명한 ‘왕’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그런 왕을 꼽으라면 십중팔구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1397년(4월 10일)에 태어났으니 올해로 벌써 탄신 620주년이 됐다. 세종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보다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평생 잃지 않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어디 한번 살펴보라. 정치,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문화,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그가 이룩한 놀라운 업적에 ‘애민’이 스며 있지 않은 것이 있는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라의 말이 문자와 맞지 않아 모든 백성이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1443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3년 후인 1446년에 반포한 우리글이다.
스물여덟 자(字)인 한글의 뛰어난 과학성과 독창성이야말로 새삼 말해 무엇하랴. 복잡한 모음체계가 점(·)과 두 개의 선(ㅡ, ㅣ)의 조합으로 모두 가능하다. 가장 복잡한 것을 가장 간단하게 끝내는 방식으로 가히 천재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간단하고 쓰기 쉬운 모음 결합 체계는 세계 어느 문자에도 없다.
누군가 그랬다. 그것이 오늘날 휴대폰에서까지 그 위력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고. 실제로 영어나 일본어처럼 글자가 많고 복잡해 한 자판에 서너 자씩 넣어야 하는 것과 달리 한글은 다 넣어도 자판이 남아돈다. 세종대왕의 선견지명이라면 지나친 상상일까. 게다가 이 세 글자에는 ‘하늘, 땅, 사람(天地人)’이란 철학적이고 우주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세계 언어학자들은 한글의 우수성에 열광하고, 세계 곳곳에서 한류 열풍으로 젊은이들이 한글 배우기에 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글은 알면 알수록 빠져들 수밖에 없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상세히 담겨 있는 창제 배경과 글자의 과학적 원리와 독창성과 효율성, 그리고 글자 모양이 이루어내는 시각적 아름다움과 다양성, 그 어느 것 하나 매력적이 아닌 게 없다. 한글에 대해 우리만 잘 모르고 있거나, 무심하게 여기고 있을 뿐.
세종대왕 탄생 620주년을 맞아 국립한글박물관이 5월 28일까지 벌이는 기획특별전 ‘훈민정음과 한글디자인’ 역시 그것을 확인시키는 자리다. 지난 2016년 10월 일본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전시를 새롭게 꾸민 이 전시회는 ‘쉽게 익혀 편히 쓰니: 배려와 소통의 문자’와 ‘전환이 무궁하니: 디자인으로 재해석된 한글의 확장성’이란 두 공간으로 나누어 우리에게 한글의 모든 것, 과거에서 미래까지 시각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어둠 속에서 빛나는 <훈민정음> 원형 33장이 먼저 반긴다. 거기에서 우리의 언어와 문화의 원형인 점·선·원을 기초로 한 한글의 원리와 체계를 긴 선을 따라 규칙적으로 나열한 빛의 질서로 표현한 작품이다. 백성을 위해 가장 쉽게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든 세종의 넓고 깊고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 28년(1446년), 국보 70호, 간송미술관 소장 ⓒ 간송미술문화재단
이렇게 <훈민정음 해례본>을 영상으로 만나고 나면 한글을 창의적 디자인으로 결합시킨 영상, 입체 그래픽이 기다린다. 23개 디자인팀이 국립한글박물관과 협업으로 완성한 그래픽과 입체 디자인, 가구, 조명, 영상 등 30여 작품이 전시된다. 한글의 디자인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그 매력과 독창성이 옷과 가구, 각종 관광 상품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를 둘러보면 한눈에 또 다른 한글 디자인의 세계임을 알게 된다.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훈민정음의 원형을 살리고 확장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주변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조형적 특성에만 매달린 한글 디자인들과 달리 ‘훈민정음’ 속에 있는 한글의 원형과 내용을 풀어낸 작품들이다.
목판에 부조로 한글 창제 당시 음의 높낮이를 나타내기 위해 글자 왼쪽에 점으로 표시한 성조(聲調)를 빛, 소리, 조각의 개념과 발음 분석기의 그래프를 응용해 표현하기도 하고, ‘샘’의 표기법이었던 ‘ㅅ·lㅁ’을 초·중·종성으로 분리해 흑백의 추상화 기법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ㆆ(여린히읗), ㅿ(반잇소리), ㆁ(옛이응), •(아래아)’와 서로 다른 자음 두세 개를 붙인 ㅺ, ㅽ, ㅄ, ㅴ, ㅵ 같은 센소리를 활용한 입체디자인도 있고, ‘부엌’을 뜻하는 고어 ‘브업 ’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도 있다.
이런 그림이나 조각만이 아니다. 자음과 모음을 입체화한 한글 블록, 전통 조선 목 가구에 사용된 장석에서 점, 선, 원으로 이뤄진 한글의 자음과 모음 형태를 발견해 이를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장식적 요소로 재해석한 목 가구, 자음과 모음 형상의 기본인 획과 점의 다양한 조합으로 만든 벤치와 의자 등 창의적이고 아이디어가 신선한 한글디자인 상품도 눈길을 끈다. 한글의 원형 느낌을 살리는 역사성을 가지면서도 현대적 세련미까지 더해져 경쟁력 있는 우리 문화 산업으로도 얼마든지 활용 가능해 보인다.
이렇게 한글은 문자로서 세계화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예술적 변주와 다양한 디자인을 통한 문화상품 콘텐츠로서도 또 하나의 매력과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일본이 그들의 고유한 회화의 생활화로 자포니즘(Japonism)을 세계에 유행시켰듯이, 우리도 한글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다만 지나치게 호들갑만 떨지 않는다면. 한글 창제에 담긴 세종의 ‘애민’을 팽개친 ‘치적’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면.
이대현 |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